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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간 일제치하 감옥살이... 우재룡 독립지사가 70년 전에 한 말

(사)역사진흥원, 올해 첫 답사로 대구근대역사관 광복회 특별전 관람

등록|2023.09.24 19:18 수정|2023.09.24 19:18

▲ (왼쪽) 대구근대역사관 광복회 특별전을 찾은 사단법인 역사진흥원 답사여행 창가자들 (오른쪽) 행사 포스터 ⓒ 정만진


매년 가을 몇 차례 역사여행을 실시해온 사단법인 역사진흥원(이사장 남기정)이 지난 23일 올해 첫 행사로 대구근대역사관을 찾았다. 대구근대역사관 2층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회 특별전'을 단체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답사에는 우재룡 독립지사의 아들 우대현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상임대표도 동참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우재룡 독립지사는 망국의 어두운 기운이 가득하던 1902년 대구진위대에 자원입대했다. 나라를 위해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끝에 내린 실천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군대 강제 해산 후 의병부대를 찾아가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은 1907년 군대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우재룡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북 영천 일대를 주무대로 활동 중인 산남의진(의병장 정용기)을 찾아갔다. 체계적 훈련을 거친 우재룡 등 진위대 군인들의 합세는 산남의진의 전투력 향상에 큰 힘이 되었다.

산남의진의 훈련장과 선봉장 등을 맡은 우재룡은 영천 분파소장 카네오리 겐이치(兼折元一)를 참수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국내 다른 의병부대들이 그러했듯이 산남의진 역시 군대 규모와 무기 열세 등으로 말미암아 끝내 일본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1908년 우재룡은 체포되어 종신 유형(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일본은 한반도 강제 점령 후 '특사' 조치를 내렸다. 조선으로서는 치욕의 망국이었지만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국가 경사였기 때문이다. 이때 우재룡도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의 나이 26세로 한창 젊고 혈기방장할 때였다.

묻혀사는 우재룡을 박상진이 찾아오다

그러나 풀려난 우재룡은 깊은 산중에 들어 묻혀 살았다.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탓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평양지방법원 발령을 거부하고 압록강 너머로 망명했던 박상진이 찾아왔다.

박상진은 중국에서 수많은 지사들을 만나 깊은 토론 끝에 독립을 이루려면 일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려면 애국청년들을 독려해 만주 군사학교로 보내고, 군자금을 모아 지원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해야 한다. 박상진은 국내에 머물면서 그 막중한 과제를 실현할 책임자를 자임했다.
 

▲ 지난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달성토성)에서 열린 광복회 결성 108주년 기념 행사 ⓒ 정만진

  아무도 만나지 않던 우재룡이었지만 박상진의 만남 신청에는 응했다. 우재룡이 박상진에 호의를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젊은 나이에 의병활동으로 무기징역을 살다가 나온 우재룡의 명성도 대단했지만, 박상진 또한 허위의 수제자로서 이미 명망 높은 거물이었다.

광복회는 1910년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마침내 광복회 창립이라는 큰 결실을 맺었다. 1910년대는 망국의 충격과 무단통치의 서슬에 눌려 무장독립운동을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8월 25일 나라 방방곡곡에서 달려온 200여 청년들이 대구 달성토성에 결집해 광복회를 결성했다.

그날 이후 박상진과 우재룡은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 이병호, 만주 지부장 이진룡(2대 김좌진), 지휘장 권영만 등과 함께 애국청년 모집과 만주 파견, 군자금 조달과 전달, 친일파 처단, 일본인 경영 광산 습격, 주재소 공격 등 눈부신 활동으로 "반도의 인심을 뒤흔들었다.(1918년 10월 16일 「매일신보」)"

조선헌병대사령관 고지마 소우지로(兒島次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마치(長谷川好道)에게 "광복회 도당들이 몇 년 동안 조선을 시끄럽게 한 것이 (1919년) 3월 1일 이후 반도 전체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대정8년 조선 소요 사건 상황』) "라고 보고한 것도 광복회의 활약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고무적 영향을 끼쳤는지 잘 말해준다.

1920년대 의열단 탄생으로 이어진 광복회

1918년 이후 조직이 노출된 광복회는 1차 조직 해체에 직면하지만,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의열단 창단의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는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는 광복회"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오늘 특별전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광복회의 활동과 독립운동사적 의의에 대해 훨씬 상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해준 대구근대역사관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최영 시인이 관람 소감을 밝히고, 이어서 여러 참가자들도 보고 느낀 바를 말했다. 대화는 근대역사관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되었는데, 이때는 우재룡 지사의 장남인 우대현 상임대표의 회고가 주를 이루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말씀을 듣는 기회였다.
 

▲ 아버지 우재룡 독립지사의 말씀과 이력 등을 회고하는 우대현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상임대표(사진 왼쪽 두 번째) ⓒ 정만진


"아버지는 제가 열한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1918년 박상진 등 동지들이 한꺼번에 체포될 때 다행히 만주로 망명하셨던 덕분에 사형은 면했지만, 1919년 다시 국내로 돌아와 광복회를 재조직한 뒤 임시정부와 교통하던 중 끝내 체포되어 두 번째로 무기징역을 사셨습니다. 약 20년 감옥살이를 하셨지요."

"독립을 되찾은 후 왕년의 동지들을 모아 재건광복회를 결성하셨는데, 민족주의자들의 현실참여를 강제로 금지한 미군정과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오히려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 줄곧 피해다니며 사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몸이 허약해지시고, 결국 1955년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70년 전 말씀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독립되지 못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통일과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어야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길을 평생토록 걸었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회고할 때, 본인도 어느덧 80세에 이른 '외로운' 아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우리나라는 독립되지 못했다!"는 말씀을 듣는 참가자들의 가슴도 덩달아 먹먹해졌다.   
덧붙이는 글 10월 21일 10월항쟁 유적지 등 2차 답사여행 : 역사진흥원은 오는 10월 21일 제2차 답사여행을 실시한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 유적, 경북 청도 용천사, 정전사 3층석탑(보물), 석빙고(보물), 읍성, 대적사 극락전(보물)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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