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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에게 매일 밤 목욕물 데워주는 정성

[나의 다정한 이웃 이노우에 할배1] 사부의 동창이자 내 집주인

등록|2023.09.27 20:09 수정|2023.11.06 10:44
이노우에(井上) 할배는 내가 살고 있는 셋집 주인이다. 하루미씨 소개로 집을 얻게 되면서 할배를 알게 됐다. 올해 75세 독신. 사부 동창이다. 동창일 뿐만 아니라 같은 정원사 일을 하고 있다. 둘은 그리 가까운 사이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관계랄까. 한 동네 경쟁 업체라서 일 것으로 짐작한다. 민감한 문제라서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느 동네나 흔히 있을 법한 일 아닌가.

할배는 내가 사부에게서 정원일을 배우고 있다는 걸 모른다. 감추고 있는 건 아니지만 꼭 밝혀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입을 닫고 있다. 일단 일이 있을 때 가끔 쿠마우에씨네 간다는 정도로 운을 떼어 놓긴 했다. 정식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치 100단 인 할배가 언제까지 모를 건 아니겠지만.

집주인과 목욕탕을 공유하다
 

▲ 관계란 삐걱거리지 않고 잘 굴러 가는 게 중요하다. ⓒ 유신준


나는 할배와 친하게 잘 지낸다. 집 주인과 셋방살이 관계이기도 하려니와 지내다 보니 서로 잘 맞는 것 같아서다. 인간관계가 어디 어거지로 되던가. 관계란 삐걱거리지 않고 잘 굴러 가는 게 중요하다.

삐걱거리지 않는 첫걸음은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다. 할배는 나에 대한 배려가 깊다. 이 사람들의 오모이야리(배려)는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덕목이긴 하다. 어려서부터 남에 대한 배려를 확실히 가르친다.

내가 이곳에 와서 놀란 게 있다. 삼거리에서 직진중인 자전거를 만나면 진입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는 거다. 내가 자동차 핸들을 잡았다면 10번도 더 가로 질렀을 거리인데 차를 세우고 묵묵히 기다려 준다.

자전거를 타면서 사람대접받는 이 느낌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우리가 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다. 할배가 매일 밤 내 목욕물을 데워주게 되면서다. 나이 든 할배가 내 목욕물을 데워주게 된 사연은 꽤 길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건물 아래층은 30평 정도로 정원도구 창고다. 창고 위에 생활공간을 들였으니 집이 넓어서 방이 세 개나 된다. 5년 전 선친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십년 동안 할배는 이곳에서 살았다.
 

▲ 이층에서 보이는 조감은 꾸미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유신준


아버지 사후, 그가 길 건너 아버지 집을 물려받으면서 이곳이 비어 있었다. 하루미씨 소개로 내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연유다. 몇 십년 홀아비 생활에다 5년을 방치해 놓은 곳이라 내부가 좀 낡긴 했다.

이정도 낡은 내부라면 불평할 이유가 없다. 야모리(도마뱀)가 무시로 드나들던 다누시마루 오두막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니까. 게다가 낡은 내부를 창밖 풍경이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이층에서 보이는 조감은 꾸미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원수업 교과서다.

다만 이층에는 욕실이 없고 아래층 창고구석에 샤워부스가 있다. 할배는 샤워부스도 5년을 방치했으니 작동이 안 될지 모른다 했다. 어차피 자기집 욕조에 매일 물을 채우니 같이 쓰자고 하는 걸 덜컥 받아 들였다.

이곳에서는 목욕탕이 몸을 덥히는 용도다. 물을 데워서 온 가족이 같이 쓴다. 손님이 왔을 경우 끼워 주기도 한다. 그런 관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탕을 같이 쓰는 건 저항이 없었다.

문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욕조에 더운 물을 받아놓고 아래층에서 할배가 부른다는 거다. 하루라도 목욕을 안 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지 쉬는 날도 없다. 내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할배가 냉녹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할배가 심심하니까 목욕탕을 공유했다는 얘기?

할배는 40도에 육박하는 한여름에도 저녁에 반드시 더운 물에 몸을 담근다. 요즘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목욕물 온도는 약간 낮추긴 했다. 39도. 하루도 빠짐없이 할배가 아래층에서 부르는 건 여전하다. 대단한 정성이다.

할배 정성에 감복해서 몸이 적응돼 버렸는지, 나도 이제는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야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다. 사실 한여름 뜨거운 물만 아니라면 나도 목욕을 좋아한다. 일본여행에서 온천을 빼면 도대체 뭐가 남느냐고 항상 주장하는 온천 지상주의자니까.

목욕탕은 비오는 날이 가장 좋다. 욕조에 기대어 비내리는 정원을 감상하는 시간.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창밖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 보노라면, 이 사람들이 왜 정원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비밀을 알 것 같다. 초짜 정원사가 일본정원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필수코스랄까. 할배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내밀한 정원 체험이다.

10만 원짜리 월세방
 

▲ 깔끔한 정원은 깔끔해서 좋고 털털한 정원은 또 털털한 대로 좋다. ⓒ 유신준


할배정원은 사부정원과 다르다. 사부정원이 티끌하나 보이지 않는 청정구역이라면 할배정원은 털털한 동네 할배네 정원쯤 된다. 사부정원이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운 곳이라면 할배정원은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놓이는 곳이다. 사부정원에 클래식이 어울린다면 할배정원은 유행가가 흐르는 곳이다(실제로 흐른다!).

사부정원을 처음 봤을 때 그림같은 정원에 마음을 빼앗겼다. 정원을 손질하러 여러곳을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정원은 정답이 없다. 깔끔한 정원은 깔끔해서 좋고 털털한 정원은 또 털털한 대로 좋다. 다양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그걸 누릴 줄 알면 된다. 목욕탕에 누워 사부정원을 바라봤다면 더 좋았을까. 그건 그것대로 좋았을거다.

언젠가 고장났다는 아래층 샤워부스를 손봐서 목욕탕 독립을 시도했었다. 일단 하루미씨에게 물어봤다. 샤워부스를 고쳤으니 폐를 그만 끼쳐도 될 것 같다고. 그러면 이노우에씨가 서운해 할 걸? 그 한마디에 독립을 포기했다. 할배의 배려를 저버릴 수 없는 거다. 팔자에 없는 한여름 더운 물 목욕은 계속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지. 사실 할배의 목욕탕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슨 볼 일이 그리 많아서 매일 만나고 친해진단 말인가. 목욕탕은 할배의 지혜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집세라야 고작 월 1만엔(10만 원)이다. 집세 1만엔은 몇 년 전 다누시마루에서 살던 시절에 고수하던 지불조건이었다. 지인에게 방을 부탁할 때 못을 박았었다. 나는 돈이 없으니 방세 상한선은 2만엔이라고. 나는 사실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용감하게 조기퇴직을 감행해버린 탓에 연금이 쥐꼬리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쥐꼬리 연금에서 차떼고 포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얇은 지갑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외관이 좀 허름하더라도 부담없는 금액으로 거처를 정했었다. 지인에게 산 속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덧붙여 말한게 씨가 됐다. 그게 산속 오두막이었다. 집세도 상한선 절반 금액인 1만엔으로 낙착됐다. 딱맞는 보금자리였다. 나는 오두막을 별장이라 불렀다.

이곳 쿠사노에서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누시마루 오두막 방세를 알고 있는 하루미씨가 그 조건으로 할배에게 말했을 것이다. 할배도 어차피 비워두는 곳이니 허락했을 테고. 당사자인 나도 모르게 1만엔 월셋집이 덜렁 계약돼 버렸다.

쿠사노 집은 다누시마루 오두막보다 좋은 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게 평지라는 것이다. 자전거 생활에 도로사정은 삶의 중요한 조건이다. 오두막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귀가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오두막 아래 700미터는 공포의 오르막이었다. 자전거를 내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끌고 올라가는 것 조차도 어려웠다. 산길이니 그럴 수 밖에.
 

▲ 오두막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귀가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 유신준


매일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게 지겨웠다. 제발 한번이라도 좋으니 자전거 좀 타고 올라가보자고 전동 자전거를 샀다. 페달을 밟아야 작동하는 어시스턴트 식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신세계였는데 배터리가 얼마 못갔다. 어차피 내려서 끌고 올라가야 하는 팔자였다.

한여름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다 보면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장점도 있었다. 오두막 계곡물을 한 바가지 끼얹고 나면 바로 천국이라는 거. 게다가 싱크대 아래에는 천엔짜리 사케 댓병이 상시 대기중이었다. 샤워 후 목에 수건을 걸치고 한 잔 마시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아마 그 바람에 제법 오랜 세월 동안 공포의 오르막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시원한 계곡물과 사케 댓병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오두막을 겪어 좋게 보이는 것

오두막에 비하면 이곳 쿠사노의 작은 경사들은 거의 평지에 가깝다. 처음부터 쿠사노에 왔더라면 좋은 점을 몰랐을 것이다. 오두막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나니 이곳이 좋다는 걸 잘 알게 됐다. 역시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해봐야 한다. 좋은 점은 또 있다. 도서관이 가깝다는 거다.

다누시마루 시절 도서관은 왕복 1시간 걸렸는데 이곳은 30분이면 된다. 도서관에는 정원 관련 책이 서가를 2단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정원에 대한 관심을 말해주는 엄청난 양이다. 정원공부에 축복받은 환경이다. 다누시마루 도서관에 비하면 장서 수가 좀 적은 것 같긴 하다. 내가 도서관 책을 다 읽을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할배가 받아들인 월세 1만엔은 상징적 금액이다. 그냥 집을 내주는 건 쓰는 쪽이나 내주는 쪽이나 꺼림칙하니 명목상 주고 받는 돈이다. 1만엔은 내가 목욕탕을 적극적으로 거절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2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데 어떻게 그 성의마저 거절한단 말인가? 나와 할배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잘 살아가고 있다.

할배는 한국 드라마 열혈 팬이다. 아침마다 방영되는 한국드라마는 다른 일을 제쳐놓고 반드시 본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에게 중요한 시간이다. 아침을 먹고 준비하고 있다가 한국 드라마를 보고나서 하루를 시작한다.

일본 드라마는 왜 안보느냐고 물었더니 스토리가 너무 뻔하게 정해져 있단다. 광고도 많아서 자기가 광고를 보고 있는건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란다. 나에 대한 할배의 우호적 태도는 어쩌면 한국 드라마 덕분인지도 모른다.

할배는 흘러간 여가수 미야코 하루미를 좋아한다. 젊은 시절부터 팬이라 했다. 놀러가 보면 항상 그녀 노래를 틀어놓고 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래를 못해. 혼자 나와서는 노래가 안 되니 떼거리로 나와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악을 쓰는 거야. 그렇게 해야 누가 부르는지도 알 수 없잖아. 노래 못하는 걸 감추느라고 그러는 거라고. 노래를 못하니 오로지 화장과 옷차림으로만 승부하려 하지.

할배의 걸그룹 비평이다. 분명 미야코 하루미가 깊게 영향을 끼쳤을 터다. 묘하게 설득되지 않나?(나만 그런가?)

- 나의 다정한 이웃 이노우에 할배 2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https://blog.naver.com/lazybee1) 일본정원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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