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바르셀로나 팬이 순식간에 레알 마드리드로 갈아탄 사정
유럽 여행 왔다가 국제부부 친구 집에서 4박 5일간 있었던 이야기
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내가 머물러야 하는 일정은 심지어 월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였다. 이건 뭐 거의 테러 아닌가. 사람 좋은 제안에 숙소비 아낄 마음으로 생각 없이 응했다간 우정이 끝장날 수도 있다. 아니야 상미야, 숙소를 따로 잡을게. 대신 두어 번 만나서 수다나 떨자고.
상미는 꽤나 강경했다. 미안할 게 뭐냐는 것이다(난 그렇게 재워줄 자신 없는데...). 그래 너는 괜찮다 치자. 렉스(상미 남편, 가명)와 아이들은 안 불편하겠어? 상미는 간결했다.
"모두 반기지, 오히려 거절하는 네가 이해가 안 간다는데?"
"그래? 그 정도야? 그럼...... 아니야 그래도 좀."
"야, 그냥 와서 자."
"그래 알았다."
실은 나도 맘 붙일 데가 필요했다. 우주도 삼형제와 놀게 해주고 싶었다. 결국 못 이긴 척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과연 우린 웃으며 헤어질 수 있을까.
▲ 마드리드 근교 세고비아의 수도교도시에 물을 운반하기 위한 다리로 로마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 유종선
여행도 결국은 일종의 소비 행위다. 관광지와 교통편, 숙소의 스케줄을 계획하고 구매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여행자들은 볼 수 있는 것들만 보게 된다. 현지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이 궁금했지만, 들여다 볼 기회가 없다. 상미 집에서의 며칠은 나와 우주에게 여행의 새 단계를 열어주는 기간이었다. 마드리드 현지에서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가족과 동행하는 경험이었다.
상미와 렉스는 중학생이 된 큰 아들의 방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방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우리가 'FC바르셀로나 홈구장에 다녀왔는데 되게 좋더라'고 말하니, 첫째는 우릴 반기는 와중에도 '거기보다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더 좋다'며 라이벌팀에 대한 적대감을 확실히 표현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은, 우주에게 FC 바르셀로나 홈구장에서 사온 옷은 안 입히기로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도 난 쩔쩔 맸는데, 둘이나 셋 키우는 집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내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이어질 네 번의 아침은 그 체험판이었다.
프랑스 대가족 풍경, 폭풍처럼 보였다
상미와 렉스의 첫째 온(가명)은 중학생, 둘째 조(가명)는 5학년, 셋째 린(가명)은 유치원 생이다. 객식구 둘까지 포함해서 깨워서 씻기고 아침을 먹이고 나가기까지, 무슨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일이 일어났다. 투정, 장난, 갈등, 훈육, 칭찬, 독려, 눈물바람, 웃음바람....... 사람이 많으니 이렇게 감정의 관계도가 많구나. 숱한 감정들이 짧게 짧게 오가다가 우루루 각자 집을 나섰다. 나는 숨을 죽이며 뭔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렉스를 처음 알게 됐던 건 둘이 한국에서 연애를 할 때였다. 난 어릴 때 잠시 프랑스에서 체류한 적이 있어서 프랑스 사람을 반가워 한다. 렉스는 마침 나와 동갑이라 어릴 때 봤던 TV프로그램이나 만화 주제가 같은 것을 공유하는 기쁨이 있었다. 워낙 오래된 기억이고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현지 친구가 없어, 난 다 잊어버린 서툰 불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렉스랑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다만 달랐던 건 난 파리에서 살았기에 파리를 그리워하는데, 렉스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 출신이라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서울 깍쟁이들' 같은 느낌인 걸까? 상미와 렉스가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에 거주하게 된 것도, 또 바르셀로나보다는 마드리드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취향에 따른 결과일지도 몰랐다.
둘은 결혼 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신혼을 보냈는데, 난 그 때도 이들 집에서 며칠 신세진 적이 있었다. 첫째 온이가 아기고 둘째 조가 뱃 속에 있을 때다. 상미는 한국어에 굶주렸던 듯 내게 많은 대화를 쏟아냈다. 당시 렉스는 갑작스레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상미가 우울해한다며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싱글이었던 난 상미의 고군분투를 거죽이나마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렉스는 임신 후기였던 상미를 대신해 나를 기차역에 내려줬다. 그 순간 나는 휴대폰을 렉스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렉스는 걱정 말라며 소포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당장 온갖 연락을 도맡는 조연출 일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 근처에 택시가 한 대 멈춰섰다. 두고간 휴대폰을 들고 상미가 쫓아왔던 것이다. 내가 덤벙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어릴 때나 별로 다른 게 없다.
▲ 디즈니 '백설공주' 성의 모델이라는 세고비아 알카사르 앞에서"우주야 이렇게 뛰면서 찍으면 신기한 사진이 나와."... "아빠 뭐하시는 거에요 창피하게" ⓒ 유종선
상미네 부부는 둘 다 재택 근무 중이라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있어보였다. 상미는 이번에도 굶주렸던 한국어 대화를 길게 할 것을 기대했으나, 나는 나대로 친구 집에 오래 있는 게 미안해 촘촘히 일정을 잡고 돌아다녔다. 우주와 난 시내와 왕궁도 구경하고, 톨레도와 세고비아 당일투어도 다녀왔다.
그러니 한국어 대화는 각자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 여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마드리드에서의 고군분투, 현재 회사에서 자리잡은 과정, 살면서 느꼈던 무신경하거나 은근했던 인종차별, 사람들과 부대끼며 속상했던 이야기, 성취에 대한 자부심,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한국 엄마들에 비해 너무 자식들에게 못해주는 것 같은 불안함...
난 막내를 위한 한국어 교재를 상미에게 주었고, 상미는 남편의 허리를 위해 한국에서 공수해온 귀한 파스들을 여행자인 내게 한아름 선물해주었다. 여행 온 주제에 현지인에게서 한국 물품을 강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한 두 장만 받을 생각이었으나, 일단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나니 살 거 같아 염치 불구하고 주는 대로 받았다.
형제가 없는 우주는 삼형제와 어울리는 일이 신기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다만 형들의 호의어린 농담이나 장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워했다. 온이가 집 안 칠판에 장난으로 '우주 바보'라고 쓰니 갑자기 울먹울먹하며 '내가 왜 바보에요?' 하고 내게 되물어 온이가 당황하기도 했다(왜긴, 너랑 놀아주려고 그런 거지...).
우주는 외동이다보니 늘 다른 친구들과의 어울림에 신경을 쓰게 된다. 형제들끼리 몸싸움하며 키득거리고 노는 것도 부러웠다. 우주는 급격한 애정을 갖게 된 FC바르셀로나의 위대함을 자꾸 강변하며 대화에 참여했지만, 온이는 레알 마드리드가 최고라며 그 부분만큼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 덕에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스페인에서 8년째 살고 있으니 스페인어도 잘 했다. 또 나는 렉스랑 대화하려니 영어를 섞어 쓰는 게 서로 편했다. 그러다 보니 4개 국어가 뒤섞였다. 같이 카드게임을 하는데 아이들의 전략 전술이 스페인어-프랑스어-한국어로 휙휙 테이블을 날아다녔다. 여기가 바벨탑인가. 여행 온다며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인강을 듣다 온 우주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집이었다.
내게도 신기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렉스와 상미가 큰 솥에 스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줄 때, 첫째 온이는 'Je n'aime pas légume!'(나 채소 싫어!) 하고 외쳤다. 그 순간, 수십년 세월이 압축되며 프랑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친구들이 외치던 문장이 생각났다.
맞아. 저 문장이었어! 그때 그 채소는 맛이 없어서 애들이 싫어했었지, 저 문장 참 자주 얘기했었다. 그래도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온이를 어르던 렉스는 갑자기 웃는 나를 이상하게 보다가는, 자초지종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드리드 축구팀 '직관', 하지만 더 좋았던 건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 대 옐체'의 경기그 와중에 자기만의 여행 영상에 필요하다며 우주는 동영상을 찍었다. ⓒ 유종선
체류 기간 동안 마침 스페인 축구 리그 경기가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대 옐체'의 경기였다. 상미 가족에게 감사할 겸 티켓을 구매했다. 이 가족도 첫째를 제외하고는 축구에 별 관심이 없어서 첫 라리가 관람이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FC바르셀로나에 취했던 우주는 아무 위화감 없이 레알 마드리드 응원에 영혼을 바쳤다. 하도 레알, 레알, 소리를 질러서 같이 응원하던 앞 자리 사람들이 흘끔흘끔 돌아볼 정도였다.
경기는 4:0. 아센시오 첫 골, 벤제마 두 골, 모드리치 마지막 골까지, 유명 선수들이 골을 몰아넣는 축제같은 경기였다. 특히 아센시오 팬인 첫째 온이는 그것 보라며 득의양양해했다. 다만 관중석 한 칸만을 채우고 초반에 응원을 보내다 침묵에 빠져버린 옐체 팬들을 보기가 좀 안쓰러웠지만.
둘째 조와는 레티로 호수로 보트도 타러갔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서 노젓기에 빠져버린 우주에겐 특급 코스였다. 5학년 조는 체격이 좋아, 처음이라면서도 균형을 잘 잡고 힘 좋게 배를 운전했다. 지금은 작은 우주도 저렇게 커나가겠지. 같은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저마다 부모가 돼서 자기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일이 문득 돌아보면 참 신기하다. 당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삶의 장면들을 많이도 지나왔다.
▲ 레티로 호수에서 노 젓는 아이들마드리드 레티로 공원 안에는 큰 호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유유히 보트 놀이를 즐긴다. ⓒ 유종선
네 밤이 정신 없이 지나고 스페인을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유치원에 막내 린을 데려다 주고 온 상미는 우버를 불러주었다. 기념 사진을 찍고 택시를 타려는데, 갑자기 조가 막 팔을 흔들며 뛰쳐나왔다. 십여년 전처럼 내가 또 휴대폰을 두고 나왔던 것이다. 마침 조가 제일 엄마를 닮았는데, 휴대폰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딱 그 때의 상미 모습 같았다. 조야, 너 그땐 상미 배 속에 있었는데.
나라면 엄두도 내기 힘들 환대와 대접 속에 마드리드를 떠나며 상미 부부와 삼형제에게 너무 고마웠다. 자세히 쓰지 못한 많은 마드리드와 주변 관광지의 멋짐이 있었지만, 내게 마드리드는 이 가족과의 대화들로 가장 깊게 남았다.
이제 프랑스다. 난 또 다른 기대에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나에게 프랑스는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 있다. 3년 밖에 살진 않았지만, 한국에선 매년 이사 다녔던 기억인데 프랑스에는 처음으로 오래 한 집에 머물렀었다.
한국에서 바빴던 부모님도 외국 생활 중에는 서로 서로에게 집중할 여유가 더 있었다. 가족의 전성기였다고나 할까. 이제 아들과 함께 그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우주에게 속삭였다. 우주야, 이제 도착할 곳은 아빠가 어릴 때 살던 나라야. 아빠한텐 되게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야.
▲ 톨레도의 석양스페인 옛 수도 톨레도의 석양. 이날 가이드는 우리에게 이 곳이 배우 지성이 배우 이보영에게 프로포즈를 한 장소라고 소개해주었다.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 ⓒ 유종선
니스 공항에 내리니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하늘이 우릴 반겼다. 공항 앞에서 우주의 사진을 찍어 주곤 바로 트램을 탔다. 그리고 난 프랑스식 환영을 받았다, 소매치기. 순식간에 지갑이 사라졌다. 내 현금, 내 카드, 내 미소와 따뜻한 마음도 같이 사라졌다. 이 이야긴 다음 기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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