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부에 복무할 결심을 하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신임 미국 공사의 인사불성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에요.
1886년 봄입니다. 조선의 현실은 어둡고 봄은 너무 찬란하여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봄에 이런 일도 있었지요. 요코하마의 한 미국 회사가 내게 500불의 수표를 보내왔답니다. 회사의 총수는 부호인데, 한때 자신이 조선에서 어떤 사업 계약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완전히 망했을 거라고 말하는 군요. 나는 그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수표를 즉시 돌려 보냈지요.
봄이 지나가고 여름의 초입, 6월 8일에 PARKER 신임 공사가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부임하면 나는 드디어 해방되리라 여겨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더 큰 재앙이 될 줄이야. 기막힌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
공사와 함께 온 팔로스호의 몇몇 사관들이 나에게 공사가 상습적으로 폭음을 하니 주의해야 한다고 일러 주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공사는 날마다 술을 퍼마셨고 주벽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고주망태가 되더니 며칠간 인사불성이었습니다.
방 안에서 마구 넘어지면서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나, 마루바닥에서 난리 법석을 피우지를 않나, 정말 목불인견이었습니다. 그간 공사관에서 평안하게 일해 온 충직한 조선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그 와중에 조정의 관리들은 신임 공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예방을 옵니다. 공사의 광태에 말 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껴야했습니다.
"너무 폭음을 한 나머지 오줌도 가리지 못할 지경이랍니다. 일찍이 그런 막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간 제 자신의 처지를 돌아 볼 때에, 여기 작은 미국인 사회의 정착을 위해 그동안 제가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를 되돌아 볼 때에, 미국 외교관 한 명이 사려 깊게 일을 하고 조선인들로부터 신망을 얻는다면, 두 나라가 얼마든지 공동 번영을 누릴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에,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이 머리가 쇤 늙은 주정뱅이가 벌인 작태를 돌아 보게 될 때에, 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파카의 말에 의하면, 국무성 장관 Bayard가 만일 제가 해군을 떠나는 것을 동의한다면 기꺼이 저를 정식 공사로 임명할 거라고 말했다는군요. 제가 해군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아래서 공사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답니다." -1886.6.25 편지
알렌이 공사를 치료했습니다. 공사가 인사불성에서 벗어나자 나는 즉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때 고종임금이 파카 공사와 나를 부르셔서 알현했습니다. 6월 30일이었지요.
"떠나기 하루 전날 국왕이 저와 공사를 불러 알현이 이루어졌습니다. 왕은 공사의 주사酒邪를 알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왕이 공사에게 병후를 묻자 공사가 황설수설 거짓말을 늘어 놓는데 그걸 듣고 있자니 고통스럽더군요. 이런 꼴 안 보려면 한 시 바삐 떠나야겠다고 속으로 강다짐을 하였지요. 그 역겨움과 심적 고통, 그리고 이 망할 놈의 공사관 일을 하며 느껴야 했던 회한을 저는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답니다.
왕은 자주 시선을 공사로부터 저에게 돌리더군요. 저에게 최대의 찬사를 표현하시면서(퍽 당황스러웠지요), 절더러 속히 돌아 와서 조정 일을 도와 달라고 극히 정중하게 청하시더군요. 그게 참, 괴로웠습니다. 제 곁에 있는 공사라는 존재로 인하여 저의 모든 땀과 꿈이 허공에 흩어지고 말거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제 자신의 처지, 그리고 알현 자리가 더 없이 괴롭게 느껴지더군요.
속을 털어 놓고 말씀을 드릴 수도 없었지요. 왕이 등지고 있는 병풍 뒤에서는 왕비와 상궁들이 저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왕비가 제게 사람을 보내 속히 조선으로 되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전하더군요.
"이제 귀하가 떠나고 나면, 생소하기만 한 이방의 나라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어느 누가 정직하고 올바르게 말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국 저는 일이 잘 되는 대로 되돌아 오겠노라고 약속하고 말았답니다. 한 달 후에 돌아오겠노라고 왕에게 말씀드렸지요. 다음 날 한양을 서둘러 떠났습니다. 제물포에 닿자마자 팔로스 호에 올랐지요. 조선 땅이 아득히 멀리만 느껴지더군요. 그 길고 험난한 유배지의 삶을 벗어났을 때 제가 느꼈던 소회는 필설로 전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미국인과 조선인 모두가 대리 공사로서 제가 수행했던 일에 대하여 만족을 느낀답니다. 그것이 보람이지요. 지금 이렇게 글씨를 엉망으로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혼란한 상태라서 글씨를 잘 쓸 수가 없군요. 여기 오는 도중에 편지를 쓰려고 시도했었습니다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답니다. 많이 아팠고 지금도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랍니다." - 1886.7.10 편지, 상하이에서
나는 원래 제물포항에서 일본으로 직행하려 했지만 선편이 없어 중국의 치푸(산동 반도 소재, 지금의 엔타이)로 가야했습니다. 거기에서 몇 시간 머문 다음 배를 갈아타고 상하이에 도착하였답니다.
"제물포에 머물렀을 때에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심하였답니다. 한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1년간 미국 정부로부터 휴가를 얻어 왕을 위해 복무할 거라고 알렸습니다. 주거는 외국인 사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할 겁니다.
저는 진정 한 명의 조선인이 될 겁니다. 외국인들과는 완전히 떨어져서 전적으로 조선인들과만 일하게 될 겁니다. 필시 국왕과 친밀하고 직접적인 소통을 하게 될 겁니다. 만일 우리 정부가 저의 그러한 휴가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저는 즉시 사직할 겁니다.
이런 뜻을 해군성 장관에게 편지로 이미 전했답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보니, 그간 저희 정부가 저에게 가한 일련의 모욕과 황당한 처사에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복종해 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여겨지는군요.
기억이 생생합니다. 펜실바니아의 순진한 풋나기 소년으로서 제가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관은 저희들에게 복종과 멸사 봉공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교관의 훈시를 가슴 깊히 새겼지요. 충성스런 역군이 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능력에서 계속 선두를 달렸고 업무 실적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너무 충성스럽게 봉사한 까닭으로 저는 지금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겁니다.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할 겁니다. 온유하고, 정직하며 무엇보다도 아버님이 늘상 말씀하셨듯이 제 자신에게 진실된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게 아버님 슬하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 기독교 환경에서 제가 받았던 가르침에 충실한 길이겠지요. 저는 노력할 뿐입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상하이는 지독히 덥군요. 기력이 없어 겨우 방 안에 앉아 있답니다." - 1886.7.10 편지, 상하이에서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1886년 봄입니다. 조선의 현실은 어둡고 봄은 너무 찬란하여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봄에 이런 일도 있었지요. 요코하마의 한 미국 회사가 내게 500불의 수표를 보내왔답니다. 회사의 총수는 부호인데, 한때 자신이 조선에서 어떤 사업 계약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완전히 망했을 거라고 말하는 군요. 나는 그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수표를 즉시 돌려 보냈지요.
공사와 함께 온 팔로스호의 몇몇 사관들이 나에게 공사가 상습적으로 폭음을 하니 주의해야 한다고 일러 주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공사는 날마다 술을 퍼마셨고 주벽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고주망태가 되더니 며칠간 인사불성이었습니다.
방 안에서 마구 넘어지면서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나, 마루바닥에서 난리 법석을 피우지를 않나, 정말 목불인견이었습니다. 그간 공사관에서 평안하게 일해 온 충직한 조선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그 와중에 조정의 관리들은 신임 공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예방을 옵니다. 공사의 광태에 말 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껴야했습니다.
"너무 폭음을 한 나머지 오줌도 가리지 못할 지경이랍니다. 일찍이 그런 막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간 제 자신의 처지를 돌아 볼 때에, 여기 작은 미국인 사회의 정착을 위해 그동안 제가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를 되돌아 볼 때에, 미국 외교관 한 명이 사려 깊게 일을 하고 조선인들로부터 신망을 얻는다면, 두 나라가 얼마든지 공동 번영을 누릴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에,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이 머리가 쇤 늙은 주정뱅이가 벌인 작태를 돌아 보게 될 때에, 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 파카의 말에 의하면, 국무성 장관 Bayard가 만일 제가 해군을 떠나는 것을 동의한다면 기꺼이 저를 정식 공사로 임명할 거라고 말했다는군요. 제가 해군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랍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아래서 공사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답니다." -1886.6.25 편지
알렌이 공사를 치료했습니다. 공사가 인사불성에서 벗어나자 나는 즉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때 고종임금이 파카 공사와 나를 부르셔서 알현했습니다. 6월 30일이었지요.
"떠나기 하루 전날 국왕이 저와 공사를 불러 알현이 이루어졌습니다. 왕은 공사의 주사酒邪를 알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왕이 공사에게 병후를 묻자 공사가 황설수설 거짓말을 늘어 놓는데 그걸 듣고 있자니 고통스럽더군요. 이런 꼴 안 보려면 한 시 바삐 떠나야겠다고 속으로 강다짐을 하였지요. 그 역겨움과 심적 고통, 그리고 이 망할 놈의 공사관 일을 하며 느껴야 했던 회한을 저는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답니다.
왕은 자주 시선을 공사로부터 저에게 돌리더군요. 저에게 최대의 찬사를 표현하시면서(퍽 당황스러웠지요), 절더러 속히 돌아 와서 조정 일을 도와 달라고 극히 정중하게 청하시더군요. 그게 참, 괴로웠습니다. 제 곁에 있는 공사라는 존재로 인하여 저의 모든 땀과 꿈이 허공에 흩어지고 말거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제 자신의 처지, 그리고 알현 자리가 더 없이 괴롭게 느껴지더군요.
속을 털어 놓고 말씀을 드릴 수도 없었지요. 왕이 등지고 있는 병풍 뒤에서는 왕비와 상궁들이 저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왕비가 제게 사람을 보내 속히 조선으로 되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전하더군요.
"이제 귀하가 떠나고 나면, 생소하기만 한 이방의 나라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어느 누가 정직하고 올바르게 말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국 저는 일이 잘 되는 대로 되돌아 오겠노라고 약속하고 말았답니다. 한 달 후에 돌아오겠노라고 왕에게 말씀드렸지요. 다음 날 한양을 서둘러 떠났습니다. 제물포에 닿자마자 팔로스 호에 올랐지요. 조선 땅이 아득히 멀리만 느껴지더군요. 그 길고 험난한 유배지의 삶을 벗어났을 때 제가 느꼈던 소회는 필설로 전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미국인과 조선인 모두가 대리 공사로서 제가 수행했던 일에 대하여 만족을 느낀답니다. 그것이 보람이지요. 지금 이렇게 글씨를 엉망으로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혼란한 상태라서 글씨를 잘 쓸 수가 없군요. 여기 오는 도중에 편지를 쓰려고 시도했었습니다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답니다. 많이 아팠고 지금도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랍니다." - 1886.7.10 편지, 상하이에서
나는 원래 제물포항에서 일본으로 직행하려 했지만 선편이 없어 중국의 치푸(산동 반도 소재, 지금의 엔타이)로 가야했습니다. 거기에서 몇 시간 머문 다음 배를 갈아타고 상하이에 도착하였답니다.
"제물포에 머물렀을 때에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심하였답니다. 한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1년간 미국 정부로부터 휴가를 얻어 왕을 위해 복무할 거라고 알렸습니다. 주거는 외국인 사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할 겁니다.
저는 진정 한 명의 조선인이 될 겁니다. 외국인들과는 완전히 떨어져서 전적으로 조선인들과만 일하게 될 겁니다. 필시 국왕과 친밀하고 직접적인 소통을 하게 될 겁니다. 만일 우리 정부가 저의 그러한 휴가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저는 즉시 사직할 겁니다.
이런 뜻을 해군성 장관에게 편지로 이미 전했답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보니, 그간 저희 정부가 저에게 가한 일련의 모욕과 황당한 처사에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복종해 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여겨지는군요.
기억이 생생합니다. 펜실바니아의 순진한 풋나기 소년으로서 제가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관은 저희들에게 복종과 멸사 봉공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교관의 훈시를 가슴 깊히 새겼지요. 충성스런 역군이 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능력에서 계속 선두를 달렸고 업무 실적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너무 충성스럽게 봉사한 까닭으로 저는 지금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겁니다.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할 겁니다. 온유하고, 정직하며 무엇보다도 아버님이 늘상 말씀하셨듯이 제 자신에게 진실된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게 아버님 슬하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 기독교 환경에서 제가 받았던 가르침에 충실한 길이겠지요. 저는 노력할 뿐입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상하이는 지독히 덥군요. 기력이 없어 겨우 방 안에 앉아 있답니다." - 1886.7.10 편지, 상하이에서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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