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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까지 버린 친일 목사들... 해악이 이렇게나 컸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한국 기독교 분열과 일제 식민지배

등록|2023.09.01 11:55 수정|2023.09.01 11:55

▲ 일제청산연구소와 기독교미디어평화포럼이 주최한 제3차 월례포럼에서 발표하는 양진우 기독교신문사 신학전문기자. ⓒ 김종성


한국 기독교의 분열상은 심각하다. 일례로, 기독교장로회가 있는가 하면 예수교장로회도 있다. 예수교장로회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예수교장로회도 있고, 대한예수교장로회도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불리는 교단도 한둘이 아니다.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는 교단이 3백 개를 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만 갖고는 어느 교단인지 알 수 없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이니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이니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이니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니 하는 식으로 괄호를 병기해야 될 정도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대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동일한 명칭이 여럿에 의해 사용될 때는 자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합법성을 부인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는 자기 교단을 소개할 때도 합동·통합·백석·고신 등을 붙이는 게 상례처럼 되어 있다. '하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교단이 정통이라고 자부한다면 이렇게 병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분열이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31일 일제청산연구소와 기독교미디어평화포럼이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개최한 제3차 월례포럼의 발표자인 양진우 기독교신문사 신학전문기자는 "남북한이 분단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렇게 분열됐을까?"라며 "이것은 종교성이라든가 기독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독교 자체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대동정신·두레정신·품앗이 등을 거론하면서 교회 분열은 한국인의 민족성과도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원인은 일제강점기에 있다는 것이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다 
 

▲ 발표하는 정태윤 대표. ⓒ 김종성


구한말 한국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 및 북장로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는 일제 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라는 단일 기구로 통합됐다. 이런 통합 상태가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 일제강점기 말기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 기독교의 신앙 대상을 하나님에서 일왕(천황)으로 교체하려 한 것이 발단이다.

새로운 신(神)에 적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본이 강요한 대표적인 정책이 신사참배다. 이는 일본 왕실과 그 조상신에 대한 숭배의 강요다. 이를 수용한 교인도 적지 않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한 교인들도 상당했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말도 못 할 시련을 겪었다. 양진우 신학전문기자는 "5천 개 교회가 1200개 정도의 교회로 줄어들었다", "잡혀 갔던 교역자만 2천 명 정도였다", "수십 명이 순교를 당했다" 등등의 상황을 설명했다.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고 일제와 손잡은 목사들은 교계의 주도권을 잡고, 저항하거나 침묵한 목사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영향력을 상실했다. 단순히 부정부패를 범한 세력이 교회 주도권을 잡는 정도가 아니었다. 친일파 김길창이나 김응순 같은 배교자들이 주류세력으로 올라서는 일이었다. 배교자들이 주인이 되는 이런 양상이 교회 분열의 계기가 됐다. 배교자들의 리더십에 승복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막판에 기독교 주류가 된 세력은 해방 뒤에도 기득권을 이어갔다. 해방 직후에 그들은 일제가 만든 기독교 통합단체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단으로 개칭하고 이 조직을 통해 지배권을 이어가려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을 받은 목사들은 그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교단 재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회개와 반성이 시급하다고 외쳤다. 일왕과 그 가문을 숭배한 친일파 목사들의 참회를 촉구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친일파들도 '당연히' 이런 촉구를 무시했다. 그들은 회개와 반성을 거부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고 양진우 전문기자는 강조했다. 1952년 9월에 기존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 별개인 또 다른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측)가 등장한 것은 그 같은 분열의 서막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이 해방 뒤에 친일파에 맞서 통합 교단을 만들었다면 분열이 덜 심해졌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녹록지 않았다. 이북의 친일 목사들이 38도선 이남으로 월남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남한 기독교에서는 친일파의 역량이 해방 이전보다 오히려 강해져 있었다.

여기다가 미군정마저 기독교 친일세력을 후원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이 교단 통합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득권을 쥔 배교자들이 방관할 리 없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는 통합의 구심점을 잃은 채 분열의 길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 민중과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에 의존한 친일 목사들이 청산되지 않고 살아남은 일은 한국 교회의 분열만 초래한 게 아니라 여타의 부조리들도 함께 양산했다.

포럼의 또 다른 발표자인 정태윤 교회개혁평신도행동연대 대표가 지적한 교회의 부자 세습이나 목사의 제왕적 행태도 크게 보면 식민지배의 잔재다. 민중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들이 해방 이후에 교계를 석권했고 그들의 계승자들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김삼환 목사가 이끈 서울 강동구의 초대형 교회인 명성교회에서 초창기부터 집사로 일한 정태윤 대표는 김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가 교회를 물려받는 일의 부당성을 소송으로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다. 1심 재판부는 김하나 목사의 취임은 세습방지법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2심과 3심은 정반대 판결을 해 세습을 합법화해줬다.

정태윤 대표는 김삼환 목사를 상대로 제2라운드를 벌이는 중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이 이번 9월 19일 명성교회에서 제108차 총회를 개회하는 것의 부당성을 제기하고 있다. 부자세습이 강행된 교회에서 교단 총회를 여는 것은 교회 세습을 공인해주는 모양새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정 대표는 일부 한국 교회가 목사의 초월적 권위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고, 이와 관련된 문제제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과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거나 교인들에게 군림하는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왕을 두려워하는 목사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이들의 리더십을 받아들인 목회자들이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를 주도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질곡에 갇혀 있는 한국 교회
 

▲ 추태화 전 안양대 부총장. ⓒ 김종성


포럼의 또 다른 발표자인 추태화 전 안양대 부총장은 한국 교회의 파시즘적 현상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Z세대와 알파세대의 합성어인 잘파세대로 불리는 청년 세대가 한국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는 목사들의 파시즘적 행태로 인해 교인과 교회의 소통이 부족해진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파시즘적 요소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목사들의 행태로 나타나고, 해방 뒤에는 초대형 교회의 부조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일본제국주의는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을 통해 한국인의 존엄성을 짓밟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뿐 아니라 신사참배 요구 등을 통해 한국인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대분열을 조장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그런 유산이 해방 뒤에 청산되지 못해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도 질곡에 갇혀 있다. 이는 식민지배 청산의 필요성이 경시되고 일본과의 무조건 화합이 강조되는 2023년의 대한민국 현실이 한국 기독교의 정상적 발전에도 지장을 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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