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하더라도... 이태원에서 다시 맥주잔을 들겁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지난 1년... 변화는 더디고, 여전히 무너지지만 쓰러지지 않겠습니다
김초롱 시민기자는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로 살아온 지난 1년,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간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합니다. [편집자말]
▲ 조계종 노동사회위원회가 지난 2022년 10월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을 방문해 헌화하며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 권우성
트라우마, 우울증, 그리고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을까. 스스로 물어봤지만,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자주 기억을 놓쳤고, 현실 감각이 떨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공감이 되지 않아 힘들어질 무렵, 깨달아버렸다. 우울증이구나.
지난 여름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청주 오송에선 14명의 사람들이 터널에 갇혀 빠지지 않는 빗물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던 날, 나는 일기장을 뒤적거렸다.
'또다시 이렇게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면, 정말이지 잘 살 자신이 없어. 무너져버릴 것 같아.'
또 어떤 날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푸르른 선생님들이 별이 돼 떠나갔다. 그렇게 몇몇 이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회적 학대구나.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세상이 서로를 위로하는 법을 몰라 혐오와 비난을 쏟아내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며, 나는 용기를 잃었다. 피멍이 든 사람들만 보이는 이 세상이, 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살지, 왜 사는 것일까.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다.
이해 받고 싶었다, 나의 고통을. 그리고 이 세상의 고통을 사람들이 다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참사에 대한 흔적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지워지는 것 같아 눈물이 나고 무기력해지기도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생각할 무렵,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회적 참사가 한 개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써내려갔다. 개인의 기록의 사회적 기록이 될 수 있다는 말을 그때는 믿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생존자라고, 다시 외치고 싶었다
1년간 이태원 참사 생존자로서의 기록을 엮으며, 나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약점과 단점을 모두 공개했다. 우울증이라는 늪에 빠졌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를 이겨내기 위해 사용한 방법도 모두 적어내려갔다.
큰 우울을 겪고 그렇게 힘을 들여가며 굳이 책을 쓰는 이유를 묻는 이들도 있었다. 내 대답은 하나였다. '자꾸 말하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으면 정말 사람들이 다 잊더라'고. '잊지는 말아야지,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람이면 잊지는 말아야지.' 나는 이런 마음으로 글을 써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생을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말하고 싶었다. 그 방법이 글을 써내는 것이었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창피하게 살고 싶지 않다. 창피한 어른으로 늙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다. 10.29 이태원 참사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사회적 참사라고 계속해서 강조해 말하고 싶다. 그날, 그 참사를 보고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참사 생존자라고 다시 한번 외치고 싶다.
그러니 우리 모두 생존자로서 이 날을 잊지 말자고 전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책을 통해, 기사를 통해, 뉴스를 통해, 그 무엇으로든 자신의 자리에서 공감하고 마음 아파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참사를 기억하는 것일테니, 우리 모두가 함께하자고. 그런 메시지를 담아, 최근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책을 출간했다.
▲ 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마포여성동행센터에서 열린 신간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김초롱 작가가 기자들에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복건우
지난 1년간 우울증을 건너오면서 가장 신경 썼던 일은, 무엇인가에 미친듯이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 중독' 기간에 미국의 한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만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며, 내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이태원 상권이 무너지고 아무도 그곳을 찾지 않던 지난 4월, 파란 눈의 그들이 한국으로 와 매일 같이 가방을 매고 이태원을 찾았다. 성실하게 이태원 참사의 흔적을 좇는 제작진들의 모습에, 대신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원한 게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파라마운트플러스의 다큐멘터리 <크러시>는 지난 17일 미국 등에서 공개됐다. <크러시>는 참사 당일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과 직접 찍은 영상, 구조대의 바디캠 등으로 그날의 그 골목을 집중 조명했고,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보여주며 참사의 원인과 배경을 자세히 담았다.
▲ 10·29 이태원 참사를 다룬 미국 제작 다큐멘터리 <크러시> ⓒ 파라마운트 플러스
<크러시>는 '이 다큐 자체가 진상 규명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완성도 높은 내용이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서비스 송출이 불가능한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파라마운트 플러스와 파트너 관계인 한국 OTT 티빙에서 역시 프로그램을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라고 한다(관련 기사 : 이태원 참사 다룬 '크러시', 결국 한국에서 못 본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유가족분들이 보셔야 할텐데, 많은 국민이 이걸 보아야 하는데' 하며 가슴을 퉁퉁쳤다. 왜,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태원 참사의 진상에 대해 터놓고 논할 수 없는 걸까.
더 오래, 이태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참사 이후 1년, 우리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지, 우리는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많은 이들이 내게 물어온다. 우리 사회가 변한 것은 애석하게도 없다고 말했다. 안전과 군중 밀집에 대한 정부의 제대로 된 매뉴얼이 나오기를 바랐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변하고 있다.
한 대학교 축제에 간 적이 있다. 축하 공연 등이 이어졌는데, 대형 스크린을 통해 무대 앞에서 군중밀집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안전 매뉴얼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사회자가 10분마다 해당 내용을 동일하게 안내하고 전달하는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대학 축제 자치회에서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다니. 또, 서울에서 불꽃축제가 있던 날, 안전 매뉴얼과 통제에 잘 따르는 시민들을 보며 괜히 눈물이 났다.
국가와 정부가 성숙한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구나 싶기도 했다. 다행이면서도, 씁쓸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이 있다는 데 집중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조금 살만한 곳이라고 모두에게 희망을 건네고 싶다.
▲ 10.29이태원참사 1주기를 앞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 부근 참사 현장에서 ’10.29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 기자회견이 권은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미술가와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권은비 작가가 취지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골목길 입구 바닥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 권우성
지난해, 이태원 참사 이후 글을 쓸 때 나는 '내년에 다시 당당하게 이태원에 갈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지난주에 이태원을 방문하니, 막상 자신이 없어지는 경험을 했다. 정말 강할 줄 알았는데,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실망도 하고, 속도 상하고, 아직 멀었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딪쳤다. 당당하게, 이태원에 잘 다녀왔다. 시원하게 맥주도 세 잔이나 먹고 왔다. 내게 지난 1년은 늘 이랬던 것 같다. 당당하고 싶었지만 잘 안 돼서 좌절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을 겪다. 하지만, 그렇게 쓰러지기보다 나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나의 모습이 이 사회에서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지길, 아직도 거리 위에서 구호를 외치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 또한 온전히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본다. 우리는 더 오래도록 이태원을 기억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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