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절대 안 찾아준다" 사부다운 안전교육
후쿠오카 인근 오노죠 현장 실습을 가던 날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기자말]
▲ 일반 가정정원에 비하면 단조로운 조경이다 ⓒ 유신준
지금까지는 대개 경트럭으로 사부와 둘이서 다녔는데 오늘은 한 사람이 늘었다. 사부 또래의 동네 분이다. 병원 조경을 손질하러 가는데 일거리가 많단다. 목적지는 후쿠오카 인근 오노죠(大野城)라는 곳이다. 4.5톤 트럭이 셋을 태우고 굉음을 내며 출발했다.
작업장소는 4차선 도로에 인접해 있다. 인도 옆에 아벨리아(꽃댕강나무) 생울타리와 아이비가 있고 병원 바로 앞쪽으로 에레강테시마라는 나무가 근위병처럼 서 있다. 일반 가정정원에 비하면 단조로운 조경이다. 나는 사부와 전동 바리캉을 맡았다. 함께 온 분은 청소와 뒷정리를 하는 역할이다.
사부의 배려
아벨리아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나무다. 원예품종으로도 개발되어 줄기색도 다양하다. 수고(나무의 높이)가 1미터도 안 되는 데다 가지가 잘 자라 도로변에 생 울타리로 많이 심는다. 바리캉을 대자마자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일하는 재미에 향기는 덤이다. 기분좋은 시작이다.
모양을 내기 위한 전정은 앞 뒤를 구분한다. 일의 양이 200이라면 앞은 120% 뒤는 80% 비율이다. 잘 보이는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라는 것이다. 3면 자르기를 한 다음 모서리를 살짝 다듬어주는데 뒷쪽은 조금 깊게 하고 앞쪽은 한둥만둥한다. 각지게 보여야 정성껏 다듬어 놓은 면이 날카롭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앞쪽에 더 정성을 들인다. 뒤를 일부러 허술하게 하라는 게 아니라 앞에 조금 더 신경을 쓰라는 거다.
▲ 현관 앞 토피어리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곳임에도 나에게 맡겼다 ⓒ 유신준
아주 큰 나무를 제외하고 같은 나무를 둘이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계 일이라서 위험하기도 하려니와 작업은 각자 판단을 맡기려 함이다. 완성은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다. 완성되면 나중에 사부가 고칠 곳을 지적한다. 나는 지적받은 곳을 살펴보고 깨닫는다. 제자 수업의 전형이다.
사부는 고칠 곳은 반드시 지적하지만 칭찬에 인색하지도 않다. 잘했어라며 엄지를 들어보이는 일이 요즘 잦다. 니가 이렇게 잘하니 내가 곧 일을 그만 둬야겠구나. 농담도 잊지 않는다. 현관 앞에 작은 토피어리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곳임에도 나에게 맡긴다. 한 사람의 정원사로서 책임감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사부의 배려인 듯하다.
배운 대로 하면 된다. 위쪽에도 신경을 쓰지만 아래쪽 정리에도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둔다. 아래가 깨끗하면 작품이 훨씬 돋보인다. 둥근 것은 시선 높이를 변화시켜가며 거친 곳은 없는지 면밀히 점검한다. 어느 쪽에서, 어느 시점에서 보든지 매끄럽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부의 평가에 의하면 요즘 내 실력은 초딩과 중딩을 왔다갔다 하는 중이다. 어제는 중딩이더니 오늘은 다시 초딩이구나. 여기 다시 마무리 해! 일을 마치고 나서 나도 응수한다. 완벽합니다. 프로니까! 사부가 항상 쓰는 표현이다. 너는 실력은 중딩인데 입만 살아서 프로구나! 당연하죠. 누구한테 배웠는데. 그 사부의 그 제자잖아요.
▲ 창밖으로 보이는 시마도네리코. 나무가 삶의 풍경을 바꾼다 ⓒ 유신준
어딜가든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정원사의 숙명이다. 주변과 잘 어울리는지, 나무로 인해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그 나무를 지우고 현장을 상상해보는 버릇도 생겼다. 점심때 우동 가게에 갔었는데 창밖에 시마토네리코가 보였다. 가림나무로 심은 것이다.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식당 안 풍경이 그렇게 고급지고 격이 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무를 지우고 상상해 보면 가게는 삽시간에 허당이 된다. 한여름이라 햇볕이 내려 쬐는 데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풍경이 그렇게 삭막할 수가 없다. 나무가 삶의 풍경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는 거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거구나 깨닫게 된다.
오후에 에레강테시마라는 나무를 손질했다. 도감을 찾아보니 히노키(노송나무)과다. 잎이 앞뒤가 없고 줄기가 직립해서 붙는 게 특징이다. 자르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사부스타일은 초지일관 '자연스럽게'다. 무성해진 가지를 정리할 때도 아래부터 확실히 잘라준다. 원래 없던 것처럼, 손대지 않은 듯 정리한다. 물론 가리코미같은 걸 만들 경우는 예외다. 가리코미는 굴곡없이 반듯하게 자른다. 고요한 수면처럼.
제자는 못나도 순종이 첫째다
▲ 가리코미는 굴곡없이 반듯하게 자른다. 고요한 수면처럼. ⓒ 유신준
도제식 수업은 사부가 제자를 옆에 두고 가르치는 게 특징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정원일처럼. 제자가 많으면 실력의 경중을 따져 사부가 적당한 사람을 후계자로 정하는 게 이 바닥 관례다. 순번을 정해 부르기도 하는데 1번 제자, 2번 제자... 이런 식이다.
특별한 이변이 없으면 대개 1번 제자가 가업을 잇게 된다. 먼저 시작했으니 그만큼 실력이 나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1번 제자인 데다가 다른 제자도 없다. 자연스럽게 3대 쿠마우에 조원을 이을 단독 후보다. 사부가 나한테 가업을 물려주는 일까지는 없을 것 같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전에 재미있게 봤던 만화에도 인상깊은 사제 관계가 있었다. 쇼와겐로쿠 라쿠고신쥬(昭和元禄 落語心中)라는 에니메이션이다. 라쿠고(落語)는 일본 전통예능으로 뼈있는 만담을 뜻한다. 의상이나 화장, 무대장치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세 치 혀로 관객과 승부하는 외로운 세계다.
▲ 쇼와 겐로쿠 라쿠고 신주 ⓒ 공식 홈페이지 캡쳐
극중인물 야쿠모는 제자가 둘이다. 호쾌한 성격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스케로쿠. 후계자는 따놓은 당상이다. 허나 천재 특유의 비 협조성과 불경한 언행으로 급기야 사부의 심기를 건드려 파문당한다.
자연스럽게 재능보다 인품이 샌님같은 키쿠히코가 야쿠모 가업을 잇게 된다. 물론 이 두 문장 사이에 수많은 사랑과 이별, 격정와 환멸의 숨막히는 인생 드라마가 굽이굽이 숨어 있다. 핵심은? 잘난 제자는 뒤끝이 안 좋다. 제자는 못나도 순종이 첫째다.
시간이 되면 한번 검색해보시라. 사부와 제자, 제자와 제자사이의 인간관계 심리묘사가 동양적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만화 단행본도 속속 출간중이며 에니메이션 동영상도 만들어졌다. 지난해 NHK드라마로도 제작돼 이른바 3종 세트가 완성될 정도로 평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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