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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솔벤트 집단중독사건이 2023년에 전하는 메시지

[여성노동건강 ON] 화학물질과 여성 노동자 - '1994년 LG전자부품 솔벤트 집단중독사건'

등록|2023.08.25 11:11 수정|2023.08.25 11:11
지난 7월 14일, 국무조정실은 총 13개 사회 분야에서 '킬러규제'들을 삭제 및 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동 분야에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더불어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대한 법률(아래 화평법)·화학물질관리법(아래 화관법)이 그 대상이다. 이후 대통령은 '킬러규제'를 언급하면서 규제 완화를 공식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시행 중인 화평법·화관법은 화학물질 관리 및 등록을 규제하기 위해 제·개정된 법안으로 2012년 구미 불산 누출사고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2015년 제·개정되었다. 개정 화평법은 일정량 이상의 신규/기존 화학물질을 등록·관리하면서 화학물질로 인한 위험을 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환경부 소관의 화평법·화관법은 노동부 관할의 산업안전보건법(아래 산안법)보다 관리 대상 화학물질의 종류도 많으며,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들을 전반적으로 관리한다는 의의도 존재한다.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 완화 흐름은 그만큼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유해화학물질들이 증가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가진다. 언제까지 정부는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의 생명보다 규제로 인해서 이익이 줄어든다는 기업의 논리가 더 무게를 갖도록 만들 것인가?
 

▲ 1994년 LG전자부품 양산공장에서 발생한 솔벤트 집단중독사건에 관한 당시 보도 기사. ⓒ LG전자부품(주) 노동자 유기용제 집단중독사건


화학물질 피해, '여성 노동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이슈페이퍼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은 안전한가?>는 현행 안전보건관리 기준이 남성 노동자의 평균 신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성별 직업 분리 현상이 뚜렷한 현실 속에서 여성노동의 평가절하가 여성 다수 사업장과 분야에서 위험 인식이 떨어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심지어 생식독성 물질에 대한 피해 역시 젠더에 따라 동일하게 판단되지 않는다. LG전자 반도체 여성노동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에 낸 장해등급결정 처분 취소소송은 작업 중 고환을 잃은 남성노동자가 장해등급 7급을 받는 것과 달리 난소 상실에 대해서는 현재의 법령이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A씨는 유해화학물질의 노출로 재생불량성 빈혈과 조기난소부전을 겪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고 있는 일터는 위험에 대응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 수 있는 조직력에도 차이가 있다. 201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산업안전보건법 상 관리대상 유해물질의 분류체계 및 관리기준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는 현행 산안법처럼 유해화학물질들을 목록화하고, 안전보건을 위한 각종 설비/장치 기준들을 명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고 위험성 평가를 통해서 노출 정도를 확인해 실제 노동자에 대한 영향을 관리하는 것의 중요함을 일차적으로 언급한다.

일터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뿐 아니라 위험 요소에 대한 인식과 정보, 예방책 등을 마련하기 위한 위험성평가를 의무화하고, 노동자들이 필수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보건활동의 권한과 조직력의 뒷받침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임금·불안정 노동 직종에 산재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가 처한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1994년 LG전자부품 솔벤트 집단중독사건'을 돌아보며
 
"국민소득 만불 시대를 축하하던 일들이 이미 옛날 일이 되어갑니다. 지금쯤은 만불에서 얼마간 더 소득이 불었겠지요. 그 당시 마음에서 우러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근로환경과 작업여건도 그러한가'하고요. 과연 그러합니까?"

- 솔벤트 집단중독사건 피해 노동자 정미리

이 인용구는 솔벤트 중독사건을 겪은 피해 노동자가 1996년 <LG전자부품(주) 노동자 유기용제 집단중독사건 자료집>에 쓴 <산업재해를 방지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파수꾼이 되어야>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2017년 이후 국민소득 3만불을 달성한 지금도, 피해 노동자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솔벤트 집단중독 사건은 1994년 LG전자부품 양산 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8명이 유기용제 중 하나인 '솔벤트5200'으로 인해 집단중독을 겪은 사건이다. '택트스위치2과'에 속한 여성노동자 20명 중 18명이 생리 중단 및 불임 증상을 일으켰고, 그 중 1명은 재생불량성 빈혈로 위독 증세를 겪었다. 이 사건은 한국 최초의 생식독성 사건이자, 2-브로모프로판으로 인한 세계 첫 생식독성 사건이었다.

사건 자료집을 보면 피해가 가시화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은 어지럼증 등을 심하게 느꼈다. 솔벤트가 휘발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배기장치도 가동되지 않았다. 악명 높은 1994년의 거센 더위는 작업장을 고온으로 만들었고, 택트스위치의 불순물을 침지 방식으로 제거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솔벤트 사용 4개월 만에 생식독성 증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차후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의 역학조사 결과로 솔벤트의 성분인 2-브로모프로판이 생리 중단의 원인임을 파악했다.

이 사건은 많은 점들을 시사한다. 우선 현장에서 사용된 솔벤트가 일본에서 개발된 제품으로, 일본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공청회에 참석한 사측 담당자는 이를 언급하면서 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앞서 노동자들이 증언한 것처럼 배기장치를 가동하지 않았고, 밀폐된 고온의 작업장에서 일했다는 점, 침지 작업 도구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았다는 점이 차이를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적절한 작업 도구 및 사업장 환기를 통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산재법은 노동력 상실 여부로 장애등급 및 보상기준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식기능장애에 대해서는 보상기준이 없었다. 1996년 3월 서울·부산지역 여성단체들은 사건 발생 8개월이 지난 후에도 보상절차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성명을 냈다. 1996년 공청회 및 투쟁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하루 2~3시간 추가 근무를 시켰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또한 노동부 장관 인가 없이 야간근로를 시켰으며 작업환경 측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해 3월 2일에 LG전자부품 전 대표이사가 산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화학물질 등록·관리의 공백 속에서, 일차적으로 생식독성 물질이 파악되지 않았고 적절한 도구와 장치가 없었던 일터에서 신규화학물질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삶을 망가뜨렸는지를 드러낸다. 규제완화 흐름은 안전과 위험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노동자와 시민 삶의 안전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편의에 맞는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규제의 완화 및 공백이 여성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맞물려 만들고 있는 위험의 지점들을 고민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지안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여성노동건강권팀의 팀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8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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