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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에서 '투사'가 된 여인, 이젠 노래를 부릅니다

[퇴직자노조 이음나눔유니온 인터뷰] 이경옥 이음나눔유니온 공동위원장

등록|2023.10.24 11:01 수정|2023.10.24 11:01

▲ 2023년 10월 6일, 이음나눔유니온 포천 수련회에서 인사말 하고 있는 이경옥. ⓒ 이경옥


"현모양처가 꿈이었어요."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던 9월 말, 동대문 쇼핑몰이 즐비한 곳 뒤편에서 이경옥(65, 이음나눔유니온 공동위원장) 선배를 만났다. 그녀가 웃으면서 한 말이다. 정년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앳된 모습이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끔찍했던 여름을 견디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다. 여름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여름이 가기 무섭게 올해가 가고 있다. 달력이 세 장밖에 남지 않았다. 2020년에 갑자기 발생한 코로나19 때문에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이경옥 선배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그녀의 마스크를 보자 자동으로 몸이 위축되었다(경증의 청각장애 때문에 입모양을 보고 소통한다).

"제가 합창을 하잖아요. 코로나19에 한 번 걸렸는데 또 걸릴까 봐 마스크를 항상 쓰고 다녀요. 만약에 또 걸리면 연대 공연할 때 갈 수가 없어서예요. 합창은 제 삶의 활력소거든요."

이경옥 선배가 합창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이 되고 알았다. 합창단 이름은 종합예술단 '봄날'이다. '봄날'은 올해 1월에 전장연의 지하철 함께 타기 시위에 연대 공연을 했다. 그 연대공연은 시민 100인이 참여하는 공연으로 기획돼서 나도 참여했었다.

전장연 연대 공연뿐만 아니라, 이태원 참사 추모 공연, 세월호 9주기 시민대회 공연, 기아차 박미희 응원 연대 공연 등, 월 평균 4회에 달하는 연대 공연을 한다. '봄날'은 단원들을 '햇살'이라고 부른다. 딱 어울리는 조합이다. 인생 2막에 햇살 가득한 봄날을 맞이하자는 뜻일까?
 

▲ 2023년 7월10일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에서 강릉세계합창대회 경연을 마치고 나와 찍은 사진(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경옥) ⓒ 이경옥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합창단 활동을 했어요. 합창을 해보니까 독창보다 매력적이더라고요. 합창은 독창과 달리 화음을 넣어서 조화로운 소리를 내잖아요. 각 파트에서 내는 소리도 신기하고 각기 다른 음이 모여서 완성된 노래를 부르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저는 2013년에 이소선 합창단에서 활동했었어요. 그곳에서 8년 동안 활동하다가 2021년 9월에 종합예술단 '봄날'을 창단해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까르푸 노동조합에서 사측과 싸울 때, '이 싸움을 꼭 해야돼? 말아야 돼?'하는 갈등이 있었어요. 그때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위로받는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종합예술단 '봄날'은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노동의 존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데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 만든 합창단이다. 비정규직, 산업재해, 부당해고, 직장 갑질, 성차별, 성폭력 등에 맞서 싸우는 곳에 노래로 위로하고 연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봄날'이 올해 7월 강릉에서 열린 세계합창대회 혼성 시니어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봄날'에는 이음나눔유니온의 조합원이 8명이나 있다. 금상 수상 소식을 듣고 이음나눔조합원들은 뛸 듯이 기뻤다.

"저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요. 강릉 세계합창대회에 나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 합창단은 만든 지도 얼마 안 됐고, 시니어 합창단이니까요. 그렇지만 합창대회를 즐기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저희의 진심이 통한 것 같아서 울컥했어요."

신부수업 받고 40일 만에 결혼... 이어진 '반전'의 삶
 

▲ 강릉 세계합창대회에서 금상 수상후 상장을 들고 있는 이경옥. ⓒ 이경옥


어린 시절 했던 합창단 활동은 이경옥이 합창으로 인생 2막을 여는 데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다. 노화 때문에 할머니 목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할 생각이다. 2007년 6월 23일부터 2008년 11월 13일까지 510일 동안 이랜드홈에버 투쟁을 할 때도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문화활동가들이 부르는 민중가요 덕분이었다.

노조 활동을 할 때,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었던 노래를 이제는 이경옥이 부르고 있다. 작은 체구에서 소프라노 소리를 내는 게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노래 부를 때 이경옥은 누구보다 당찬 모습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할 만큼 곱게 자랐지만 사회운동가가 된 반전의 이야기를.

"저희 부모님은 굉장히 보수적인 분들이었어요. 아버지는 맏딸인 저에게 기대가 컸어요.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를 짚으면서 주의를 주셨어요.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신부수업(?)을 시키셨죠. 그러다 맞선을 보고 40일 만에 결혼을 했어요. 아이 둘 낳고 잘 살았는데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한 지 3개월 만에 사망했어요. 큰 아이가 17살, 작은 아이가 14살 되던 해였어요. 충격이 컸지만 아이들 때문에라도 털고 일어서야 했어요. 취업을 하기 위해 우연히 지역의 생활정보지를 보고 이력서를 냈어요. 그곳이 한국까르푸였어요.

한국까르푸엔 노동조합은 있었지만 단체협약이 없었어요. 단체협약이 없다 보니까 조합원을 굉장히 무시했어요. 초과 근무를 해도 연장근무 수당을 제대로 못 받고, 배고파서 김밥 하나 집어 먹었다고 잘리고 그랬어요. 한국까르푸는 외국기업이라 구내 식당이 없었어요. 밥 먹고 싶으면 푸드코트에서 사먹으라고 했어요. 외국 기업이라서인지 도시락 싸와서 먹는 문화가 없었어요. 무조건 일만 시켰어요. 노동조합이 있어도 단체협약이 없는 노동조합이라서 노동조건을 보장받지 못했어요."


이경옥은 1999년에 한국까르푸에 입사했다. 입사한 지 2년 만에 한국까르푸 노동조합 중계지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2006년, 한국까르푸가 이랜드그룹으로 매각되었다. 이랜드는 2007년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령을 앞두고 단체협약에 보장된 입사 후 18개월 이상 된 비정규직의 고용안정 조항을 무시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 2007년5월23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 노조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매장 인근 공터에서 총파업 결의대회를 할때의 이경옥. ⓒ 이경옥


영화 <카트>는 이랜드일반노동조합(이랜드노조와 한국까르푸노조 통합)의 투쟁을 담은 이야기다. 이경옥은 그 투쟁으로 해고되었고,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 후,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비정규특별위원장 2년, 사무처장으로 9년을 지냈다. 현재 홈플러스일반노동조합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경옥에게 왔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부당한 노동현실에 눈을 떴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살았던 이경옥은 40대 중반에 두 눈을 부릅뜬 '투사'가 되어 있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딱 맞는 말이다.

"여성 퇴직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싶어요"

이제 아름다운(?) 인생 2막을 위해 '이음나눔유니온'을 만들고 공동위원장이 되었다. 그의 포부를 들어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년 퇴직후에 어떻게 살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요. 그냥 살던 대로 살아지겠지 해요. 하지만 퇴직 후의 삶은 준비해야 해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족들을 위해 산 여성 퇴직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싶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것들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봉사활동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건강이 좋지 않은 여성노동자가 많아요. 그분들에게 퇴직 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고 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족에게 기대는 노후생활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퇴직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어야죠. 활기찬 인생 2막을 함께 만들어야죠."


이경옥은 퇴직 후에도 합창단 단원으로, 홈플러스일반노동조합의 지도위원으로, 퇴직자노조의 공동위원장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 3년을 코로나19로 감옥생활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노동조합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모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이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고 있을 때, 딸아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엄마, 베이비시터가 그만 뒀어요. 아이들 육아 좀 부탁해요." 활동을 못 해 집에만 있으니 딸아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손주의 육아를 맡지 않겠다는 결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딸아이의 집에서 3년 동안 살았다. 손주들 등교와 등원을 맡았다. 그 외 시간엔 틈틈이 활동을 했다. 이경옥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너무 답답했어요. 하마터면 우울증이 올 뻔했어요. 올해 5월에 육아가 끝났어요.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10년 전에 치매가 왔어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돌보고 있어요. 저는 주말을 맡았어요."

손주의 육아가 끝났지만 부모님 돌봄은 끝나지 않았다. 울상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다음 말을 읽었다.

'돌봄은 사회가 책임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니 초저출산 사회가 되었잖아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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