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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물 '신입사원'과 김조광수의 새로운 도전

[하작가의 이야기 따라잡기 시즌2] 3일 개봉한 <신입사원: 더 무비>

등록|2023.08.07 13:54 수정|2023.08.07 13:54

▲ 영화 <신입사원: 더 무비> 스틸컷 ⓒ (주)나인플래너스


김조광수 감독의 데뷔작 <소년, 소년을 만나다>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하는 편이다. 교복 입은 두 남고생이 조심스레 주고받는 설레는 눈빛을 넘어 작정하고 이들의 시작을 축복하고 응원하겠다는 듯 기어이 천사 날개를 단 예지원의 큐피트가 활약하는 장면에선 어떤 각오마저 느껴졌다.

이들의 만남을, 특히나 풋풋해서 더 소중하고 애달플 수 있는 청춘들의 사랑을 영화적으로 응원하겠다는 각오 말이다. 이때가 2008년 가을이었고, 35분짜리 로맨스 멜로이자 퀴어 장르인 <소년, 소년을 만나다>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됐다. 요즘 유행하는 BL의 원조격이라 부를 만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까진 아니지만 꾸준했고 일관적이었다. 이듬해인 2009년 두 번째 단편인 <친구사이?>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유해성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 논란에 섰다. 2010년 < 사랑은 100℃ >로 단편 3부작을 완성한 김조광수 감독은 2012년 관객 5만을 넘게 동원한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으로 장편 데뷔했다.

옴니버스 중편 <원나잇 온리>(2014) 중 <하룻밤>을 거쳐 7년 만에 두 번째 장편 <메이드 인 루프탑>(2021>을 선보인 김조광수 감독은 그 기세를 몰아 BL 드라마 <신입사원>을 연출했고, 최근 극장판인 <신입사원: 더 무비>(아래 <신입사원>)를 조금은 유니크한 방식으로 개봉 중이다.

일관성이란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퀴어면서도 로맨틱코미디를 품은 청춘멜로란 범주에 충실한 영화들에 매진해 왔고, 그만큼 주목할 만한 신인 남성 배우들을 감별(?)해 내는 눈을 자랑해 왔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의 이현진과 김혜성, <친구 사이?>의 이재훈과 연우진, <메이드 인 루프탑>(2021)의 이홍내 등이 그들이다.

그 사이 제작자로서 <조선 명탐정> 시리즈를 성실하게 이어갔고, 코로나19를 버텨내며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를 견인해왔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세기의 결혼이라 칭할 만한 그의 결혼식은 <마이 페어 웨딩>(2015)이란 다큐로도 제작돼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성실한 그가 BL이란 트렌디한 장르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본격 퀴어가 아닌 BL의 정서로 접근한 <신입사원>을 보며 <소년, 소년을 만나다> 속 그 초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연출해 오면서 가장 크게 아쉬웠던 것이 주인공 두 사람의 멜로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느끼고 사소한 일에 기뻐하고 또 사소한 일에 다투기도 하면서 감정을 쌓아가는 것이 멜로인데, <신입사원> 이전에 만든 영화들은 사랑의 감정보다 정체성의 고민이나 현실의 벽이 더 크게 느껴지거나 다뤄져서 연출자로서는 조금 답답할 때도 있었다." (김조광수 감독)


김조광수 감독, BL을 만나다 
 

▲ 영화 <신입사원: 더 무비> 관련 사진 ⓒ (주)나인플래너스


"잠깐 만났던 사이입니다. 당연히 지금은 아무 감정 없고. 승현씨도 알잖아요, 이 바닥 좁은 거. 파트너였던 사람하고도 친구로도 잘 지내는 거. 뭐 때문에 기분 상한 거 알겠는데 그렇다고 과거를 무를 수는 없잖습니까."

행복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영문도 모르게 상대방이 토라졌다. 알고 보니, 과거지사와 관련된 하나의 아이템, 전 연인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을 침대 옆에 놔둔 탓이었다. 토라진 승현(문지용)에게 종찬(권혁)이 말한다.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신입사원>의 승현과 종찬이 발 디딘 곳은 어김없는 BL이자 퀴어의 세계다.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하는, 토라진 상대에게 "다들 파트너였던 사람하고도 친구로 잘 지내지 않느냐"고 어렵지 않게 되물을 수 있는 세계다. 어느 저녁 골목길에서 풋풋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승현과 종찬을 본 아저씨가 "아이고, 좋을 때다" 하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지나치는 그런 세계다. '무지개' 동아리 출신 절친 지연(백지혜)이 승현의 첫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조력하는 훈훈한 세계다.

승현, 종찬을 만난다. 잘 나가는 광고기획사 AR기획에서다. 승현은 S대 경영대 석사 출신인 늦깍이 인턴이다. 종찬은 회사 매출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기획1팀 파트장이다. 게다가 종찬은 잘생겼다. 까칠한 파트장(본부장)과 실수투성에다 '금사빠' 인턴의 운명적인 회사 내 만남. 초반부 <신입사원>은 친숙하다 못해 K-드라마 하위 장르라 할 수 있는 '사내연애'의 세계로 무리 없는 초대장을 보낸다.

이들이 함께 넘어야 할 허들은 퀴어의 높은 벽이 아니다. BL의 세계, 아니 K-드라마라고 해도 크게 관계없을 인턴과 파트장이란 사내 계층의 벽을 넘어야 한다. 물론 그에 앞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는 필수다. '금사빠'와 '워커홀릭'의 만남이 쉬울 리 없다. 원래 로맨틱코미디는 연애 전까지를 다루고, 본격 멜로는 연애 후를 탐구한다. BL물인 <신입사원>의 달달한 길은 단연 전자다.

호감은 호의로, 또 그 호감이 애달픈 감정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승현의 감각과 열정을 높게 본 종찬이 인턴인 승현에게 큰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애정이 싹튼다. 그렇지만 이건 사내 연애다. 게다가 승현이 짝사랑했던 대학 선배가 종찬이 잠깐 만났던 상대다. 이런 갈등이 퀴어의 세계였다면 진지하고 무거운 탐구 주제였을 터다. 하지만 BL의 세계에서 그건 온도와 무게 차의 문제일 뿐이다.

<신입사원>이 집중하는 건 "모르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힘들다는 거"라거나 "그럼 편하게 불러요, 형이라든가", "딱 하나만 생각해, 이런 이유로 그 사람을 놓쳐도 되나"라는 대사와 같이 달달한 고백의 순간이나 처해진 갈등을 애정으로 이겨내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이다.

원작 팬들이 바라는 잘생기고 멋진, 그리고 매력적인 두 남성 주인공이 공유하는 감정들을 실사화된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이는 게 관건인 셈이다. 베드신 등 드라마 판보다 높은 수위의 새로운 장면들도 같은 맥락일 터다.

2020 리디북스 BL코믹 어워드를 수상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극화한 <신입사원>은 그 감정들을 K콘텐츠 속 낯설지 않은 설정과 영상으로 연결시켜 친밀감을 강화한다. 동명 웹툰을 간간이 영상 속에 등장시키는 것처럼 원작의 영향을 감출 생각도 없다. 친숙한 K-드라마와 한정된 팬 층이 소비하는 BL 장르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입사원>의 관심이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신입사원>의 개봉 실험
 

▲ 영화 <신입사원: 더 무비> 스틸컷 ⓒ (주)나인플래너스


"고졸인 저한테는 딱 여기까지인 건데(...). 회사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바뀔 수 있잖아요."

후반부를 채우는 또 다른 축은 'K인턴 서사'다. 승현은 서울대 대학원 출신 고학력 인턴이다. 승현을 돕던 인턴 동료 강해(남규희)는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고졸 출신이다. 둘 다 AR기획 정직원 채용에서 탈락하는데, 이 둘은 의기투합해 '인턴해방일지' 영상을 만들고, 치솟은 유튜브 조회수가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사내 연애란 큰 축이라면 인턴 서사는 <신입사원>을 청춘물로 버티게 하는 주요한 서브 서사다. 승현의 도전을 공을 들여 묘사하는 동시에 게이와 이성애자인지 아닌지 확인되지 않는 강해가 조화롭게 연대하는 식이다.

이들은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속 견원지간처럼 으르렁댈 필요가 없다. 어차피 BL 속 회사는 남주인 상사가 여주인 인턴을 끌어주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세계다. 그리고 둘의 연대는 자연스레 청춘들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진다.

AR기획 속 '무지개들'인 승현과 종찬, 지혜와 강해가 JS 커뮤니케이션으로 뭉치는 결말은 노골적이어서 더 귀엽다. 퀴어도, BL도, K-드라마도 청춘이라는 화두 속에 차이를 두지 않는 세계, <신입사원>이 지향하는 바다.

노골적이되 무겁지 않고, 발랄하되 진심이 훼손되지도 않는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등재됐다는 "오빠"를 대체하는 "형"의 쓰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신선하고 즐겁다. 누군가는 다소 올드한 형식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실하고 일관되게 '청춘'을 응원해 온 감독의 진심이 묻어난다.

지난해 8월 개봉한 <시멘틱 에러:더 무비>는 6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야말로 BL 팬들을 극장으로 끌어 모은 깜짝 흥행이다. 1만 8천을 동원한 일본 BL물 <체리마호>의 성공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전후해 일본 작품을 필두로 BL 장르 영화들이 심심찮게 극장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이를 두고 김조광수 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에 "OTT 등을 통해 생긴 BL 팬층이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면서 "휴대전화가 아닌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콘텐츠를 보고 싶다는 팬들의 요구가 지속해서 있었다"고 극장판 개봉의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신입사원>은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지난 3일 개봉 이후 오는 16일까지 2주간 매일 1회씩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1회씩 상영한다. 대신 배우 및 감독과 관객들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이벤트를 늘렸다. 특히나 더 어려운 독립예술영화 시장을 고려한 일종의 새로운 시도이자 도전일 수 있다. 배우들의 적극 호응으로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김조광수 감독의 이러한 도전을 응원하는 바다.
 
"최근에 개봉했던 한국 독립영화들의 흥행 성과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극장 개봉 관객 3천 명을 넘지 못하는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작비는 물론이고 개봉을 위해 들인 비용도 회수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신입사원:더 무비>는 개봉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의미 있는 관객과의 만남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신다면 상영관을 늘려갈 수도 있고 개봉 기간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관객들이 많지 않아서 2주 동안만 상영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해서 투자하신 분들께는 손해를 입히고, 무대인사나 GV를 하러 간 배우에게는 힘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등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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