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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다

한 걸음 한 걸음 엄마와 내가 함께 한 이 시간을 기억하렵니다

등록|2023.09.04 13:39 수정|2023.09.04 13:39
엄마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다. 진단명은 '양측 슬관절 인공 관절 전치환술'. 엄마는 오랫동안 관절염으로 힘들어했지만 제대로 된 병원 검사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시골 의원에서 약과 주사로만 견디셨다. 동네 이웃들이 하나둘 관절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기어 다니면서도 버티셨던 분이 병원엘 가겠다고 결심하셨으니 더 이상 견디기 힘드셨던 모양이다. 우리는 할 일을 준비했다. 상급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곧바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사진상 우측 무릎이 정말 틀어져 있다고 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자식들 걱정할까 혼자 감당하셨을 고통의 무게를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폭염에 병원행을 결심한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다.

"고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빨리 고치셔서 걸으셔야죠."     


심한 관절염에 골다공증도 있어 포기한 엄마였는데 고칠 수 있다는 의사 말에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오래전 어느 날 아침 엄마는 학교 가는 어린 나를 불러 세워 결석을 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무릎이 아파 걷지를 못하겠다 하셨다. 그럼에도 병원 갈 생각을 하지 못했던 어두운 시절. 그저 민간요법 초약으로 무릎 치료를 했다. 그때 엄마 나이 삼십 대였으니 꽤나 힘겹게 견뎌온 세월이다. 무릎이 닳고 닳는 것으로 삶이 끝나지 않음을 아신 결국에야 병원행을 결심한 그 마음을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엄마는 입원을 위해 코로나 검사를 받았고, 보호자로 갈 나도 받았지만 나는 결국 보호자로 가지 못했다. 저질 체력인 내가 되려 걱정된다는 가족들 우려에 동생이 보호자가 되었고 대신 나는 엄마의 가게를 보기로 했다.

엄마는 평생 해오신 가게 문을 닫고 가시는 것보다 문을 열고 있는 쪽이 편하셨는지 모른다. 어떤 일에도 가게를 포기할 수 없는 엄마의 삶을 지켜줘야 했다.

7월 31일 병원 첫 방문. 8월 2일 오후 입원. 3일 검사. 4일 오전 8시 수술을 했다. 양쪽 무릎 동시 진행했고 약 3시간이 걸렸다. 회복 1~2시간 걸린다는 병원의 안내 문자를 받았다. 수술을 마친 엄마의 모습은 좋아 보였다.

동생은 병원에서의 상황을 동영상으로 보내주기도, 문자로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엄마 파이팅"을 외쳤다. 엄마도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표현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엄마는 혼자 걷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예정대로 2주째인 17일 퇴원을 했다. 재활을 위해 다른 병원을 권했지만 엄마는 집으로 오셨다. 집에서 걸으면 된다 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가게로 복귀하셨고 나는 엄마가 온전히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가게 일을 하며 엄마의 재활을 돕기로 했다.

먼저 경험한 이웃들은 저마다 나름의 노하우를 알려주며 응원을 보냈다. 병원에서의 답답함을 버리고 집에 온 엄마의 모습은 활기찼다. 하지만 '많이 걸어야 한다. 조금씩 걸어야 한다'는 등 사람들 말에 휘둘려 촉각을 세우는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새벽 4시, 엄마는 늘 그렇듯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 속에 불을 켜고 가게 문을 열었다. 엄마는 나를 깨우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의 기척 소리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새벽, 걷기를 연습하는 엄마 뒤를 따랐다.

엄마가 지팡이를 짚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 뒤를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걸었지만 그런 내 마음이 들켰는지 엄마는 내게 '집중'을 강조하셨다. 그리곤 "걷다 보면 걸어지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다. 남들과 달라 빨리를 외치며 조급해 하는 나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속도가 다른데 나는 내가 들은 어줍고 어설픈 정보로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조바심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유를 갖고 긍정적 생각으로 새벽길을 한 발 한 발 내딛고 계셨으리라.

'엄마는 강하다'는 말처럼 엄마는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모습 그 이상으로 강하신 분이셨다. 결코 나이에 지지 않았다. 인터넷 정보와 사람들 말에 휘둘리며 조급해 하는 나와는 달리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우울해 하지도 않으셨다.

의욕은 넘치셔서 내게 물건 진열을 일일이 코치하셨다. 아니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알려줘도 내가 진열한 게 맘에 안 들 때는 "아휴 내가 빨리 걸어야지"라고 하셨다.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명랑한 마음을 들게 해 "네 빨리 걸어서 가게 보세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폭염 때문에 낮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은 시리고 발목은 부어서 하루종일, 밤새도록 냉찜과 온찜을 번갈아 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10분을 걸었고, 어떤 날은 30분을 걸었다. 지팡이 소리가 클 때도 있었고, 더 멀리 걸을 때도 있었다. 새벽길. 힘들어도 걸어야 했다. 걷기 위해.

할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엄마는 주문처럼 파이팅을 외쳤다. 조바심에 경직되어 조심히 뒤따르던 나의 시간도 어느덧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엄마 가까이 붙어서 걸었던 내 발걸음도 조금 멀리 떨어져 넉넉한 거리를 두었다.

거리가 생기자 엄마도 나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뭐든 적당한 거리를 둬야 잘 보이는 법인데 엄마라서 더 마음 쓴 걱정이 쓸데없이 서두르는 마음으로 깊었는지 모른다.  과정 없는 결과가 어디 있으랴. 세상 이치가 서둘러 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 정작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의 우를 범하고 있었다.

슈퍼문이 떠오르던 밤 엄마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보름달을 보았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 우리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엄마와 내가 이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이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와 나는 같은 방향을 향해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무더위가 말랑해지며 한 걸음씩 물러서고 새로운 계절이 성큼 다가올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의 간절함이 채워질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을 기억하겠다. 한걸음 한 걸음씩 채워 올리며 극복한 엄마와 내가 함께 했었다는 것을. 엄마 이제 꽃길만 걸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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