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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성과 갑질,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교사의 사회적 역할, 변하지 않는 가치

등록|2023.09.14 13:15 수정|2023.09.14 13:15
40년 전 1980년대 이야기입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요즘 학급과 비교하면 과밀 수준이지만 그 당시 한 반 40명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 학교다 보니 다해봐야 한 학년에 80명 남짓. 지금에야 사용하기도 민망한 '치맛바람'으로 칭해지는 다소 과하게 학교로 오가던 학부모가 제법 있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런 부모를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참 철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극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이상 선생님께서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성이란 표현엔 한가지 감정이 더 있어 보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우리 아이도 학교에서 뭔가 자랑스럽고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극성스러운 여느 부모의 행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 것은 아닐까요.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최근 들렀던 모교는 뭔가 상당히 화려해졌지만 속 깊이에서 초라함이 더 느껴졌습니다. 한 학년에 고작 20명 남짓인 데다 그나마도 감소하는 추세랍니다. 40년 전 교실로 사용되던 공간은 사라지거나 급식실로 이용됐습니다.

역사적 인물 동상이 있던 자리는 실내 체육관이 들어섰습니다. 등하교 시간에 맞추지 않으면 학교 주변을 오가는 학생 모습도 쉽게 보질 못할 정도였습니다.

대한민국 어디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표현이 그렇지만 희소성이란 것이 있습니다. 학생이 주니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 가치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이어갈 세대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함께 살고 있는 보호해야 할 어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 부모 극성 농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더해 극성 대상도 자기 자식에 한정되며 감정 폭도 좁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부모가 가진 보편적 심리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부모는 그 심리를 그대로 표출하지 못합니다. 지극히 자신만을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다른 이에게 양보를 넘어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이란 참 복잡합니다. 일부 부모는 자기 자식, 아니 자기 것이라면 강도 높은 극성을 가감 없이 표출합니다. 지금 사회에 그런 행위를 '갑질'이라고 합니다. 극성이 갑질로 변하는 순간은 '배려'와 '존중'이 사라질 때가 아닐까 합니다.

경기 용인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며 충격적인 일입니다. 존경받아야 할 스승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가족은 물론이고 학교 구성원도 용인 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사의 떠남을 두고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으며, 수사기관에서는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알려진 바로는 '갑질'로 보이는 행위가 있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육 무너지면 무엇이 남을까

조심스럽지만 용인에서도 갑질 수준의 과도한 행위를 보인 부모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로 인해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교사 역시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 어긋나는 두 행위가 겹칠 때 어느 한쪽은 회복하기 힘들 만큼 심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상처가 향후 치료된다면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겠지만 갑질 메뉴에 치료는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더 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회가 변했다해도 불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의가 그것이며, 사회적 역할 또한 그렇습니다. 부모 역할, 스승 역할, 여기에 더해 학생 역할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그만큼 존경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육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어디 미래만 없겠습니까. 당대도 쉽지 않은 나날이 될 것입니다. 교육에 희망을 담기 위해서는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믿음을 갖고 격려하는 자세가 기본일 것입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세상 모두가 같습니다. 그들은 한 치 오차 없이 미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회적 믿음을 가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 믿음으로 눈을 마주 본다면 그래도 억울한 심정은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요.

용인에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용인시민이 마음을 합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임영조기자 ⓒ 용인시민신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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