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주인공이 21세기 SF영화에 나온다면?
[김성호의 씨네만세 522]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문학용어로 변주라는 말이 있다. 좁게는 앞문장과 뒷문장, 앞문단과 뒷문단의 변형된 반복이며, 넓게는 한 작품의 변형된 반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제작되는 인간을 감시하는 중앙정부를 다룬 SF물은 < 1984 >의 변주로 이해되며, 멸망한 세상 끝의 이야기를 다루는 온갖 아포칼립스 작품들은 그 효시로 꼽히는 소설 <최후의 인간>의 변주로 이야기되고는 하는 것이다.
변주는 때로는 큰 줄기를 받아들여 새로움을 창작하는 일이기도 하고, 본래의 이야기를 그대로 연상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부분적 재창작에 그치기도 한다. 원전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몇 가지 설정이며 시대적 특성을 더하는 오마주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오늘 다룰 작품 또한 그와 같다고 하겠다.
드라마와 고전소설의 절묘한 만남
<닥터 후> 다섯 번째 뉴 시즌이 종료된 뒤 나온 스페셜 회차는 특별히 문학적 가치를 주목받았다. 시리즈가 문학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온 탓도 있겠으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SF적으로 변주한 흥미로운 회차였기 때문일 것이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여느 때처럼 닥터(맷 스미스 분)가 동반자인 에이미(카렌 길런 분)와 로리(아서 다빌 분) 부부와 함께 시간여행 도중 맞이한 사건을 다룬다.
에이미와 로리는 시간여행 중 조난신호를 접수하고 신호를 보내온 어느 우주선에 올라탄다. 우주선은 기상이변 속에서 추락할 위험을 겪고 있는데, 착륙할 수 있는 행성에선 이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닥터는 추락을 막기 위하여 행성을 지배하는 남자 카즈란 사딕(대니 혼 분)을 찾아간다.
카즈란은 아버지가 개발한 기계를 통해 행성을 장악한 지배자다. 본래 이 행성엔 대기를 떠다니는 물고기가 가득했는데, 이들 물고기 중에선 인간을 사냥해 먹고 사는 녀석들이 제법 있어 사람들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던 중 카즈란의 아버지가 물고기를 다스리는 기계를 발명했고, 사람들의 피해가 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21세기 SF물이 변주한 스크루지 영감
문제는 사딕 부자가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기계를 오로지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모두가 사딕 부자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4000명이 넘는 승객이 탄 우주선에 위기가 닥치고 카즈란은 대통령의 부탁까지 묵살하며 이를 돕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루 이틀 다져진 몹쓸 성격이 아니다. 닥터 또한 카즈란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우주선은 더욱 큰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닥터가 아니다. 닥터에겐 특별한 무기가 하나 있고, 그 무기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통하는 법이다. 그는 카즈란의 어린시절로 나아가 그의 역사를 바꾸어나가려 시도한다.
이야기는 심술궂은 늙은 지배자와 그의 성품을 바꾸어내려는 한 낯선 이의 이야기다. 또 카즈란의 과거 속에서 마주한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또 그가 오늘의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가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에는 카즈란이 제 마음을 돌려 사람들을 구하려 노력하게 되기까지, 요컨대 결코 변하지 않을 듯했던 한 인간이 변화하기까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이 놀라운 하룻밤의 이야기는 일찍이 디킨스가 써내려간 판타지 동화 <크리스마스 캐럴>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몇 년 전 죽은 동업자의 귀신을 만나 제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되는 괴팍한 노인네 스크루지의 이야기로부터 디킨스가 진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변화, 또 가능성이었다. 거지조차 구걸하려 들지 않는, 맹인 안내견조차 그를 보면 먼 길을 돌아가려 할 만큼 인색하고 완고한 인간이었던 노인이 단 하룻밤에 변화할 수 있음을 더없이 궁색한 처지였던 디킨스가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권선징악적 주제에 그치는 흔한 동화들과 구분되는 생명력을 소설 안에 심어내었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시간의 세례를 건너 꾸준히 선택받는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스페셜 회차로 독립돼 제작될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고, 변주의 대상이 된 고전의 여전한 가치를 입증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방송국 BBC는 바로 이렇게 제 나라가 자랑하는 문학을 그들이 가진 문화의 힘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영국이 오늘날 손꼽는 문화강국인 이유이자 그들이 행해온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라고 믿는다.
이를테면 오늘날 제작되는 인간을 감시하는 중앙정부를 다룬 SF물은 < 1984 >의 변주로 이해되며, 멸망한 세상 끝의 이야기를 다루는 온갖 아포칼립스 작품들은 그 효시로 꼽히는 소설 <최후의 인간>의 변주로 이야기되고는 하는 것이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포스터 ⓒ BBC
드라마와 고전소설의 절묘한 만남
<닥터 후> 다섯 번째 뉴 시즌이 종료된 뒤 나온 스페셜 회차는 특별히 문학적 가치를 주목받았다. 시리즈가 문학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온 탓도 있겠으나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SF적으로 변주한 흥미로운 회차였기 때문일 것이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여느 때처럼 닥터(맷 스미스 분)가 동반자인 에이미(카렌 길런 분)와 로리(아서 다빌 분) 부부와 함께 시간여행 도중 맞이한 사건을 다룬다.
에이미와 로리는 시간여행 중 조난신호를 접수하고 신호를 보내온 어느 우주선에 올라탄다. 우주선은 기상이변 속에서 추락할 위험을 겪고 있는데, 착륙할 수 있는 행성에선 이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닥터는 추락을 막기 위하여 행성을 지배하는 남자 카즈란 사딕(대니 혼 분)을 찾아간다.
카즈란은 아버지가 개발한 기계를 통해 행성을 장악한 지배자다. 본래 이 행성엔 대기를 떠다니는 물고기가 가득했는데, 이들 물고기 중에선 인간을 사냥해 먹고 사는 녀석들이 제법 있어 사람들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던 중 카즈란의 아버지가 물고기를 다스리는 기계를 발명했고, 사람들의 피해가 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21세기 SF물이 변주한 스크루지 영감
문제는 사딕 부자가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기계를 오로지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모두가 사딕 부자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4000명이 넘는 승객이 탄 우주선에 위기가 닥치고 카즈란은 대통령의 부탁까지 묵살하며 이를 돕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루 이틀 다져진 몹쓸 성격이 아니다. 닥터 또한 카즈란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우주선은 더욱 큰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닥터가 아니다. 닥터에겐 특별한 무기가 하나 있고, 그 무기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통하는 법이다. 그는 카즈란의 어린시절로 나아가 그의 역사를 바꾸어나가려 시도한다.
이야기는 심술궂은 늙은 지배자와 그의 성품을 바꾸어내려는 한 낯선 이의 이야기다. 또 카즈란의 과거 속에서 마주한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또 그가 오늘의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가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에는 카즈란이 제 마음을 돌려 사람들을 구하려 노력하게 되기까지, 요컨대 결코 변하지 않을 듯했던 한 인간이 변화하기까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이 놀라운 하룻밤의 이야기는 일찍이 디킨스가 써내려간 판타지 동화 <크리스마스 캐럴>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몇 년 전 죽은 동업자의 귀신을 만나 제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되는 괴팍한 노인네 스크루지의 이야기로부터 디킨스가 진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변화, 또 가능성이었다. 거지조차 구걸하려 들지 않는, 맹인 안내견조차 그를 보면 먼 길을 돌아가려 할 만큼 인색하고 완고한 인간이었던 노인이 단 하룻밤에 변화할 수 있음을 더없이 궁색한 처지였던 디킨스가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권선징악적 주제에 그치는 흔한 동화들과 구분되는 생명력을 소설 안에 심어내었다.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은 시간의 세례를 건너 꾸준히 선택받는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스페셜 회차로 독립돼 제작될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고, 변주의 대상이 된 고전의 여전한 가치를 입증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방송국 BBC는 바로 이렇게 제 나라가 자랑하는 문학을 그들이 가진 문화의 힘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영국이 오늘날 손꼽는 문화강국인 이유이자 그들이 행해온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라고 믿는다.
▲ <닥터 후: 크리스마스 캐롤>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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