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법 개정, 남북영화교류 앞장섰던 강대선 감독 별세
통제와 검열의 영화법 개정 나서다 고초 겪기도
▲ 1970년대 영화제작 현장의 강대선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1980년대 영화법 개정과 1990년 남북영화인 교류의 물꼬를 텄던 원로 영화인 강대선 감독(제작자)이 13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4년 전남 광산에서 출생해 성균관대 문리대를 중퇴한 강대선 감독은 대학 시절 영화잡지 <영화세계>의 기자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국제신보>의 문화부 기자로도 활동했다. 1960년대 초에는 전성기를 누리던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입사해 기획실장, 연기 및 섭외부장을 했다.
1974년에는 대만과의 합작영화 < 5천리 대도망 > <나이도 어린데>를 연출, 제작했했다. < 5천리 대도망 >은 합작영화 사상 처음으로 대만의 국영영화사인 중앙전영(中央電影)과 함께 만들었고, 동남아와 유럽, 미국 등지에 50만 달러에 수출됐다.
▲ 고 강대선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강대선 감독의 활동에서 주목된 것은 영화법 개정 문제였다. 1980년 전두환의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시나리오 사전 심의와 필름 검열 등 영화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영화인협회(현 영화인총연합회)의 몇몇 영화감독들이 주축이 돼 '영화법 개정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당시 선진국 수준의 영화예술 창작의 자유 보장을 요구한 것이었다.
영화법은 1970년대 이후 개정 없이 한국영화 통제의 도구로 활용됐고, 저질화를 양산했다. 당시 강대선 감독이 위원장을 맡은 영화법개정 추진위원회는 검열폐지, 제작 및 표현의 자유를 골자로 한 영화법 개정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청원과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의 눈밖에 나서 물리적 폭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1986년 법안개정에 성공해 여러 제약을 완화시켜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반을 닦았다.
1988년에는 이태원 대표와 함께 한국영화업협동조합 공동 이사장을 역임했고, 1988년~1993년까지 아태영화제 한국대표단장, 1995년 한국영화 감독위원회 위원장, 영화인협회 이사 등을 거쳤다.
1990년에는 남북한 영화교류를 추진하여 분단 이후 처음 남북 영화가 한자리에서 상영되는 뉴욕남북영화제 개최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남한 영화인 대표단장을 맡았다.
1987년 고인이 제작하고 김정옥 감독이 연출한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의 기획을 맡았던 채윤희 영상물등급위워장은 "원판 필름을 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해 12일 상영회를 가졌는데, 김정옥 감독님은 부인과 함께 참석하셨으나 제작자인 강대선 대표님은 참석하시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빈소는 한양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고 15일 10시 발인한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을 거쳐-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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