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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당선되지 못한 정치인, 그를 도운 한 사람

약자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

등록|2023.10.24 14:11 수정|2023.10.24 14:11
정치에 몸을 담은 후배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공직 선거에 출마한 적은 한 번도 없다. 20년가량 선거에 출마한 후보를 도왔는데, 도와준 사람은 정작 한 번도 당선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당선을 위해 이 당 저 당으로 옮겨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유력한 후보에게 선을 대려고 할 때도, 그는 오직 한 사람만 위하여 일했다. 후배는 신경림 시인처럼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이유는 뭘까?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했기 때문이다.

양지에 서는 일은 모두 희망하는 일이고 모양새 나는 일이다. 부귀도 따르고, 영화도 따르고 일신이 편하다. 음지에 서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처럼, '그러면서 행복'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신경림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평원군은 조나라의 공자(公子)들 가운데 가장 똑똑했다. 빈객을 좋아하여 찾아온 빈객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평원군은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평원군 이야기를 보면 음지에 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고,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 잘 보여준다.

평원군 저택 누각은 민가를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데 민가에는 허리가 굽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살았다. 장애인은 불편한 몸으로 손수 물을 길어다 먹었다. 어느 날 평원군 애첩이 그 모습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튿날 장애인은 평원군 저택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공자께서 선비들을 아주 잘 대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또 선비들 역시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공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공자께서 선비들을 소중히 여기고 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첩은 제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곱사등인 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저를 비웃은 애첩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평원군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알았소." 그러나 장애인이 물러가자 평원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녀석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내 애첩을 죽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평원군은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일을 처리한다. 상식적으로 장애인 편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빈객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더니 일 년이 채 못 되어 절반이 줄어들었다. 평원군은 까닭을 몰라 빈객들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여러분을 대우하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떠나는 식객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된 일이오?"

그러자 문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지난번 장애인을 비웃은 첩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쯤은 하찮게 여기는 분으로 여기고는 모두 떠나는 겁니다." 

그제야 평원군은 장애인을 비웃은 애첩의 목을 배어들고 몸소 찾아가 사과하였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다시 빈객들이 모여들었다.

희생하지 않는 리더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영향력 없는 리더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재상을 지낸 지체 높은 사람이 애첩의 목을 들고 장애인을 찾아가서 사과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평원군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오히려 건방지다며 장애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평원군은 음지에 섬으로써 희생과 겸손으로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회복하였다.

쓰러진 것들을 위해 음지에 서기는커녕, 관리소장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원이 자살했다는 뉴스, 보육시설이나 장애인 시설의 폭력행위 뉴스, 대기업 회장이 운전기사를 폭행했다는 뉴스,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부동산을 특혜 분양받았다는 뉴스, 법관이나 검사가 각종 편의를 봐주고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게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평원군처럼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사람이 아직은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진정한 '큰 손'이다.
 

▲ 오정환 미래경영연구원장  ⓒ 화성시민신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미래경영연구소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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