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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가는 남편이 누룽지보다 소중하게 챙긴 것

죽도와 호구를 챙긴 남편... 혼자서도 잘 지내는 법을 생각하다 얻은 깨달음

등록|2023.11.12 19:26 수정|2023.11.12 19:26
공부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18년간 가장 노릇을 하던 아내. 대학원 석사 시절에 결혼해서 박사, 강사를 거쳐 유럽 대학 교수가 되어 떠난 남편.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를 넘어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롱디 부부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오늘은 뭐해?"

체코에 있는 남편에게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

"오늘은 저녁엔 운동이 있는데 내가 가르치는 날이야."
"오늘은 프라하에 가서 검도대회 심판 봐. 프라하에서 자고 다음날 돌아올거야."


요즘 남편 생활의 많은 부분이 검도로 채워지고 있다. 평일에는 매일 연구실에 나가 논문을 읽고 학생들을 만나고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이야기도 하지만 주말에는 대학이 문을 열지 않는단다.

가뜩이나 혼자라서 외로운데 주말에는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구조라 초기에는 주말을 많이 힘들어했다. 남편의 체코 정착을 도와주는 교직원도 이런 사정을 알고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해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혼자서 잘 지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죽도와 호구를 챙긴 남편

남편과 나는 검도장에서 만났다. 나는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한 번 운동을 가면 2~3시간은 써야 하는 검도를 그만두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동아리 활동으로 검도를 시작한 후 대학 시절 동안 미친듯이 운동을 하고 그 후로도 꾸준히 10년을 채워 운동을 해서 4단을 딴 후였다.

하루 8시간 일을 하고 나면 평일에 집에 가서 아이와 함께 지낼 시간이 3시간이 채 안 되기 때문이다. 육아 때문만은 아니다. 모니터에 빨려들어갈 듯한 자세로 일을 하다보니 목과 어깨가 굳어서 나빠졌는데, 그 몸으로 검도는 무리였다.

검도를 할 때 착용하는 호구 중 머리에 쓰는 호면만으로도 1킬로그램이 넘는다. 그걸 머리에 쓰고 팔을 휘두르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대신 굳어가고 나이들어가는 내 몸에 맞는 다른 운동을 하고 있다.

남편은 공부를 오래 잘 하려면 운동을 꼭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꾸준히 좋은 선생님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검도를 했다. 하루종일 공부를 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반대로 공부를 하다가도 운동할 시간을 내기는 자유로웠다. 운전을 해서 기동성도 있으니 수도권의 좀 먼 곳이라도 일주일에 두어 번 차를 몰고 가서 하면 되었다.

단을 따는 것에는 딱히 관심 없어 하던 남편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뒤늦게 4단을 땄다. 4단이면 도장에서 사범을 할 수도 있는 수준이다. 이때부터는 매년 지도자교육을 받아야 다음 단을 딸 수 있다. 그렇게 꾸준히 운동을 해왔던 남편은 체코에 갈 때 죽도와 호구를 꼭 가져가겠다고 했다.

체코에 처음 들어갈 때 수하물로 무엇을 얼마나 넣어갈지 고민이 많았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하기 위한 복장도 갖추어야 하다보니 양복과 코트 몇 벌, 구두 몇 켤레만 넣어도 짐이 한가득이었다.

추가로 구매할 수 있는 수하물 한도까지 꽉꽉 채웠다. 그러고도 사람들이 해외 장기체류를 위한 짐을 쌀 때 추천해준 김이나 누룽지 같은 한국음식은 하나도 넣지 못했다. 음식보다 옷과 호구의 우선순위가 높았던 것이다.

혼자서 잘 지내는 법

최근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티타임 개념으로 아시아의 여러 멤버들을 소규모 랜덤 그룹으로 나누어 한 시간 동안 온라인으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면 되는데 요즘 나의 모토는 '할까말까 할 땐 한다'여서 신청했다.

잘 모르는 회사 사람들과 영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참석해 보았다. 내가 배정된 소그룹에는 아시아 세일즈 책임자도 있었는데 그는 뉴질랜드 출신 영국인으로 싱가포르에 주재원으로 나와 있었다.

연말 계획을 이야기 하다가 그가 가족들과 떨어져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혼자서 체코에 가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는 게 힘든 것 같더라고 말하며 외국에서 외로움을 이기고 혼자서도 잘 사는 데 필요한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더니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를 이야기해줬다. 첫째는 SNS를 통해 계속 연결되어 있는 친구 그룹을 꼽았다. 영국과 뉴질랜드에 각각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과 연락하는 SNS에는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새로운 연락이 와 있어서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기분을 덜 느낀다고 했다.

둘째는 취미 생활이었다. 그는 테니스를 치면서 클럽 사람들과 친해지고 회사 일이 없는 주말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셋째로는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에 찾아가보라고 했다. 세 가지를 꼽아보니 인간관계의 거의 모든 면을 아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친밀하게 교류하던 사람들과 계속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과는 물리적으로 만나기가 힘드니 취미 활동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하면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기가 용이할 터였다. 그리고 여러 배경은 다르지만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말을 하면서 편하게 터놓고 지낼 수 있을 테니 각각 다른 영역의 갈증을 고루 채울 수 있을 법했다.
 

▲ 이 안에 호구 들었다. ⓒ 최혜선


그 말을 듣고보니 남편이 무게와 부피가 다 돈인 항공수하물에 5kg가 넘는 호구를 꾸역꾸역 가져가고 죽도를 공항에서 따로 박스 포장을 해가면서까지 들고 간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편은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현지의 사람들과 만나서 운동하고 밥도 먹고 집에 초대도 받는 경험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롱디 결혼 생활의 나비효과

때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시작하거나 선택한 일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검도를 시작했던 일이, 취직 후에도 계속 운동을 하겠다고 회사 근처 검도장을 찾았던 일이 결혼할 상대를 결정한 것처럼.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꾸준히 계속한 것이, 비용의 압박을 무릅쓰고 호구를 챙겨온 것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남편 삶의 궤적을 살피다 보면 산다는 건 무슨 씨앗을 뿌리는지 모르는 채 농사를 짓는 농부와 닮은 듯싶다. 뭘 키우는지 모르고 언제 싹이 날지 모르면서도 하루하루 정성을 들이며 뭔가가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렇게 아주 작은 싹을 땅 위로 틔워낸 사람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나의 시간과 정성을 흠뻑 머금은 후에는 땅 위로 싹을 틔워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우리집 십대 청소년들에게도 당장 눈에 보이는 성적이라는 결과물에 연연하기보다는 좀 더 긴 호흡으로 기다려줄 여유가 생겼다.

외롭게 지내는 남편을 위해 혼자서도 잘 지내는 법을 모색하다가 20대에 멋모르고 시작한 검도가 40대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고나니 40대의 내가 60대의 나를 위해 시작하고 계속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도 생각하게 된다. 롱디 결혼 생활의 나비효과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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