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칼의 소리' 배경이 되는 '이곳'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 칼의 소리>는 만주 땅과 범위가 비슷한 간도를 배경으로 한다.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인들이 잊고 살았던 간도 땅을 다시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드라마다.
일제 지배로 한민족이 빼앗긴 것이 독도와 한반도뿐만은 아니다. 하나 더 있지만, 이것은 자주 간과되고 있다. <도적: 칼의 소리>의 배경인 간도 땅에 대한 권리 역시 일본 침략으로 강탈당한 것에 포함된다.
간도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넓게 보면 만주의 범위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좁게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한반도 이북에 길다랗게 이어진 땅이다.
간도 땅에 행정적 권한 행사한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좁은 의미의 간도 땅에 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2년에 이범윤을 간도시찰원으로 임명하고 1903년에 간도관리사로 파견해 현지에서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징수하도록 했다. 이 땅에 관리를 파견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청나라가 그것을 저지할 힘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한제국이 간도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점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의 후속 조치에서도 나타난다.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1907년 8월 지린성 룽징(길림성 용정)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간도 땅을 놓고 청나라와 '딜'을 했다. 1909년 4월 4일 체결한 간도협약이 그것이다. 일본은 청나라에 간도 영유권을 인정해주고, 청나라는 일본에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 등을 부여하는 조약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아직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만주 지배권에까지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일본이 간도 지배권을 쉽사리 넘겨준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그런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보호국인 대한제국이 간도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이 거래에 응했다는 것은 간도에 대한 한국의 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한국인 상당수가 이주해 있는 정도에 그쳤다면, 그런 거래에 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한국 영역처럼 비쳐졌기에 일본과 간도협약을 체결해 그 땅 지배권을 찾아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점검할 의문이 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간도를 빼앗은 일은 없다. 러시아와 미국이 1867년 3월에 알래스카를 매매한 것처럼,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간도를 놓고 그런 계약을 체결한 일도 없다.
전쟁이나 매매가 없었는데도 한국이 어떻게 간도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한국인들이 간도에 대해 억지를 부린다고 오해할 수 있다.
영토 변경이 꼭 전쟁이나 병합 혹은 매매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시중의 국제법 교과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정복·할양·병합 외에도 선점·첨부·소멸 등에 의해서도 영토 변경이 발생한다.
타국이 방치했거나 혹은 비어 있는 땅에 자국민이 집단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해안이 바닷물에 잠식되거나(소멸) 해저가 융기해 섬이 되거나(자연적 첨부) 바다를 흙으로 매립(인공적 첨부)하는 등의 현상에 의해서도 영토 변경은 일어난다. 간도의 경우는, 청나라의 관리가 느슨해진 틈에 한국인들이 계속 이주해나간 결과로 대한제국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데로까지 상황이 발전한 사례다.
간도를 포함하는 요동 혹은 만주는 한국인들에게 고조선이나 고구려·발해의 고토로 기억된다. 926년 발해 멸망 이후로 한국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토 회복을 꿈꿨다. 고려시대 묘청의 난과 조선시대 정도전의 요동 수복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간도에 대한 한민족의 열망은 청나라가 선포한 봉금정책도 무색케 만들었다. 1644년에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가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인과 중국 내륙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봉금정책을 1658년에 시행했지만, 조선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국경을 넘어가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 등을 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과 청나라의 기존 경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계속됐다. 숙종 임금 때인 1712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선을 획정하고 그 증표로 백두산정계비를 남긴 것은 조선인들의 지속적인 월경이 기존 국경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백두산정계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양국 경계선으로 인정했다. 훗날 19세기 후반에 토문강의 위치를 두고 조선은 송화강을 주장하고 청나라는 두만강을 주장했다. 이런 논란을 유발할 정도로 조선인들의 간도 진출은 조선시대에도 활발했다.
조선인들의 간도 진출은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가 혼란을 겪던 19세기 후반부터 다시 왕성해졌다. 1840년 아편전쟁 패배 이후로 청나라가 어수선해진 상태에서 서양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간도를 대상으로 한국인들의 대거 진출이 이루어졌다.
'서부 개척' 시대 미국을 연상케 하다
이 시기의 간도는 한국인들에게 신천지 같은 느낌을 풍겼다. 국가권력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데다가 경제적 축적의 기회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도적: 칼의 소리>처럼 간도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들이 이른바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천지 간도'를 향한 한국인들의 이주가 계속된 뒤인 1903년, 대한제국이 간도관리사를 파견했다. 관헌을 파견해야 할 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었고, 관헌을 파견해도 될 만큼 청나라의 지배권이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공식적 혹은 형식적으로는 청나라 영토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 형식을 유지하기 힘들 만큼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해져 있었고, 한국인들이 그곳을 자기 땅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었다. 간도가 실질적 의미의 한국 땅으로 비쳐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준 직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간도를 잃은 상실감을 달랠 틈도 없이, 나라 전체를 통째로 빼앗겨 더 큰 상실감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간도 문제가 한국인들의 머리속에서 희미해지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간도 땅은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 땅이 되어 있지만, 20세기 초에 이 땅은 거의 한국 땅이 될 뻔했다. 그런 땅을 일본이 청나라에 넘기고 철도 부설권과 광물 채굴권을 얻어냈다. 한국이 일본에 빼앗긴 것은 한반도와 독도뿐만이 아니었다. 간도에 대한 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 지배로 한민족이 빼앗긴 것이 독도와 한반도뿐만은 아니다. 하나 더 있지만, 이것은 자주 간과되고 있다. <도적: 칼의 소리>의 배경인 간도 땅에 대한 권리 역시 일본 침략으로 강탈당한 것에 포함된다.
간도 땅에 행정적 권한 행사한 대한제국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 Netflix
대한제국은 좁은 의미의 간도 땅에 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2년에 이범윤을 간도시찰원으로 임명하고 1903년에 간도관리사로 파견해 현지에서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징수하도록 했다. 이 땅에 관리를 파견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청나라가 그것을 저지할 힘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한제국이 간도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점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의 후속 조치에서도 나타난다.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1907년 8월 지린성 룽징(길림성 용정)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간도 땅을 놓고 청나라와 '딜'을 했다. 1909년 4월 4일 체결한 간도협약이 그것이다. 일본은 청나라에 간도 영유권을 인정해주고, 청나라는 일본에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 등을 부여하는 조약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아직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만주 지배권에까지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일본이 간도 지배권을 쉽사리 넘겨준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그런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보호국인 대한제국이 간도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이 거래에 응했다는 것은 간도에 대한 한국의 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한국인 상당수가 이주해 있는 정도에 그쳤다면, 그런 거래에 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한국 영역처럼 비쳐졌기에 일본과 간도협약을 체결해 그 땅 지배권을 찾아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점검할 의문이 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간도를 빼앗은 일은 없다. 러시아와 미국이 1867년 3월에 알래스카를 매매한 것처럼,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간도를 놓고 그런 계약을 체결한 일도 없다.
전쟁이나 매매가 없었는데도 한국이 어떻게 간도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한국인들이 간도에 대해 억지를 부린다고 오해할 수 있다.
영토 변경이 꼭 전쟁이나 병합 혹은 매매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시중의 국제법 교과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정복·할양·병합 외에도 선점·첨부·소멸 등에 의해서도 영토 변경이 발생한다.
타국이 방치했거나 혹은 비어 있는 땅에 자국민이 집단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해안이 바닷물에 잠식되거나(소멸) 해저가 융기해 섬이 되거나(자연적 첨부) 바다를 흙으로 매립(인공적 첨부)하는 등의 현상에 의해서도 영토 변경은 일어난다. 간도의 경우는, 청나라의 관리가 느슨해진 틈에 한국인들이 계속 이주해나간 결과로 대한제국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데로까지 상황이 발전한 사례다.
간도를 포함하는 요동 혹은 만주는 한국인들에게 고조선이나 고구려·발해의 고토로 기억된다. 926년 발해 멸망 이후로 한국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토 회복을 꿈꿨다. 고려시대 묘청의 난과 조선시대 정도전의 요동 수복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간도에 대한 한민족의 열망은 청나라가 선포한 봉금정책도 무색케 만들었다. 1644년에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가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인과 중국 내륙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봉금정책을 1658년에 시행했지만, 조선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국경을 넘어가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 등을 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과 청나라의 기존 경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계속됐다. 숙종 임금 때인 1712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선을 획정하고 그 증표로 백두산정계비를 남긴 것은 조선인들의 지속적인 월경이 기존 국경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백두산정계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양국 경계선으로 인정했다. 훗날 19세기 후반에 토문강의 위치를 두고 조선은 송화강을 주장하고 청나라는 두만강을 주장했다. 이런 논란을 유발할 정도로 조선인들의 간도 진출은 조선시대에도 활발했다.
조선인들의 간도 진출은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가 혼란을 겪던 19세기 후반부터 다시 왕성해졌다. 1840년 아편전쟁 패배 이후로 청나라가 어수선해진 상태에서 서양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간도를 대상으로 한국인들의 대거 진출이 이루어졌다.
'서부 개척' 시대 미국을 연상케 하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 스틸 이미지 ⓒ Netflix
이 시기의 간도는 한국인들에게 신천지 같은 느낌을 풍겼다. 국가권력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데다가 경제적 축적의 기회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도적: 칼의 소리>처럼 간도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들이 이른바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천지 간도'를 향한 한국인들의 이주가 계속된 뒤인 1903년, 대한제국이 간도관리사를 파견했다. 관헌을 파견해야 할 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었고, 관헌을 파견해도 될 만큼 청나라의 지배권이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공식적 혹은 형식적으로는 청나라 영토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 형식을 유지하기 힘들 만큼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해져 있었고, 한국인들이 그곳을 자기 땅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었다. 간도가 실질적 의미의 한국 땅으로 비쳐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준 직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간도를 잃은 상실감을 달랠 틈도 없이, 나라 전체를 통째로 빼앗겨 더 큰 상실감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간도 문제가 한국인들의 머리속에서 희미해지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간도 땅은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 땅이 되어 있지만, 20세기 초에 이 땅은 거의 한국 땅이 될 뻔했다. 그런 땅을 일본이 청나라에 넘기고 철도 부설권과 광물 채굴권을 얻어냈다. 한국이 일본에 빼앗긴 것은 한반도와 독도뿐만이 아니었다. 간도에 대한 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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