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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노장도 덜덜 떤 조경사 실기시험 합격 비결

디자인은 상상... 정원 설계란 이미지를 만드는 일

등록|2023.11.01 17:12 수정|2023.11.17 07:51
아침저녁 바람이 달라졌다. 한낮은 여전히 뜨겁지만 밤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계절이 느릿느릿 변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밥솥 버튼을 눌러놓고 지인에게 배운 맨발걷기 산책을 했다. 산책이라야 10분 남짓 홋싱공원에 다녀오는 일이다. 맨발에 닿는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홋싱공원은 동네 뒷산에 있다. 규모는 작으나 숲이 깊은 곳이다. 조붓한 계곡 옆에 철쭉 울타리를 밤톨 깎아놓은 듯 두르고 목조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물줄기를 따라 생긴 폭포옆에는 서너대 주차시설도 보인다.
 

▲ 좋아보이는 것은 경험의 소산이다. 취향은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 유신준


그늘에 차를 세워놓고 솨~ 물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기 좋은 곳이다. 공원 한 쪽에는 나츠메 소세키 구비(시비)가 있다. 소세키의 글은 이 땅 어딜가나 흔하다. 문장으로 사람을 추억하는 나라다. 그러고 보니 노벨문학상을 세 번씩이나 받은 문장가의 나라가 아니던가.

연습 장소가 된 주인집 정원

내려와서 주인 할배네 생울타리 전정 작업을 시작했다. 할배는 정원을 이미 내 연습장소로 내놨다. 아무 때나 필요한 작업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생울타리는 카시나무다. 카시는 상록수인 데다 맹아력이 출중한 수종이어서 생울타리 용도로 많이 심는다.

문 앞 차폐 용도로 두어 그루 심어도 잘 어울린다. 언제 잘라도 까탈부리지 않고 다소곳이 잎을 내미는 착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새 순의 성장이 끝난 6월 하순이나 여름잎을 굳힌 10월 중순 이후가 작업 적기이기는 하다.

이른 아침부터 수선을 떠는 소리에 할배가 일어나 작업을 돕는다. 식전작업은 일 효율이 높다. 꽤 긴 거리인데도 수월하게 작업을 마쳤다. 그는 반대편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나와 만나는 곳에서 높이가 자로잰 듯 딱 맞다. 중간에 점검도 하지 않았고 옆에서 누가 봐준 것도 아니다. 서로 깜짝 놀랐다. 평소 잘 어울리니 작업도 이심전심 통하는 모양이다.

내친 김에 그동안 맘에 걸렸던 정원 구석 벚나무 가지치기도 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대추나무 연걸리듯 가지가 많이 얽혀 있다. 목수네 연장이라더니 정원사네 정원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다. 방치한 흔적이 역력하다. 노인네가 평생을 남의 정원에서 밥벌이 작업만 하다보니 집에서 가위 잡는 게 지겨워졌을 게다. 이해한다.

전정 작업은 나무 생육을 돕고 미관을 수려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햇볕과 바람이 고르게 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터 주는 게 기본이다. 공간을 터 주면 나무가 알아서 큰다. 스스로 어울리는 수형을 만들 줄 안다. 나무가 만든 자연스런 수형이 인간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들이 서로 영역을 지키면서 생김새 대로 사는 게 자연이다. 그걸 돕는 게 정원사의 일이다. 자연속에서는 필요없는 전정 작업이지만 정원에서는 필요하다. 한정된 공간을 효율적으로 꾸미기 위해서다. 전정은 인위적인 작업이지만 결국 자연을 추구한다. 역설적이다.
 

▲ 평면도는 정원을 하늘 위에서 찍은 사진같은 것이다. ⓒ 유신준


할배와 아침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호흡이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과 호흡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잘 하지 못했던 영역이다. 사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외딴집 아이는 누구랑 어울리는 게 태생적으로 서툴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세살버릇 여든간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린다. 내 일만 열심히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게 아니다. 어울려 일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내 일만 잘해서는 함께 작업한 생울타리 높이가 맞지 않는다. 실패다. 지금에야 그런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고 있는 거다.
 
이미지 상상은 디자인 공부의 첫걸음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요시다 과외 선생 숙제를 했다. 식재 평면도를 백지에 옮겨 그리는 작업이다. 선생이 작업한 주택의 평면도가 교본이다. 전체 평면도 1장과 부분 평면도 7장으로 구성돼 있다. 평면도에 배치된 수종을 확인하면서 따라 그리는 것이 이번 숙제다.

선생은 평면도를 그리면서 정원수 도감에서 이름을 찾아 그 나무의 특징과 수형을 확인하라 했다. 나무가 서 있는 정원의 모습도 상상해보라 했다. 어떤 나무가 높은지 서로 어떻게 어울리는지.

그녀는 수업 때마다 강조했다. 디자인은 상상이다. 그리면서 평면도가 어떤 풍경을 만들 것인지 상상해 보라. 추상적인 기호로 구성된 평면도를 실제 정원모습으로 떠올려 보라. 정원 설계란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다. 시공은 그 이미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일이고.

연필로 틀을 잡고 색연필로 고목, 중목, 저목과 지피식물을 구분해서 색칠을 했다. 다이소 색연필 세트는 녹색계열이 2종류 밖에 없어서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다. 적당히 색을 섞어가며 작업을 했다.

평면도는 정원을 하늘 위에서 찍은 사진같은 것이다. 주로 위치를 표시하는데 쓴다. 하얀 종이위에 알록달록 기호로 표시된 설계도면을 보며 완성된 정원을 상상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상상이 잘 안 될 때는 입면도를 그려보라 했다. 입면도는 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풍경으로 입체 공간이다. 큰 나무가 중심이 되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지며 부등변 삼각형 풍경이 만들어진다. 이미지 상상은 디자인 공부의 첫걸음이다. 디자이너의 의도를 손에 쥐듯 살필 수 있는 좋은 공부다.

숙제를 하다보면 좋은 점이 많다. 평면도를 따라가며 선생과 교감하는 거다. 궁금한 질문들도 생긴다. 이곳에 왜 이 나무를 정했을까. 어프로치는 왜 직선을 피할까? 사선방향으로 두면 왜 좋아보일까?
 

▲ 이미지 상상은 디자인 공부의 첫걸음이다. ⓒ 유신준


좋아보이는 것은 경험의 소산이다. 취향은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을 알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삶이 취향으로 드러난다. 정원을 보면 사람을 짐작할 수 있는 이치다. 궁금한 것들은 다음번 수업 때 공부자료가 된다. 질문이 풍성할수록 수업이 충실해진다.

공부는 본인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며 깨닫고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선생은 과정이 잘 흘러가도록 물고를 터주고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이다. 그녀는 그런 점을 잘 지키고 있다. 좋은 선생이다.

포기하지 마라, 언제나 그렇다

평면도를 그리다가 지난해 조경사 실기시험 생각이 났다. 학원에 갈 수 없으니 유튜브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했다.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다. 유튜브에서는 평면도 200장이 합격라인이다 뭐다 의견들이 분분했다.

시험장에 가기 전에 익숙해지라는 거다. 설계조건 문제를 보고 척척 그려낼 수 있도록. 나는 설계도같은 세밀한 작업은 좋아하는데 노안이 와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돋보기를 쓰면 불편하고 안 쓰면 잘 안 보였다.

20장이나 제대로 그려봤나? 그러고는 시험장엘 갔다. 그곳에 제도판이 있었다. 제도판이라는 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번 쓰고 다시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안 샀다. 제도판을 처음 만져 본다니까 시험관이 빙그레 웃었다. 둘러보니 자기 제도판을 가져온 사람도 많았다.

시험이 시작되고 연습한 요령대로 답안지를 채워 나갔다. 현장 조건이 텍스트로 주어지고 그걸 백지 답안지에 그려내는 작업이다. 외곽선을 그리고 오른쪽에 수목과 시설물 내역을 적는데 칸수를 잘못 계산해 버렸다. 위에서 부터 칸을 그리다보니 기입할 공간이 부족했다. 다시 그릴 시간은 없고 그냥 아래를 좁게 그렸다. 감점 요인이다.
 

▲ 입면도는 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풍경으로 입체 공간이다. ⓒ 유신준


처음부터 실수를 하니 평정심을 잃었다. 제도판은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지 시간은 흘러가는데 답안지는 지저분해지고.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이건 아닌데... 다음에 한번 더 볼까 망설였다. 그러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누군가 시험 요령에 써 놓았던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시험 종료시간까지 분초를 다투며 생각나는 건 다 적었다. 종료벨 직전에는 조급해진 나머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백전노장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무튼 최선은 다했다. 시험장을 나오며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운좋게 붙는다 해도 겨우 턱걸이거나.

결과를 보니 꽤 넉넉한 점수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시험 요령을 지킨 값진 선물이었다. 포기하지 마라. 평소에 별 느낌이 없는 관념적인 문장이었는데 유용한 격언이었다. 내게는 삶의 치트키였다.

누구나 어려움이 닥친다. 포기할 조건들은 도처에 널리고 널렸다. 내가 처한 현실만 해도 그렇다. 내가 유독 타고난 흙수저라서 그런 게 아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인간이라고 삶이 즐겁기만 할까.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해다. 자기 짐을 지고 자기 길을 가는 거다. 그걸 이겨내며 꿋꿋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게 삶의 길이다. 나는 때로 그날을 떠올리며 나를 다독인다. 포기하지 마라.

덧붙임 : 자신의 정원 관련 사진과 평면도 등 귀한 자료들을 내 글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에부치씨에게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내 블로그 일본정원 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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