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워야 풀어준다고? 이 영화가 말하는 것
[김성호의 씨네만세 600] <비바리움>
알레고리라는 말이 있다. 격언 수준으로 쓰이는 풍유법을 보다 구조적으로 발전시킨 문학용어로, 이야기 전체가 현실세계의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경우를 이른다. 예를 들자면 <이솝우화>와 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 겉으로는 동물세계의 이야기이지만, 어디 그러한가. 인간세계를 풍자하기 위하여 동물을 가져다 그린 것을 읽는 이는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직설보다 오래 기억에 남고, 그리하여 이야기를 접한 이에게 무형의 힘을 가하는 것이 알레고리의 특징이다. 인간과 삶,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달라지게 이끄는 알레고리의 파괴력은 그를 직접 느껴본 이만이 안다고 하겠다.
여기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그 설정부터가 파격적이어서, OTT서비스가 영화 콘텐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뒤 그에 맞춘 시간 죽이기용 영화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작품이다. OTT서비스에 범람하는 90분 남짓의 참신하고 자극적인 영화처럼 보이는 탓이다. 보고 나면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는, 그래서 오락영화로의 가치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영화가 얼마나 많던가 말이다.
다른 새 둥지에 새끼를 낳는 뻐꾸기
로어칸 피네건의 작품으로 각종 OTT서비스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비바리움> 이야기다. 연구목적으로 관찰을 위해 동식물을 가두는 실험공간을 뜻하는 비바리움이다. 이를 영화 제목으로 빼어 박았다는 점부터가 참신한 설정을 예상하게 한다.
영화의 시작 또한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하나하나 떠오르는 가운데,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어느 새의 둥지가 화면 가득 비춰지며 갓 태어난 새들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으려 든다. 눈도 뜨지 못한 새가 곁에 있는 다른 어린 새를 밀어 둥지 바깥으로 떨어뜨리고, 마치 제가 둥지 전체의 주인인 양 행세한다. 그렇다. 이 새는 바로 뻐꾸기다.
영화는 곧 나무 아래 떨어진 새를 비춘다. 이 새를 발견한 건 갓 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그녀가 무엇을 골똘히 보는 모습에 교사인 여자가 다가와 확인하는 것이다. 죽은 새끼 새들을 본 소녀가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교사는 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고 답한다. 끔찍하지만 세상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 뻐꾸기도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 아닌가.
내 집 마련 분투하는 미국 젊은 커플
본격적인 이야기는 미국 어느 외딴 마을에서 시작된다. 앞서 등장한 교사 젬마(이머진 푸즈 분)와 애인인 톰(제시 아이젠버그 분) 커플은 살 집을 찾기 위해 어느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찾는다. 욘더라는 기획 단지 부동산을 판매하는 이 가게에서 독특한 점원이 나와 이들을 맞는다. 다른 곳보다 저렴한 가격에 깔끔한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톰과 젬마다. 이들은 중개인을 따라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로 향한다.
중개인이 커플을 데려간 곳은 욘더 가운데 위치한 9호라 적힌 집이다. 이 마을이 참 요상한 게 온통 똑같이 생긴 주택들이 단지 안에 끝도 없이 가득하단 것이다. 신축된 건물에 가격도 맞고 공간도 넓어서 조건이 마음에 들지만 무언가 기묘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온통 똑같은 집으로 가득해 길을 찾기도 어려운 마을의 생김새도 그렇고, 주변에 사람이며 동물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명확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탓에 둘은 중개인을 따라 집 안만 둘러볼 따름이다. 그렇게 마당까지 이른 순간, 중개인이 갑자기 보이지 않고 이들은 집에 자신들만 남았음을 알아차린다. 바깥에 세워둔 중개인의 차조차 사라진 모습에 섬뜩해져선 이들은 타고 온 차에 올라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가려 한다.
그런데 웬걸, 들어온 방향대로 한참을 내달려도 다시 9호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온통 똑같이 생긴 집들로 가득하여 달려도 달려도 같은 곳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 거듭 좌회전만 하고 한 방향을 따라 차를 몰아도 벗어날 수 없는 곳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휴대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고 차는 마침내 기름이 떨어져서 이들은 혼란에 빠진 채로 9호집 안으로 들어올 밖에 없다.
빠져나갈 수 없는 섬뜩한 마을
물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이들은 마을을 빠져나갈 또 다른 수를 생각해 낸다. 우선 집 지붕에 올라 주변을 살피기로 한 것이다. 차에 싣고 가지고 다니는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에 오른 톰은, 그러나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사방으로 시선이 닿는 곳이 전부 같은 집으로 가득한 욘더마을인 것이다. 더구나 이 마을엔 저들 말고는 누구도 없는 듯 보이고, 방향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그래도 하늘에 태양은 떠 있으니 이들은 우선 태양을 따라 계속 걷기로 결정한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마당에서 마당으로 담을 넘어가며 종일 태양을 좇아 걸었지만 아직도 욘더 마을인 것이다. 심지어는 종일 걸었는데도 다시 9호집이 눈에 들어오니 이들은 귀신에 현혹된 양 당혹할 뿐이다. 해가 진 상태로 집 앞에 도착하니 도로변엔 웬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열어보니 식료품 등 필수품이 담겨 있는 모습에 톰은 격분한다.
그는 그대로 상자를 가지고 들어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이를 커튼에다 가져다 댄다. 그로부터 집 전체가 활활 타오른다. 집을 태워서까지 바깥에 신호를 보내겠다는 게 톰의 계획인 것이다. 도로에서 불타는 집을 바라보다 곯아떨어지는 톰과 젬마, 그러나 다음날 이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황당하기 그지없다.
온통 재로 가득한 주변이지만 9호집은 여전히 번듯하게 서 있다. 그들이 불태운 어제의 흔적은 알아차릴 수도 없다. 집 앞엔 다시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데, 다가서 열어보니 웬 신생아가 들어 있다. 상자엔 이 아이를 키우면 풀려난다는 문장만 적혀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이 기묘한 아이와 커플의 동거로 흘러가게 된다.
아이를 길러야만 나갈 수 있다
아이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생김만 인간 아이일 뿐이지 단 석 달 만에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좋을 만큼 커버리는 성장속도가 무섭기까지 하다. 행동 또한 마찬가지,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알고 인간과는 다른 문자를 쓰는 것도 요상하다. 심지어 톰과 젬마의 말과 행동을 섬뜩한 수준으로 복제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마주할 때면 섬뜩한 괴성을 질러 이들을 당혹케 한다.
영화는 톰과 젬마가 아이를 키우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는 무섭게 성장하고, 톰과 젬마 커플과의 긴장 또한 높아져만 간다. 도대체 누가 마을을 만들었는지, 이 마을은 어째서 인간 이해로 닿지 못할 일들로 가득한 건지가 영화 내내 쉽사리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제공한다.
황당무계할 만큼 참신한 설정에 자극적인 전개로 일관하며 보고 나면 기억이 휘발되는 것이 근 몇 년간 제작된 OTT서비스 타깃 영화의 성격이다. 이를 두고서 사람들은 OTT서비스가 문화산업을 하향평준화 시킨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일부 OTT서비스용 영화의 제작진이 이전 극작용 영화 제작진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 이들 영화의 평점이 무척 낮다는 점 등이 그를 알 수 있는 지표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는 영화도 없지는 않다. 자극적 설정과 전개 속에서 현실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의미를 고심하는 작품이 있는 것이다. 그저 똑같은 양산형 OTT서비스용 영화가 아니냐 의심할 <비바리움>도 그런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그저 기묘한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커플의 이야기를 넘어 아이를 기르는 삶과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동일한 삶의 목적 같은 것을 말하는 영화 말이다.
인간사회 돌아보는 영화적 상징
영화의 첫 장면을 돌이켜 보자. 통상의 극영화와 달리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를 차지하는 모습을 넣었다. 스스로 제 자식을 기르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대신 키우는 새가 바로 뻐꾸기다. 그렇게 아기새는 남의 둥지를 차지한다. 젬마는 그조차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제가 둥지 털린 어미새가 되어 남의 자식을 기르게 되었을 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저항을 하려 했던 톰마저 제가 나서 말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산 이들에게 남은 건 죽음 뿐이다. 일생을 바쳐 자식을 기르지만 궁극엔 남은 자식은 저의 삶과는 동떨어진 개체임을 확인할 뿐이다. 먹이를 물어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새끼에게 넣어주는 새처럼 평생을 부모로서의 역할만 하다 마침내 죽고 만다. 그 지겨운 반복을 영화는 젬마가 마침내 이 마을의 역사를 목도하는 순간에야 드러낸다. 인간은 그 끝없는 반복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인가.
영화는 사회 차원에서도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무엇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자라 커플을 욘더에 가둔 중개인을 찾고, 마침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고도 그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나 경외의 마음 따윈 갖지 않는다. 사회 또한 뒷 세대가 앞 세대를 밀어내며 아무렇지 않게 대체되어 반복되는 것이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개인은 저를 잃어간다. 본능은 그 반복을 유지하려 들고 인간은 자식을 낳고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낸 뒤에야 제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를 돌아볼 뿐이다.
<비바리움> 속 비바리움은 그저 톰과 젬마를 바라보는 이종의 관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단면을 영화를 통하여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실험의 장인 것이다. 끝없는 반복과 세대의 전승 사이 개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에 영화는 한 편의 알레고리로써 완성되기에 이른다.
때로는 직설보다 오래 기억에 남고, 그리하여 이야기를 접한 이에게 무형의 힘을 가하는 것이 알레고리의 특징이다. 인간과 삶,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달라지게 이끄는 알레고리의 파괴력은 그를 직접 느껴본 이만이 안다고 하겠다.
▲ 비바리움포스터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다른 새 둥지에 새끼를 낳는 뻐꾸기
로어칸 피네건의 작품으로 각종 OTT서비스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비바리움> 이야기다. 연구목적으로 관찰을 위해 동식물을 가두는 실험공간을 뜻하는 비바리움이다. 이를 영화 제목으로 빼어 박았다는 점부터가 참신한 설정을 예상하게 한다.
영화의 시작 또한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하나하나 떠오르는 가운데,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어느 새의 둥지가 화면 가득 비춰지며 갓 태어난 새들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으려 든다. 눈도 뜨지 못한 새가 곁에 있는 다른 어린 새를 밀어 둥지 바깥으로 떨어뜨리고, 마치 제가 둥지 전체의 주인인 양 행세한다. 그렇다. 이 새는 바로 뻐꾸기다.
영화는 곧 나무 아래 떨어진 새를 비춘다. 이 새를 발견한 건 갓 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그녀가 무엇을 골똘히 보는 모습에 교사인 여자가 다가와 확인하는 것이다. 죽은 새끼 새들을 본 소녀가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교사는 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고 답한다. 끔찍하지만 세상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 뻐꾸기도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 아닌가.
▲ 비바리움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내 집 마련 분투하는 미국 젊은 커플
본격적인 이야기는 미국 어느 외딴 마을에서 시작된다. 앞서 등장한 교사 젬마(이머진 푸즈 분)와 애인인 톰(제시 아이젠버그 분) 커플은 살 집을 찾기 위해 어느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찾는다. 욘더라는 기획 단지 부동산을 판매하는 이 가게에서 독특한 점원이 나와 이들을 맞는다. 다른 곳보다 저렴한 가격에 깔끔한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톰과 젬마다. 이들은 중개인을 따라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로 향한다.
중개인이 커플을 데려간 곳은 욘더 가운데 위치한 9호라 적힌 집이다. 이 마을이 참 요상한 게 온통 똑같이 생긴 주택들이 단지 안에 끝도 없이 가득하단 것이다. 신축된 건물에 가격도 맞고 공간도 넓어서 조건이 마음에 들지만 무언가 기묘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온통 똑같은 집으로 가득해 길을 찾기도 어려운 마을의 생김새도 그렇고, 주변에 사람이며 동물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명확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탓에 둘은 중개인을 따라 집 안만 둘러볼 따름이다. 그렇게 마당까지 이른 순간, 중개인이 갑자기 보이지 않고 이들은 집에 자신들만 남았음을 알아차린다. 바깥에 세워둔 중개인의 차조차 사라진 모습에 섬뜩해져선 이들은 타고 온 차에 올라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가려 한다.
그런데 웬걸, 들어온 방향대로 한참을 내달려도 다시 9호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온통 똑같이 생긴 집들로 가득하여 달려도 달려도 같은 곳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 거듭 좌회전만 하고 한 방향을 따라 차를 몰아도 벗어날 수 없는 곳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휴대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고 차는 마침내 기름이 떨어져서 이들은 혼란에 빠진 채로 9호집 안으로 들어올 밖에 없다.
▲ 비바리움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빠져나갈 수 없는 섬뜩한 마을
물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이들은 마을을 빠져나갈 또 다른 수를 생각해 낸다. 우선 집 지붕에 올라 주변을 살피기로 한 것이다. 차에 싣고 가지고 다니는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에 오른 톰은, 그러나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사방으로 시선이 닿는 곳이 전부 같은 집으로 가득한 욘더마을인 것이다. 더구나 이 마을엔 저들 말고는 누구도 없는 듯 보이고, 방향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그래도 하늘에 태양은 떠 있으니 이들은 우선 태양을 따라 계속 걷기로 결정한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마당에서 마당으로 담을 넘어가며 종일 태양을 좇아 걸었지만 아직도 욘더 마을인 것이다. 심지어는 종일 걸었는데도 다시 9호집이 눈에 들어오니 이들은 귀신에 현혹된 양 당혹할 뿐이다. 해가 진 상태로 집 앞에 도착하니 도로변엔 웬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열어보니 식료품 등 필수품이 담겨 있는 모습에 톰은 격분한다.
그는 그대로 상자를 가지고 들어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이를 커튼에다 가져다 댄다. 그로부터 집 전체가 활활 타오른다. 집을 태워서까지 바깥에 신호를 보내겠다는 게 톰의 계획인 것이다. 도로에서 불타는 집을 바라보다 곯아떨어지는 톰과 젬마, 그러나 다음날 이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황당하기 그지없다.
온통 재로 가득한 주변이지만 9호집은 여전히 번듯하게 서 있다. 그들이 불태운 어제의 흔적은 알아차릴 수도 없다. 집 앞엔 다시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데, 다가서 열어보니 웬 신생아가 들어 있다. 상자엔 이 아이를 키우면 풀려난다는 문장만 적혀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이 기묘한 아이와 커플의 동거로 흘러가게 된다.
▲ 비바리움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아이를 길러야만 나갈 수 있다
아이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생김만 인간 아이일 뿐이지 단 석 달 만에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좋을 만큼 커버리는 성장속도가 무섭기까지 하다. 행동 또한 마찬가지,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알고 인간과는 다른 문자를 쓰는 것도 요상하다. 심지어 톰과 젬마의 말과 행동을 섬뜩한 수준으로 복제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마주할 때면 섬뜩한 괴성을 질러 이들을 당혹케 한다.
영화는 톰과 젬마가 아이를 키우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는 무섭게 성장하고, 톰과 젬마 커플과의 긴장 또한 높아져만 간다. 도대체 누가 마을을 만들었는지, 이 마을은 어째서 인간 이해로 닿지 못할 일들로 가득한 건지가 영화 내내 쉽사리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제공한다.
황당무계할 만큼 참신한 설정에 자극적인 전개로 일관하며 보고 나면 기억이 휘발되는 것이 근 몇 년간 제작된 OTT서비스 타깃 영화의 성격이다. 이를 두고서 사람들은 OTT서비스가 문화산업을 하향평준화 시킨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일부 OTT서비스용 영화의 제작진이 이전 극작용 영화 제작진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 이들 영화의 평점이 무척 낮다는 점 등이 그를 알 수 있는 지표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는 영화도 없지는 않다. 자극적 설정과 전개 속에서 현실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의미를 고심하는 작품이 있는 것이다. 그저 똑같은 양산형 OTT서비스용 영화가 아니냐 의심할 <비바리움>도 그런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그저 기묘한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커플의 이야기를 넘어 아이를 기르는 삶과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동일한 삶의 목적 같은 것을 말하는 영화 말이다.
▲ 비바리움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인간사회 돌아보는 영화적 상징
영화의 첫 장면을 돌이켜 보자. 통상의 극영화와 달리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를 차지하는 모습을 넣었다. 스스로 제 자식을 기르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대신 키우는 새가 바로 뻐꾸기다. 그렇게 아기새는 남의 둥지를 차지한다. 젬마는 그조차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지만 정작 제가 둥지 털린 어미새가 되어 남의 자식을 기르게 되었을 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저항을 하려 했던 톰마저 제가 나서 말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산 이들에게 남은 건 죽음 뿐이다. 일생을 바쳐 자식을 기르지만 궁극엔 남은 자식은 저의 삶과는 동떨어진 개체임을 확인할 뿐이다. 먹이를 물어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새끼에게 넣어주는 새처럼 평생을 부모로서의 역할만 하다 마침내 죽고 만다. 그 지겨운 반복을 영화는 젬마가 마침내 이 마을의 역사를 목도하는 순간에야 드러낸다. 인간은 그 끝없는 반복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인가.
영화는 사회 차원에서도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무엇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자라 커플을 욘더에 가둔 중개인을 찾고, 마침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고도 그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나 경외의 마음 따윈 갖지 않는다. 사회 또한 뒷 세대가 앞 세대를 밀어내며 아무렇지 않게 대체되어 반복되는 것이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개인은 저를 잃어간다. 본능은 그 반복을 유지하려 들고 인간은 자식을 낳고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낸 뒤에야 제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를 돌아볼 뿐이다.
<비바리움> 속 비바리움은 그저 톰과 젬마를 바라보는 이종의 관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단면을 영화를 통하여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실험의 장인 것이다. 끝없는 반복과 세대의 전승 사이 개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에 영화는 한 편의 알레고리로써 완성되기에 이른다.
덧붙이는 글
영화를 보고 감상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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