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뮌헨까지 긴 여행을 했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가 더워서일까요, 아니면 기차 여행이 유달리 길었기 때문일까요. 남부 독일에 처음 도착한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왠지 뮌헨의 분위기는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도 뮌헨과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은 독특한 지역입니다. 독일 북부와는 문화적으로도 많은 것이 다르죠. 바이에른은 독일 내에서 가장 넓은 지역입니다. 인구도 두 번째로 많은 주죠. 주로 개신교도가 많은 독일 내에서, 특이하게도 가톨릭 신도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고요. 바이에른 지역은 독일 전체와는 다른 특수한 문화권으로 분리해서 보기도 합니다.
뮌헨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두고, 밀맥주 한 잔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이에른 지역은 밀맥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맥주가 아니라 밀맥주를 주로 생산한다는 점도, 바이에른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바이에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국가 자체가 영주들의 연합체로 이루어져있었던 중세 시대에는 물론이었죠.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될 때에도, 바이에른은 다른 주에 비해 큰 자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에른 주의 공식 명칭은 "바이에른 자유주(Freistaat Bayern)"입니다. 물론 명칭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이에른 주는 분명 정치적으로 특수한 지역입니다.
당장 2021년까지 독일의 집권여당이었던 기독민주연합(CDU)은 바이에른 주에서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이에른 주에서만 활동하는 기독사회연합(CSU)과 연합해 활동하고 있죠.
바이에른 주는 독일 헌법의 역할을 하는 기본법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독일 기본법이 만들어질 때, 서독의 각 주 의회는 표결을 통해 기본법을 승인했지만 바이에른만은 이를 거부했죠. 각 주에 충분한 자치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결과적으로 3분의 2 이상의 주가 기본법을 승인했으므로 기본법은 바이에른에서도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가 가진 특수성은 기본법 문제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죠.
아픈 역사이지만, 뮌헨에서 나치당이 탄생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치당의 탄생은, 독일 정치의 맥락보다는 바이에른 정치의 맥락에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치는 뮌헨에서 탄생한 작은 정당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태로움을 타고 크게 성장했죠. 베를린에 수도를 둔 바이마르 공화국을 적대시하는 데, 바이에른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지역감정 역시 큰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치당이 전국 정당으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던 사건이 1923년 벌어진 '뮌헨 맥주홀 폭동'입니다. 바이에른 지역의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를 연합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폭동을 벌인 것이죠.
물론 폭동은 실패했지만, 어떤 주의나 사상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성장의 기폭제가 됩니다. 혐오와 배제의 사상은 더욱 그렇죠. 체포되었던 히틀러는 9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뮌헨에서 성장한 나치는 곧 독일 전체의 정치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풀 꺾였던 나치와 극우 민족주의의 힘이 다시 강해진 것은 1929년 대공황의 영향이었죠. 전쟁 이후 취약해져 있었던 독일 경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치는 점점 파고들어 갔습니다.
사실 의외로, 나치당은 결코 의회의 절대다수를 점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당제 국가였습니다. 여러 정당이 국회에 진출하고, 연합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형태였죠. 그러나 국회의 절반 이상을 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치당이 이런 상황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당이 독자적으로 정권을 꾸릴 수는 없었죠.
히틀러는 1933년 다른 정당과의 연합과,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습니다. 총선은 곧 다시 치러졌지만,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벌어지며 국가 비상사태가 선언되었죠. 좌파 인사들 대부분이 체포당한 상태로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회에서, 히틀러는 의회의 입법권을 모두 행정부에게 넘기는 '수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총통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독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비극을 잉태한 뮌헨의 옛 나치당 당사 앞에는, 이제는 나치 기록 박물관이 서 있습니다. 나치의 성장과 집권, 집권 이후 독일의 모습까지를 자세히 담고 있는 박물관이었습니다. 독일 전체뿐 아니라, 바이에른이라는 지방 정치의 시각에서 나치당의 성장과 집권 과정을 담고 있더군요.
이 박물관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박물관의 전시가 나치 시절의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전시에서는 나치당이 탄생한 정치적, 경제적인 맥락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한 개인의 책임을 간과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당의 깃발을 걸고 웃는 어느 약국 주인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나치당과 전체주의의 부상은 한 시대가 만든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뮌헨의 골목에 살고 있던 어느 무명의 개인도 이 체제의 동조자였음을 그들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개인의 책임과 사회 전체의 책임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어느 개인에게 무한한 책임을 돌리고 사회의 책임은 면제하거나, 그 반대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한 시대는 사회와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치를 만들어 낸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지적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서 나치의 이념에 찬동했던 개인의 죄가 결코 면제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한 시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도 어쩌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개인과 국가의 책임을 모두 부인하지 않는 것. 나라는 개인과, 내가 속한 집단의 책임이 모두 병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바이에른이라는 이 독특한 지역의 미래도, 아마 그 이해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뮌헨 시청 ⓒ Widerstand
실제로도 뮌헨과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은 독특한 지역입니다. 독일 북부와는 문화적으로도 많은 것이 다르죠. 바이에른은 독일 내에서 가장 넓은 지역입니다. 인구도 두 번째로 많은 주죠. 주로 개신교도가 많은 독일 내에서, 특이하게도 가톨릭 신도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고요. 바이에른 지역은 독일 전체와는 다른 특수한 문화권으로 분리해서 보기도 합니다.
뮌헨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두고, 밀맥주 한 잔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이에른 지역은 밀맥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맥주가 아니라 밀맥주를 주로 생산한다는 점도, 바이에른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 바이에른 옛 왕궁 ⓒ Widerstand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에른 주의 공식 명칭은 "바이에른 자유주(Freistaat Bayern)"입니다. 물론 명칭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이에른 주는 분명 정치적으로 특수한 지역입니다.
당장 2021년까지 독일의 집권여당이었던 기독민주연합(CDU)은 바이에른 주에서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이에른 주에서만 활동하는 기독사회연합(CSU)과 연합해 활동하고 있죠.
바이에른 주는 독일 헌법의 역할을 하는 기본법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독일 기본법이 만들어질 때, 서독의 각 주 의회는 표결을 통해 기본법을 승인했지만 바이에른만은 이를 거부했죠. 각 주에 충분한 자치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결과적으로 3분의 2 이상의 주가 기본법을 승인했으므로 기본법은 바이에른에서도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가 가진 특수성은 기본법 문제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죠.
▲ 과거 히틀러가 사용했던 뮌헨 음악연극대학 건물 ⓒ Widerstand
아픈 역사이지만, 뮌헨에서 나치당이 탄생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치당의 탄생은, 독일 정치의 맥락보다는 바이에른 정치의 맥락에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치는 뮌헨에서 탄생한 작은 정당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태로움을 타고 크게 성장했죠. 베를린에 수도를 둔 바이마르 공화국을 적대시하는 데, 바이에른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지역감정 역시 큰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치당이 전국 정당으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던 사건이 1923년 벌어진 '뮌헨 맥주홀 폭동'입니다. 바이에른 지역의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를 연합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폭동을 벌인 것이죠.
물론 폭동은 실패했지만, 어떤 주의나 사상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성장의 기폭제가 됩니다. 혐오와 배제의 사상은 더욱 그렇죠. 체포되었던 히틀러는 9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뮌헨에서 성장한 나치는 곧 독일 전체의 정치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풀 꺾였던 나치와 극우 민족주의의 힘이 다시 강해진 것은 1929년 대공황의 영향이었죠. 전쟁 이후 취약해져 있었던 독일 경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치는 점점 파고들어 갔습니다.
사실 의외로, 나치당은 결코 의회의 절대다수를 점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당제 국가였습니다. 여러 정당이 국회에 진출하고, 연합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형태였죠. 그러나 국회의 절반 이상을 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치당이 이런 상황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당이 독자적으로 정권을 꾸릴 수는 없었죠.
히틀러는 1933년 다른 정당과의 연합과,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습니다. 총선은 곧 다시 치러졌지만,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벌어지며 국가 비상사태가 선언되었죠. 좌파 인사들 대부분이 체포당한 상태로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회에서, 히틀러는 의회의 입법권을 모두 행정부에게 넘기는 '수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총통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독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비극을 잉태한 뮌헨의 옛 나치당 당사 앞에는, 이제는 나치 기록 박물관이 서 있습니다. 나치의 성장과 집권, 집권 이후 독일의 모습까지를 자세히 담고 있는 박물관이었습니다. 독일 전체뿐 아니라, 바이에른이라는 지방 정치의 시각에서 나치당의 성장과 집권 과정을 담고 있더군요.
이 박물관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박물관의 전시가 나치 시절의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전시에서는 나치당이 탄생한 정치적, 경제적인 맥락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한 개인의 책임을 간과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당의 깃발을 걸고 웃는 어느 약국 주인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나치당과 전체주의의 부상은 한 시대가 만든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뮌헨의 골목에 살고 있던 어느 무명의 개인도 이 체제의 동조자였음을 그들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개인의 책임과 사회 전체의 책임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어느 개인에게 무한한 책임을 돌리고 사회의 책임은 면제하거나, 그 반대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한 시대는 사회와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치를 만들어 낸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지적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서 나치의 이념에 찬동했던 개인의 죄가 결코 면제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한 시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도 어쩌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개인과 국가의 책임을 모두 부인하지 않는 것. 나라는 개인과, 내가 속한 집단의 책임이 모두 병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바이에른이라는 이 독특한 지역의 미래도, 아마 그 이해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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