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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지우고 싶지 않은 사제의 정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173화 제자들이 보낸 카드를 다시 보며

등록|2023.11.10 09:15 수정|2023.11.10 09:15

▲ 제자들이 보낸 카드와 속 편지 ⓒ 박도


며칠 전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여의도에서 귀빈 두 분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분명 받아 주머니에 넣고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가운데 한 분과 갑자기 연락할 일이 생겨 명함을 찾는데 양복 주머니와 휴대용 가방 구석구석을 죄다 뒤져도 그 명함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속담에 그 "흔해 빠진 개똥도 약에 쓰려면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래서 글방 이곳저곳을 야단스럽게 뒤지는데 얌전한 두툼한 봉투가 보여 개봉을 하자 몇 해 전에 제자들이 보낸 카드가 그 속에서 나왔다.
 
1982년 3월, 이대부고 1학년 3반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37년이 흐른 2019년 6월 1일, 17명의 반 친구들이 함께 원주로 향했던 그 설레임으로 다시 찾아뵙기로 계획을 하고 답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의 엄중한 상황으로 부득이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 조만간 코로나 상황이 좋아지면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 82년 1학년 3반 제자들 

속지의 카드 글을 읽자 순간 어떤 행복감과 함께 늙은 훈장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고 하더니, 이즈음 나는 지난날의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많은 반성과 나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참회로 살고 있다.

그들을 만난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나는 꼭 33년 간 교단생활을 했다. 첫해부터 퇴직하던 그해까지 줄곧 평교사로 수업을 엄청 많이 했고 그 기간 20여 차례 학급 담임을 맡았다. 교단 초기 새 학급 학생을 맡으면 그 녀석들의 얼굴이 잠자리에서도 떠올라 잠을 설치기도 했다.

때로는 내 지난 인생을 온통 지우개로 몽땅 지우고 싶지만 그래도 교단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나눈 그 두터웠던 사제의 정만은 결코 지우고 싶지 않다.

한참이나 잃어버린 명함을 찾지 못해, 나도 이제는 별 수 없이 건망증이 심한 늙다리가 됐다고 많이 속상했다. 그런 가운데 제자들이 보낸 그 카드의 속지 맨 마지막 문장 "사랑합니다. 선생님"이란 그 글귀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위가 되고 스스로에게 화난 마음이 봄볕에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오늘 오전, 한 제자 녀석이 올 연말 자기들 동창 망년회에 초대한다며 "올만에 쌤 뵈면 좋겠어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그 문자를 받은 즉시 '가능한 참석할게'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 카드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다시 명함을 찾고자 오랜만에 입었던 세탁기 안에 있는 와이셔츠 윗 주머니를 뒤지자 거기서 찾던 명함이 불쑥 나왔다. 무료한 인생 황혼기에 모처럼 글감이 생겨 이 밤 행복한 마음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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