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이>는 왜 통일부를 '일본과 연대'라고 규정했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통일부의 존재 의의를 변질시키는 윤석열 정부
▲ 6일 자 <산케이뉴스> 기사 '한국 통일부 쇄신, 납치 해결을 우선하는 조직으로... 일본과 연대' ⓒ 산케이뉴스
4·19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라고 헌법 전문이 명령하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불의"를 높이 띄우고자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이승만 동상까지 세웠다. 이승만 폭정에 항거한 4·19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4·19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도전은 또 다른 양상으로도 진행되고 있다. 통일부의 존재 의의를 훼손시키는 방법으로도 4·19를 흠집 내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고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인 <산케이뉴스>가 한국 통일부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일본과 연대'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산케이뉴스>는 '한국 통일부 쇄신, 납치 해결을 우선하는 조직으로... 일본과 연대'라는 기사를 6일 올렸다. 한국의 통일부가 북한이 아닌 일본과 손잡는 양상을 그런 제목으로 표현했다.
"북조선 정권과의 융화나 남북협력을 전제로 했던 부서가 납치문제의 해결 등 인권문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으로 탈피를 도모한다"는 말로 통일부의 최근 상황을 소개한 이 기사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과 관련해 "김씨는 납치를 포함한 인권문제로 일·미와 연대해 대북 압력을 강화할 태세"라고 전했다.
그런 뒤, 통일부 역사상 최초로 외교부 출신 차관이 된 문승현 통일부 차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미와의 안전보장협력 강화를 제창하는 국제정치학자인 김씨를 통일상에 지명함과 함께, 차관에 미국통인 외교관을 기용하고 일·미 중시를 인사로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통일부를 미·일과 연대해 북한을 압박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1969년 3월 1일 국토통일원을 출범시킬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 정권의 난처함을 외면한 결과다. 4·19 이듬해에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4·19를 무시하기 힘들었던 박 정권이 뒤늦게나마 4·19의 요구에 부응하는 모양새를 만들고자 실현시킨 것이 통일원 설치였다. 윤 정권의 최근 흐름은 이런 역사적 맥락과 괴리돼 있다.
박 정권이 통일원을 설치한 것이 통일을 위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대북 압박이 통일원 설치의 진정한 의도도 아니었다. 박 정권은 4·19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그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만들고자 했다. 통일부 창설에 담긴 이 같은 배경이 윤 정권에서는 도외시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억눌렸던 한국 민중의 정치적 욕구는 1945년 해방 직후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하지만 미군정과 친일세력과 극우세력에 의해 그것은 억압을 당했다. 1948년 제주 4·3과 여순사건(여순항쟁)으로 재차 터지는가 싶었지만 다시 억눌러졌다.
그 욕구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뒤이은 반공 공안정국하에서 더욱 단단히 억압됐다. 그랬던 것이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 "불의에 항거한" 당시의 국민들은 그 '불의'가 억압했던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조리는 반공·냉전과 한반도 분단전략에 기초했다. 그래서 '불의'에 대한 항거는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양상도 함께 띠면서 전개됐다.
국토통일원 설치의 원동력
4·19 주역들이 반독재뿐 아니라 통일까지도 염두에 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고문이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진보적 논객이었던 이종률 부산대 교수가 혁명 1주년인 1961년 4월 19일 <민족일보>에 기고한 '3·4월의 인식과 그 올바른 기념'이 그중 하나다.
이종률 교수는 이승만 집권기의 여야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범한 최대 죄악은 "대중의 열망이며 이 땅 정치난국 해결의 열쇠인 민족통일 문제를 추호도 거론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이 저지른 3·15부정선거의 진짜 문제점은 투표 부정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민족 최대의 모순인 분단을 방치하는 전제하에서 그런 선거를 치른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3·15 선거의 투표 방법에서의 부정을 문제 삼는 것보다는 그것의 정치적인 면의 반민족성 즉 반민족통일적인 선거를 감행한 데에 자유·민주 양당 함께 책임져야 할 반민족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썼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물러간 뒤에는 분단을 막기 위해 제2의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미군정과 친일세력과 극우세력의 연합 공격에 눌려 분단을 막는 데 실패했다. 이때의 한이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함께 1960년에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이종률의 기고문은 1945년 이후 15년간 억눌렸던 그런 감정 폭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4·19 시기의 한국은 '민주' 못지않게 '통일' 이슈로도 뜨거운 공간이었다.
2007년 12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연구보고서>에 실린 김선미의 '4·19를 전후한 시기 통일운동의 흐름'이라는 논문은 "4·19 직후는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단연 통일문제가 가장 격렬하게, 가장 전면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던 시기"라며 "이는 4·19가 단순히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으로 상징되는 반민족적이고 비자주적인 현실에 대한 총체적 거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그런 뒤, "제도권 정당과 지식인 사회가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진보적 사회단체와 연계된 학생·청년계가 국면을 주도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분위기가 국토통일원 설치의 원동력이 됐다. 통일부가 발간한 <통일부 30년사>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제6장 첫 문장에서 통일부 창설의 배경을 이렇게 서술한다.
"1960년 4·19혁명 후 정당·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각계에서는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통일문제를 장기적으로 연구·추진하기 위한 정부기구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해 11월 초에 민주당에서 분당한 신민당이 통일 방안에서 정부에 통일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 것이나, 장면 국무총리가 통일문제연구소 설치를 언급한 것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남북연대가 아닌 한일연대의 도구로 활용
▲ 1969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토통일원 개원식에서 개원 연설을 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그해 하반기부터 논의된 통일부 설치가 9년 뒤인 1969년에 가서야 일단락된 것은 그간의 정치적 우여곡절 때문이다. 1961년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1963년에 민정이양이 이뤄지고 1964년부터 한일협정 문제로 대격변이 일어난 데 이어 베트남 파병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했던 것도 통일부 설치를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9년은 박 정권이 3선 개헌을 성사시킨 해다. 한일협정에 이어 장기독재까지 강행한 박 정권이 뒤늦게나마 통일원을 설치한 것은 4·19의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실질적 통일 사업보다 연구·조사 기능에 치중하는 통일부를 만든 것은 그것이 연출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 정권이 통일원을 만든 최대 동기는 통일 추진이나 대북 압박에 있지 않았다. 정부가 통일 사업에 나선다는 인상을 조성해 국민들의 통일 열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통일의 욕구를 막고자 보에다가 임시로 틀어막은 것이 국토통일원이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통일부는 4·19의 결과물이었다. 통일을 요구하는 한국 민중의 목소리와 그것을 두려워하는 반공세력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것이 1969년 국토통일원 설치였다.
지금 윤 정권은 통일부를 실질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는 통일부 설치에 담긴 4·19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자, 통일원 설치를 허용한 반공세력의 이해관계도 함께 무시하는 일이다.
윤 정권은 박 정권이 보에다가 틀어막은 것을 도로 빼내려 하고 있다. 통일부를 변질시켜 대북 압박과 한미일 연대를 고조시키려 하고 있다. <산케이뉴스> 표현처럼, 통일부를 남북연대가 아닌 한일연대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통일부의 존재 의의를 변질시키는 이런 시도들은 4·19 민중을 분노케 하는 것인 동시에 박정희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다. 봇물이 터지지 말라고 겨우겨우 틀어막아 둔 것을 윤 정권이 서슴없이 빼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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