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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청년주택 입주자들에게 벌어진 일, 너무합니다

북향 입면분할 창호 설치세대 합의서에 '이의 제기 않겠다' 명시돼... "통상적" vs. "부적절"

등록|2023.11.06 18:07 수정|2023.11.07 13:36
'제3자에 대한 비밀 준수 의무', '민, 형사상 이의 제기 금지'...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면? 아마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인지를 막론하고 덜컥 겁이 나고, 주눅드는 경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지만은 않다. 일터에서 유사한 요구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쿠팡 캠프를 운영하는 위탁업체 A사는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배포하며 '이의제기 금지 조항'을 넣어 화제가 된 적이 있고, 한 언론사에서는 '해고 시 이의제기 금지' 서약을 강요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내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생계 등의 문제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로 서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다수다.
  

▲ 이랜드 측이 세입자들에게 제시한 합의서 내용. ⓒ 익명의 제보자


그런데 청년들의 안정적 주거를 위해 지어진 청년주택에서 '제3자에 대한 비밀 유지', '이의제기 금지' 조항이 포함된 합의서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포구 창전동 광흥창역 인근에 위치한 '이랜드 PEER 신촌청년주택(이하 '신촌청년주택')' 이야기다. 청년주택 입주자들은 청년이자 세입자라는 복합적인 소수자성을 지니고 있다. 그 탓에,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선뜻 문제 제기에 나서기 어렵다.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 주거를 영위할 수 있는 기회는 청년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신촌청년주택은 전체 529세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북향 200여세대의 창문이 '입면분할창'이다. 아래쪽이 불투명한 플라스틱 프레임으로 가려져 있는 형태인데, 키가 160cm 정도인 사람의 경우 의자 위에 올라가야 바깥을 볼 수 있다. 원래도 해가 잘 들지 않는 북향인데다, 불투명하게 가려진 창문이니 생활에는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환기, 채광 같은 일상적인 문제도 그러하지만, 화재 등 재난 상황에도 취약하다.
 

▲ (좌측) 일반 세대 창문 (우측) 북향 세대의 입면분할창 ⓒ 이랜드청년주택 주민대책위원회


그러나 당시 입주를 앞두고 있던 입주예정자 청년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고지받지 못했다. 모집 공고문에도 '창문 하부에 불투명 유리가 있다'는 식의 간략한 설명만 있었을 뿐이다. 입주예정자 청년들은 입주 한 달 전 사전점검을 위해 집에 방문한 뒤에서야 '절반이 막힌 창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사자들의 항의에, 담당 부처인 서울시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을 고려한 것"이라는 답변만을 내놓았다. 입주를 포기할 시 100만 원의 위약금이 발생해, 청년들은 쉽게 입주 포기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이에 입면분할창 거주 세대 당사자들이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섰다. 2021년 이랜드 청년주택, 서울시, 입주자, 마포구 구의원들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개최했고, 2022년에는 '신촌청년주택 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해 지역 진보정당 및 서울시의원과 협업하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불투명 창문 교체를 요청하였으나, 이랜드 청년주택 측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수차례 이어진 기자회견과 간담회, 협상안 불발과 두 차례에 걸친 주민 투표 끝에 최근 합의가 이루어졌다. 북향 입주자들의 임대료를 2년간 3.6% 인하하고, 이후 임대료를 동결하는 것으로 결정됐다(당초 내년에 임대료를 올릴 예정이어서, 합의서엔 '동결'로 표현, 사실상 3.6%인하 효과를 가져온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랜드 청년주택 측이 '제3자에 대한 비밀 준수 의무를 지키며,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다툼에 대하여 민, 형사상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하라는 조항을 삽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합의서 내용에 대해 이랜드 측은 "비밀 준수 의무는 세입자 측 뿐 아니라 양측이 모두 지는 것"이라며 "청년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넣은 조항들은 아니고, 합의서에 통상적으로 기재되는 내용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세입자114 운영위원장인 김태근 변호사는 이랜드측 입장에 대해 "'입면분할창에 대한 이의 제기 금지'가 아닌 포괄적 이의 금지 조항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제3자에 대한 비밀 준수 의무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신촌청년주택 주민대책위원회


안전하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를 했을 뿐인데, 청년 세입자들이 져야 하는 짐은 너무나 무겁다. '제3자에 대한 비밀 준수', '이의 제기 금지' 등의 조항은, 이랜드 청년주택 측이 진정으로 세입자 청년들을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촌청년주택 입주자들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해 왔다. 또다른 청년주택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번 사례와 같이 조용히, 없었던 일처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면 청년들은 더 큰 연대와 목소리로 대응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정의당 마포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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