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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박박 기라'는 고객에게 겨우 한마디 했습니다

가스점검원으로 18년... 나의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며

등록|2023.11.24 19:27 수정|2023.11.24 19:27

▲ 김윤숙 공공운수노조 서울도시가스 분회장이 계량기를 점검하고 있다. ⓒ 김윤숙

 
처음 가스점검원 일을 시작한 건 IMF위기가 끝나고 나서였다. 남편이 건설쪽 종사자로, IMF위기 때 아예 일을 중단해야 했다. 언제든 누구든 쉽게 말하는 "할 게 없으면 '노가다'나 하지"조차도 통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어서 파산 신청을 하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가 IMF위기가 끝나고 작은 분식집을 차려서 3년 정도 운영했다. 작은 가게였는데 줄 서서 먹을 정도였지만 이마저도 대형 분식 프랜차이즈가 주변에 생겨서 그만뒀다. 그때 자주 오던 손님 중 하나가 '가스점검원'이었는데 "내가 하던 일을 해볼래요?" 하기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손님이 지나가듯 던진 그 한마디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18년 동안 내 '직업'이다. '나도 경제활동 하는 직장인'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내가 했던 가사노동도 물론 힘들었지만 이를 잘 모르는 가족들은 집 밖에서의 노동을 더욱 높게 사기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점검을 다니다 보면 정말 가스가 새는 집이 있다. 그럼 '내가 고객의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뿌듯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이 아니고서야 힘든 때가 훨씬 많은 일이다. 날씨, 업무량, 그리고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 고객들의 하대, 계단 낙상 사고, 개 물림 사고. 이것뿐일까. 송달도 하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비 오면 미끄러지기 일쑤고, 납부 기한이 있는 고지서는 빨리 전달해야 하니 시간에 쫓긴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강박도 생겼다.

오늘 안 가도 내일은 가야 하는 점검원들

'신입' 딱지를 막 떼고 나서였을까? 점검을 늦게까지 하다 보니 오후 9시에 방문해 점검한 일이 있었다. 고령의 고객이 "지금 잘 시간인데 왜 벨을 눌렀느냐" 하고 호통을 쳐 눈물 쏙 빼고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8~9년차였던가. 한 번은 고객이 알몸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린 집이었고, 이미 밖에서 계량기 점검은 마쳤고, 안방까지 보이던 상황이어서 들어가서 가스레인지만 보고 나오면 업무가 끝이었다. 일이 금방 끝나겠다는 기대감에 바로 집 안을 향해 "가스점검 왔어요. 보일러는 밖에 있어서 점검했으니 가스레인지만 보고 갈게요" 하고 말했다.

아무 대답이 없어 다시 한 번 "고객님 저 들어가도 돼요?"하고 들어갔더니, 30대 건장한 남성이 저벅저벅 알몸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냥 문 밖에 돌처럼 굳은 채로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가스점검 안 받아!"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게 아니라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업무용 휴대전화로 점검 일정을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파자마 입은 자기의 가랑이 사진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당황스러운 사진을 받고서 침착할 수 없는 상황에도, 일반 기업처럼 이런 일이 있다고 점검을 안 할 수가 없는 직업의 특성상 방문을 해야만 한다. 오늘 안 간다면 내일 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방문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의 보호를 받고 싶어 우선 해당 가구 근처 지구대에 방문했다. 경찰에게 내가 받은 그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물었더니, 경찰조차도 그 가구에 나 혼자 방문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며, 방문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관리자에게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말했고, 나는 결국 두려움에 방문하지 않았다.

"당신의 가족이어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관할 구역에 새 계량기가 생기면 업무용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뜨게 돼 있는데, 새로 생성된 것 하나가 내 기기에 뜨기에 방문했다. 관리자가 문을 열어야 하는 곳이었는데, 빌딩 주인인지 관리인인지 모를 50대 후반 남성이 "계량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단말기에 뜨면 점검을 해야 하기에 다시 정중히 요청드렸다. 그때 그가 말했다.

"계량기가 없으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박박 기어".

그 고객의 단호함에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 후미진 뒤쪽으로 단 둘이 들어가서 계량기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런 고객과 함께 가야 하는 것도 무서웠다. 그렇지만 지금 안 가더라도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와서 점검을 하니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돌아서 보일러실에 들어가니 계량기가 떡하니 있었다. 그때서야 그가 "이게 왜 여기에 있지?"라고 했다. 설치만 해두고, 사용하지 않는 계량기였던 모양이다.

고객의 폭언에 대한 억울함, 방금 전 느꼈던 두려움을 담아 겨우 한마디 했다. "고객님 아내가 저와 같은 일을 한다 해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이다. 당한 것에 비하면 너무 약한 대처라 여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 건물에 가야 하는데 내가 고객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당했다 한들 고객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위험해도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 한 도시가스검침원이 건물 뒤편에 숨겨져 있는 계량기를 점검하고 있다. ⓒ 이희훈


알몸 고객을 맞닥뜨린 이후로는 점검원들에게 "알몸으로 나오는 가구는 말하라"고 하여, 해당 가구를 남성 민원기사가 방문하지만 그 역시 일회성이며, 예방책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자알림e'를 깔아서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고객을 가스누출로부터 보호해도, 정작 나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구나.'

한 번은 관리자한테 "가구 담당자가 바뀔 수도 있고, 신축 아파트 입주 시에는 담당자 지역 이동도 있으니 세대의 특이사항을 좀 취합해서 다음 점검 담당자가 알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라고 했더니 "고객의 개인정보보호를 보호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모든 고객의 정보를 알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주의해야 할 가구들만 모아 리스트를 만들자는 것이었지만 역시나 안 됐다.

가끔은 몸을 쓰윽- 문대는 사람도 있고, '지금 방문하겠다' 연락하면 "오실 때 막걸리 좀 사오세요" 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한 가구에 세 차례까지만 방문을 시도하면 되는데, 회사에서는 그 이상의 방문을 해서라도 점검을 마치길 원한다. 점검률이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있던 집이어도 6개월 뒤에 다시 점검하러 가야 하니 그저 참고 견딜 뿐이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몇 호 그런 사람이 있더라", "방문하니 이런 이런 말을 하더라" 하면서. '2인 1조' 근무가 정말로 절실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꿈과 같은 2인 1조 근무

울산의 한 도시가스에서는 이전에 한 번 사고가 있어서 탄력적 2인 1조를 시행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함정이 있다. 점검 노동자들은 '1인 4000 전(계량기 세는 단위) 점검'을 요구하고 있는데, 탄력적 2인 1조 근무시 '2인 8000 전 점검'을 하게 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점검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2인 1조일까? 나는 이런 탄력적 2인 1조 대신 1인 할당량을 2500 전으로 줄여주면 좋겠다고 늘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검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2인 1조' 근무를 간절히 원하지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2인 1조 근무가 시행되면 1인의 인건비가 고스란히 시민들의 가스요금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2인 1조 근무가 어렵다면 적어도 격월 검침이나 1인 할당량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방문 점검을 위해 시민과 업무용 휴대전화로 연락을 하다 보니 전화를 통한 감정노동도 불가피하다. 너무 견디기 힘들었을 때 회사에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이 멘트를 우리 업무 전화기에 안내음으로 넣어주길 원한다"고 말해도 '재정' 문제로 들어주지 않았다. 이것만이라도 넣어주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는 사람도 좀 누그러지지 않겠나 싶었는데 이마저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공공재 업무를 민간기업이 하는 것이다 보니, '이익분'에 대해서는 더 가져가려 하면서도 누구 하나도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이가 없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노조 활동  

이제 점검원으로서 정년이 3~4년밖에 남지 않은 내가 점검원 업무와 '서울도시가스분회'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돈'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최저임금에 가까운 '서울형 생활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돈' 때문은 아니다.

이 일을 그만두면 내가 있는 노조 분회가 없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함께 노동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사라지면 우리가 어렵게 쟁취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다른 조합원들이 지칠까봐 두렵다.

이런 걱정을 해야 할 만큼 노조 활동은 정말 힘들다. 회사는 시위 참여로 인한 근무지 이탈 등을 핑계로 징계 처분, 그리고 정직을 내린다. 나 역시도 몇 번의 징계를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한 조합원들이 28명에서 11명으로 줄었다. 내가 분회장인데 나마저 힘들다고 나가면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싶어 나 혼자라도 이 분회를 지키려고 한다. 집에서는 몸도 마음도 힘드니 그만하라 하지만 조합원들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다.

'안전 지킴이'로 생각해주기를

점검 노동자들이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많지 않다. 그저 '방문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주기를 바랄 뿐이다. 점검 노동자들은 하루 한 집만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가구를 방문한다. 고객이 원하는 시간대에 방문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데, 이런 이유로 점검 노동자를 비하하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가스 점검은 '고객의 안전'을 위한 거니, 예의를 갖춰주면 좋겠다. 이밖에도 개는 묶어두고, 기본적으로 웃옷과 바지를 갖춰 입고 우리를 맞아주기를 바란다.

특히 여성 점검원을 '직장인'보다 '아줌마' 취급하는데, 이에 대한 인식변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본다. 가스 누출사고 예방을 위해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옆집 아줌마'처럼 편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나의 '노동'을 존중해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공공운수노조 서울도시가스 분회장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1,12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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