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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할 수 있다" 색다른 배급 택한 독립영화 감독

[미리보는 영화]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등록|2023.11.01 10:34 수정|2023.11.01 13:44
다양한 소재나 장르의 영화가 명멸했다지만 형식 자체로 보면 이 영화 또한 분명 새로운 시도다. 2일 개봉하는 <붉은 장미의 추억>은 흔히 영화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화려한 시퀀스나 시공간 전환 없이도 하나의 서사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1962년, 배우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영화는 일종의 통속극이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옥중생활을 하던 사내,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쫓는 여가수의 애틋한 로맨스를 그린 <붉은 장미의 추억>은 노필이라는 당시 전도유망했던 젊은 감독의 작품이다. 60여년이 지나 리메이크가 된 것이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요절한 노필 감독은 생중 16편의 영화를 남겼다고 한다. 데뷔작은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을 견디고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사가 되어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인 <안창남 비행사>였다. 하지만, 영화 작업으로 인해 생긴 빚과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통속극을 더 많이 찍게된 불운의 창작자였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든 고인을 기리며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영화사적으로 의미가 큰 고인의 작품 중 하나를 공연으로 선보이는 기획이었다. 필름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본만이 남은 <붉은 장미의 추억>(1962)이라는 작품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무산 위기를 겪었고 당시 공연예술계가 으례 택했던 영상 녹화 방식으로 제작되어 공개될 예정이었다.

영상 녹화는 물론 아카이빙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매번 살아있는 연기를 하며 회차당 관객들을 만나온 배우들 입장에선 매우 아쉬운 방식이다. 그러던 찰나,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중랑문화재단에서 영화 작업 추진을 위한 지원금이 나왔고 <시민 노무현> <대관람차>를 연출하고 <최선의 삶> <꿈의 제인> 등 독립영화 프로듀서를 맡았던 백재호 감독이 해당 작품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한계점에서 찾은 대안 배급 방식
 

▲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관련 이미지. ⓒ 백재호


하지만 애초 영상 녹화 정도로 생각했던 기획이었기에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백재호 감독 등 제작진이 낸 아이디어는 낭독극으로 무대에 올리려던 작품을 조금 비틀어 영화적 요소를 가미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중랑구 용마폭포공원 내의 야외 무대에 배우들을 세워놓고 배우들의 낭독 연기를 카메라 세 대로 찍었다.

단순히 낭독 내용만 담은 게 아니다. 각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이 마이크 앞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모습, 마치 라디오 드라마처럼 연기 도중 흘러나오는 효과음을 배우들이 직접 도구를 만지며 만들어내는 모습까지도 가감 없이 담았다. <붉은 장미의 추억>이라는 작품의 재현을 넘어서 낭독극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여실히 묘사한 셈이다. 낭독극 그 자체를 위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배우들을 위한 감독의 헌사기도 하다. 출연배우들은 극단 경력으로 치면 나름 중견이지만 영화 촬영 경험이 적은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시기를 버티던 배우들이 하나의 캐릭터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가 흑백 화면에서 가늠된다. 얼굴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 눈빛과 표정의 묘한 차이를 카메라가 고스란히 잡아내 마치 연극 형식인데 생동감 넘치는 영화를 보는 듯한 복합 심상을 자아낸다. 이런 배우들을 카메라 밖에서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정체불명의 감독(김영민)도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한다. 마치 노필 감독의 영혼으로 현실에 등장한 것같은 환상의 느낌을 준다.

<붉은 장미의 추억>은 촬영과 조명 등 현장 스태프들을 관록의 경력자들로 구성했다. 회차는 1회차로 단 하루만에 찍은 결과물. 백재호 감독은 "선택과 집중으로 단 한 번의 회차였지만 최고의 스태프를 꾸리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여기에 더해 극장 배급 방식도 기성 배급사가 아닌 감독이 직접 일대일로 접촉해 순차적으로 개봉하는 방식을 택했다. 통상 독립예술영화가 배급사를 통해 극장에 배급하기 위해선 적어도 수천만원이 든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대안 배급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의 공식 개봉일은 11월 2일이지만, 극장에서 동시 공개하진 않는다. 아트나인, 인디스페이스, 더숲아트시네마 등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영화를 공개하는 식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도 12월, 내년 1월 순으로 <붉은 장미의 추억>을 산발적으로 상영한다.

이에 백재호 감독은 "굳이 동시 개봉을 고집하지 않고, 극장 여건과 상황에 맞게 영화를 걸어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다"며 "가장 공을 들인 포스터 제작 외엔 나머지 배급 비용은 크게 들지 않는 상황이다. 독립영화인들이 영화 제작이 어렵다, 배급이 어렵다고들 하시는데 이런 방법도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기자에게 말하기도 했다.
 

▲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관련 이미지. ⓒ 백재호



엔데믹이라지만 여전히 국내 극장가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의 호황 분위기는 찾기 힘들다. 추석 연휴가 있던 지난 9월 극장 매출액이 코로나19 이전인 2017년부터 2019년 평균 매출액 1233억원의 절반 수준(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이었다는 통계, 그리고 추석 연휴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흥행 1위를 기록했음에도 손익분기점을 아직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차가운 현실을 체감케 한다. 이런 상황에 독립예술영화는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려우니까 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백재호 감독의 말이 울림을 준다. 마침 이 작품 직전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도 연극 배우들이 스스로 영화를 기획해서 만들고, 배급까지 참여한 <역할들>이란 작품이었다. 막힌 길이라면 뚫어서라도 가거나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일종의 결기가 느껴진다.

<붉은 장미의 추억>은 개봉 비용 마련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단 일주일만에 목표금액 800만 원을 초과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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