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직공장 앞 오전 11시, 실제 상황입니다
수십 년 후엔 엄청난 자산이 될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 읍성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편집자말]
김포와 강화 사이 빠르고 세찬 물살로 유명한 염하수로가 흐른다. 수로는 천혜의 해자(垓字) 역할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개성과 한양에서 가깝다. 이로 인해 섬은 위급을 대신해,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곤 했다.
▲ 연무당 터와 강화 서문최초 근대식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강화 서문 옆 연무당 터. ⓒ 이영천
바다를 횡단하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섬은 그래서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라가 곤궁에 처할 때마다 감내해야만 했던 역사의 무게가, 수로의 탁한 물살에 비추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지천인 섬
강화는 문화재 보고(寶庫)다. 섬으로 향할 때마다 아득한 시공간으로 빨려드는, 흡사 박물관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섬에 이르면 그래서 차분해진다. 속도가 전부인 현실에서, 느리게 걸을 수 있는 옛 시공간에 이르러 기분마저 느긋해진다. 이런 까닭에 강화 섬을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분지로 이뤄진, 강화 읍성 4대 문 안이 아늑하다. 그리 넓지 않은 읍성 한가운데를 동-서로 지나며, 공간을 남-북으로 가르는 대로만 도드라질 뿐이다. 이 길만 벗어나면, 어느 곳이건 좁은 길과 골목 일색이다.
▲ 강화읍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바라 본, 분지의 강화읍. 왼쪽으로 남산이 멀리 고려산이 보인다. ⓒ 이영천
어떤 골목은 왕조시대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옛길이다. 수백 년 발길이 닦아낸 골목이다. 강화 읍성은 무엇보다 이런 구불구불한 길 일색이어서 좋다. 강화읍 도시계획은 구부러진 이런 골목을, 분명 직선으로 펴겠다는 계획을 세워두었을 것이다. 차라리 옛길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틀을 바꾸는 건 어떤가.
이 공간, 아니 섬은 문화재가 지천이다. 역사의 숱한 고비를 감내했다는 방증이다. 이는 반대로 강력한 건축 규제가 이뤄진다는 다른 의미다. 이 규제가 가져다준 역설은, 비록 재산권에 제약을 가할지라도, 낮은 건축물로 인해 편안한 시선과 경관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아파트가 없어서 좋다. 가히 힐링의 도시라 할 만하다. 강력한 규제가 만들어낸 공간의 분위기는, 분명 수십 년 후엔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이 공간이 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다.
▲ 강화 동문안길철종의 사저였던 곳에 들어 선 용흥궁. 궁의 담벽을 타고 간 동문안길이 고즈넉하다. ⓒ 이영천
이런 영향으로 강화읍은 오랜 기간 답보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이게 마냥 답보와 쇠락일 뿐일까. 규제에 묶인 건축 행위 제한이 이제 값진 자산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도시재생의 흔적과 성과가 곳곳에서 배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복고 감성을 찾는 많은 인파로 붐비는 도시가 되었다.
재생하는 도시 공간
도시재생의 핵심은, 무엇보다 발길을 끌어들일 요인을 제공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강화읍은 도시재생의 이러한 핵심에 한 발짝 다가선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그것도 관(官)이 아닌, 한 사업가의 기지와 창의가 빚어낸 성과다. 누가 주체인들, 결국 도시재생은 창의성에 달려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강화읍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메카였다. 강화읍에만 60여 개 크고 작은 공장과 공방이 있었고, 4천 명 이상이 종사했다. 1970년대 밀려든 값싼 나일론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현대식 섬유 공장이 들어서고, 화학섬유가 유행하면서부터다. 경쟁력 잃은 강화 직물 산업은 부득이 문을 닫아야 했다. 노동자와 공장이 하나둘 섬을 떠났다. 현재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몇 곳만이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방직기 소리 요란하던 공장들이 제 기능을 잃고, 발길 끊긴 적막의 시공간에 갇혀 버렸다. 몇은 폐가처럼 방치되었고, 몇은 건물 일부만 남아 번성하던 옛날을 회상할 뿐이었다. 이렇게 방치되던 공장 중 하나가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조양방직이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하면서부터다.
▲ 변신한 조양방직카페와 문화 공간으로 변신한 조양방직. 오전 11시 개장을 기다리는 인파가 긴 줄을 만들어 낸 풍경이 인상적이다. ⓒ 이영천
결코 요란한 철거재개발이 아니었다. 옛 공장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채였다. 카페와 전시 등 전혀 다른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장소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복고풍에 목마른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러자 적막에 갇혀 있던 공간 곳곳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더불어 강화를 찾는 사람들 발길이 머물다 간다. 차로 스쳐 지나기 바빴던 강화읍에, 머물 장소를 마련해 준 셈이다. 새로운 문화 공간의 탄생이다.
이는 풍부한 역사 문화재와 결합, 강화읍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가능성을 높여 준 계기였다. 낡은 근대 유산의 재발견으로, 높다란 아파트나 건물 없이도 도시가 훌륭하게 변모할 수 있다는 걸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후 강화읍에 산재한 직물공장이 변신을 거듭한다. 동광직물은 생활문화체험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평화직물은 소창을 만드는 체험관으로 운영 중이며, 이화견직은 담장 길로 남아 사람들 기억을 소환하는 중이다. 가장 규모가 컸다는 심도직물 공장 터는 용흥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과정에 높다란 굴뚝 끝자락을 남겨 놓았다.
▲ 심도방직 굴뚝방직 공장 터는 '용흥궁 공원'으로 변했고, 그 상징으로 굴뚝 맨 꼭대기 일부를 잘라 저런 모습으로 보존하였다. ⓒ 이영천
왕의 길
강화 도령이다. 형의 옥사로 역적이 되어, 땔감과 농사일로 궁핍한 삶을 연명하는 처지였다. 세도정치 세상이다. 서적을 가까이 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있었겠는가. 영조 후손 대부분이 이런저런 누명으로 제거되고, 단지 일부만 남았을 뿐이다. 그중 세도정치 세력에게 가장 적합한 인물이 강화도령 이원범이었다. 농사꾼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 창덕궁 권좌에 앉는다.
▲ 용흥궁왕이 되기 전 이원범이 살았던 초가집 터에 들어선 용흥궁. ⓒ 이영천
강화 도령이 살았던 초가삼간 자리엔 수수한 기와집으로 변한 '용흥궁'이 앉아있다. 허수아비 왕은 이런 거 외엔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순수했던 강화 섬 생활을 몹시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왕이 된 원범이 강화 읍성을 나서던 길을 되짚어 본다. 용흥궁에서 동문안길을 나와, 남북으로 뻗은 북문길을 따라 내려온다. 다시 남문안길로 꺾어 들어, 강화 읍성 남문을 빠져나온다.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지금의 강화대로를 타고 갑곶돈대에 이르러 배에 오르지 않았을까.
▲ 북문길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김상용 순절비' 앞에서 바라 본 북문길. 왕은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간다. ⓒ 이영천
강화군은 '왕의 길'을 관광 상품화하고 있다. 이 길만 걸어도 강화 읍성 역사의 절반은 보는 셈이니, 무척 좋은 일이다. 길을 더 늘여, 고려가 임시 도성으로 쌓은 북문에서부터 짚어보자.
경사진 북문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고려궁지가 있다. 그 복원의 신빙성 등에 관해선 논외로 하자. 궁지 안과 주변이 오랜 기간 강화 통치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이 복원되어 있다. 용흥궁 뒤 옛 심도직물 자리에서 옆 언덕에 오르면, 강화 도령이 왕이 된 50여 년 후 한옥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이 자리한다. 공원 남쪽 끝자락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을 기리는 비각이 서 있다.
▲ 강화 성공회 성당근대 건축물 중 하나의 이정표로 알려진 강화 성공회 성당. 언덕 위에서 읍성을 굽어 보고 있다. ⓒ 이영천
남문안길에 접어들어서는 소창 체험관에서 강화 섬의 직물 역사를 살피고 체험해 볼 수 있다. 남문 못 미쳐 자리한 대명헌은, 강화도 천석꾼이 지은 한옥이다. 1920년 지방 부호의 한옥 형태를 만날 수 있다. 남문을 나서, 복원된 성벽을 따라 갑곶돈대로 향하는 옛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제발 오롯이 기억되고 보존되길
▲ 강화 남문강화 읍성 남문. 철종은 이곳으로 나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갑곶돈대에서 배에 올랐을 것이다. 문 아치 뒤로 남문안길이 보인다. ⓒ 이영천
왕의 길을 따라 걸으면 눈은 즐거우나, 만감이 교차한다. 권력을 오로지하던 세도정치 세력의 적확한 실체도 모른 채, 농사꾼은 어리둥절한 길을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왕으로서 걸었던 길마저 나라의 기운이 저무는 불행한 시절이었다. 왕의 길이, 강화 섬 운명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한강 끝자락에 자리함으로써, 나라의 어려움과 난리 때마다 피해를 감당해야만 했던 강화도가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일까.
섬은 이제 인천광역시에 속해 한적한 도농복합도시의 모습으로 남았다. 수많은 문화유산을 머리에 이고 무거운 역사의 하중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 이로써 파괴가 아닌 보존이라는 울타리에 들어 옛 모습과 정취, 강화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섬이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듯, 강화 읍성의 고즈넉한 모습이 제발 오롯이 기억되고 보존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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