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치악산' 논란, '곤지암'과는 이게 다르다
반복되어 온 비슷한 논란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니
▲ 영화 <치악산> 포스터 ⓒ 와이드 릴리즈㈜
치악산이 왜?
난리다. 원주에 위치한 국립공원 치악산이 돌연 이슈의 한가운데에 섰다. 9월 13일 개봉을 앞둔 영화 <치악산>의 김선웅 감독이 산에 토막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포스터를 SNS에 게재한 게 발단이었다. 이에 원주시는 제목 변경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원주시는 이미지 훼손을 문제 삼았다. 치악산 한우, 복숭아·배·사과, 둘레길 등 치악산을 활용한 지역 고유 상품과 관광지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 거라 우려하고 있다. 이에 원주시는 영화 제목을 바꾸고, 작중 치악산 단어를 모두 삭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제작사 도호 엔터테인먼트는 요구를 거절했다. 대신 치악산과 무관한 허구사건임을 명시하고 주민 초청 시사회 등을 열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원주시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과 상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유·무형의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사실 <치악산> 이슈는 낯설지 않다. 실제 지명을 제목으로 활용하는 여러 영상 콘텐츠에서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 과거 사례를 통해 <치악산> 이슈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논란의 결말도.
괴담이 다 같은 괴담이 아니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례는 당연히 2018년에 개봉한 <곤지암>이다. <곤지암>은 미국 CNN이 '세계 7대 소름 돋는 곳'으로 선정한 곤지암 남양정신병원을 모티브로 삼은 공포 영화다. 개봉 당시 모두의 예상을 깨고 267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흥행력을 보여줬다.
<치악산>과 <곤지암>은 유사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실제 장소와 괴담을 차용했다. 공포 영화라는 장르적 공통점도 빼놓을 수 없다. 개봉 전에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같다. 정신병원 건물 및 부지 소유주는 원주시처럼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반면에 <곤지암> 제작사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임을 지속적으로 밝혀왔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법원은 <곤지암> 측의 손을 들어주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 영화가 소유주 개인에 대한 내용이 아니기에 소유주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볼 수 없다. ② 영화 내용은 명백히 허구이며, 따라서 정신병원에 대한 허위 사실이 아니다. ③ 애초에 곤지암 괴담 자체가 영화 제작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이처럼 '창작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한다면 <치악산>의 제목 논란 역시 과도한 간섭이다. 논란이 커지면서 <치악산>의 내용이 허구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고, 영화 내용 자체도 허구에 기반했으니.
다만 한 가지가 다르다. 곤지암 괴담과 달리 치악산 괴담 내용은 영화 개봉 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논란 때문에 괴담의 존재가 알려지는 모양새다. <곤지암> 개봉 당시에는 괴담이 호기심으로 이어진 반면, <치악산>의 경우에는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결정적인 차이인 셈이다.
'팩트가 힘이다' 해외 편
▲ 영화 <치악산> 스틸컷 ⓒ 와이드 릴리즈㈜
의문도 남는다. '<치악산> 이슈가 저절로 사그라들 일은 없을까?' 싶은 것. 치악산과 관련된 '팩트'가 보도되고 있는 이상, 이슈가 될 이유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으니. 설령 영화 제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팩트가 힘이 된 사례는 여럿 찾아볼 수 있다. 2022년 9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이 대표적이다. <수리남>은 공개 직후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듯 보였다. 수리남 외교·국제협력부(BIBIS) 장관이 드라마가 수리남의 국가 이미지를 악화시킨다고 직접 항의할 정도로.
사실 공개 전에도 문제는 있었다. 수리남 정부가 제작 단계에서부터 항의하며 제목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 이에 넷플릭스는 한국 외 모든 국가에서 'Narcos-Saints'라는 제목으로 <수리남>을 스트리밍 했다.
하지만 수리남 정부 차원의 항의 성명 발표 이후 문제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수리남의 현황이 공론화된 결과였다. 전직 대통령이 마약 거래 혐의를 받았거나, 유죄를 선고받고도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드라마의 묘사로 공방을 벌일 이유는 자연히 없어졌다.
실제로 2022년 3월 1일에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2022 국제마약류 통제전략보고서(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Strategy Report, INCSR)' 195페이지를 보면 수리남은 다음과 같은 국가다. "수리남은 유럽으로 향하는 남미산 코카인의 환승처다(Suriname is a transit country for South American cocaine en route to Europe)."
'팩트가 힘이다' 국내 편
국내에서도 팩트가 힘이 된 사례가 있었다.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이 주인공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도봉동 주민들은 도봉구청에 항의했다. 드라마가 도봉동을 우범지역으로 묘사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이에 도봉구청은 방심위에 심의조정 신청을 했다가 취소했고, JTBC도 '작품에 등장하는 고유 명사들은 실제 고유 명사들과 관련이 없음'이라는 드라마 초반부에 문구를 고지했다.
다만 이 논란은 이내 사라졌다. 팩트 덕분에 문제 제기에 힘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 서울시 5대 범죄 발생현황 통계에 따르면 드라마 방영시점인 2017년 기준 도봉구의 5대 범죄 발생 건수는 서울시 전체에서 가장 적었다. 첨언하자면, 2021년까지도 도봉구의 5대 범죄 발생 건수는 서울에서 꼴찌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동네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슈도 가라앉았다.
<치악산> 내용이 괴담이고, 괴담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원주시와 원주시민들이 걱정하는 문제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팩트의 힘 덕분에.
역발상의 미덕
▲ 영화 <곡성>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2016년 개봉해 68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던 <곡성>도 치악산과 같은 문제를 겪었다. <곡성>은 한 시골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온 후 연쇄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과 무속인이 그 진실을 파헤치는 오컬트 스릴러 영화다. <곡성> 개봉 당시 곡성군은 영화 때문에 지역 이미지가 훼손된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당시 <곡성> 제작사와 곡성군은 합의점을 찾았다. 영화 포스터에 담긴 영화 한자 제목을 수정하기로 했다. 곡성군의 한자 지명이 아닌 '곡하는 소리'라는 뜻의 한자를 사용하기로 한 것. 또 영화 상영 시 자막으로 '본 영화 내용은 곡성 지역과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내용'이라는 문구를 내보내기로 협의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유근기 곡성 군수의 역발상이다. 유 군수는 <전남일보>에 '곡성(哭聲)과 다른 곡성(谷城) 이야기'라는 글을 기고해 영화를 보신 분들에게 부탁했다. 직접 곡성에 와서 곡성을 즐겨 달라는 것. 역발상을 담은 호소 덕분인지, 영화 개봉과 비슷하게 열린 곡성 장미 축제에는 예년보다 많은 관광객이 몰렸다.
어쨌든 홍보만 성공하면 장땡?
비록 실제 지명을 영화 제목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카자흐스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이번에는 2006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보랏>이 주인공이다. 개봉 당시 <보랏>은 카자흐스탄을 야만적인 국가로 조롱하는 내용이 있어서 문제가 됐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자국 내 상영 및 디브이디(DVD) 판매를 금지했고, <뉴욕 타임스>에 장문의 반박문을 게재할 정도.
하지만 <보랏>의 속편이 개봉한 2020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편이 미국과 영국에서 크게 흥행하자 오히려 영화를 국가 홍보에 적극 이용한 것. 1편이 국가 이미지를 왜곡하기보다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이유로 보인다. 카자흐스탄 외교부 장관은 2012년에 <보랏>이 "카자흐스탄 관광객 증가에 도움을 줬다"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영화 공개 이후 카자흐스탄 방문 비자 신청 횟수가 10배 늘었기 때문.
과연 <치악산>과 원주시는 여러 전례 중 어떤 길을 선택할까? 개봉까지는 2주. 양측이 원활한, 윈윈(Win-Win)할 방법을 찾아내길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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