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돈돈'하는 시대, 가난한 이야기는 왜 들어야 할까
'전지적 부자 시점'이 넘치는 세상, 안온이 쓴 <일인칭 가난>을 읽고
"'가난'을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심히 망설였지만, 그래도 썼다.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일인칭의 가난을 쓸 테니까. 세상에는 빈곤 계측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안온 작가의 <일인칭 가난> , 10쪽)
20여년을 '기초 생활 수급자'로 살았다는 20대 중반의 작가는 '가난' 앞에 일인칭을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라고 덧붙였다.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33개의 일화로 이뤄진 이 책은 결국 "가난은 개인적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 안온이 쓴 책 <일인칭 가난> 표지안온이 출판사 마티에서 책 <일인칭 가난>을 냈다. ⓒ 마티
조문영은 책 <빈곤과정>에서 "빈곤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했다(조문영, 2022, <빈곤과정>, 글항아리, 4쪽).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살다보면 어느 시점 '빈곤'이라는 괴물을 만난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괴물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저 멀리 흐릿하게 그림자만 보이는 '부자'라는 신기루에 눈길을 고정하고, 서로 칼을 겨누고 치열하게 싸운다.
우리 사회에서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드라마, 영화, 유튜브, 포털 사이트 뉴스까지 돈이 주인공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이제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기사에도 헤드라인에 '갑부'가 등장했다. 슬픔에도 가격을 매기는듯한 세상이다.
"딸 잃은 이스라엘 갑부 "두 국가 해법 믿어 ... 하마스는 없애야"" (연합뉴스, 12월 13일 인터넷판 기사)
떡볶이 먹방, '서민 코스프레'의 단골 메뉴
'평소에 그런 음식을 얼마나 먹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할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아는가? 누군가는 '정치 쇼'를 위해 입에 넣는 그 떡볶이 한 접시를 먹는데도, 통장 잔고를 계산해야하는 청년들이 있다는 현실을. "삼각김밥 2+1 행사를 기다려가며 3,000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20대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책, 57쪽).
'떡볶이 먹방'에 함께 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국정농단으로 실형이 확정된 범죄자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불법 승계 혐의로 기소 돼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전직 대통령들 포함, 왜 재판 중이거나 형이 확정된 전과자인 재벌 회장을 곁에 두려 하는 것일까? 모든 국민의 한 표는 똑같은데 말이다. 횡령, 탈세, 불법 승계, 뇌물공여 등 그들의 죄목은 한결같이 더 많은 돈과 권력을 향한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재계 총수들과 함께 떡볶이 튀김 빈대떡을 맛보고 있다. 오른쪽 부터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윤 대통령,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재원 SK수석부회장. 2023.12.6 ⓒ 연합뉴스
내 일터인 학교의 교사들 중에도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더러 있다. 때로는 학생들에게 교사 실명을 건너 듣는 때도 있다. 부동산은 나름 먹고 살 만한 경력 교사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어김없이 교사들이 분양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식도 교사들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주식과 부동산(아파트)은 복권과 같다. 기본적으로 돈을 낸 사람들끼리 나눠 갖는 '제로섬' 게임이다. 특히 경제 상황이 침체기에 접어든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이걸 '투기'라고 보고 당연히 돈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많은 이익을 볼수록 다른 이는 그만큼 손해를 보며,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생계비 걱정으로 주식과 부동산을 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교사들의 주식과 부동산 '투자'는 법적으로 문제 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파장은 짚어볼 문제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생활하는 교사의 윤리적 책임이 첫 번째 문제다. 두 번째,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미치는 비교육적 영향이 큰 문제다.
교사가 교실에서 마주하는 학생들과 보호자 상당수는 교사보다 가난할 가능성이 높다. 비수도권일수록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에 다가설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부자'를 향한 교사의 관심은 의도와 상관 없이 존재 이유인 학생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삼인칭 아닌, '일인칭 가난'의 존재 의미
"나는 가난한 내 삶을 지독하게 원망했다. 왜 하필 이런 가족일까, 왜 하필 이런 방구석일까, 왜 하필 딸일까, 왜 하필 1997년에 태어났을까, 왜 하필 부산이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왜, 도대체 내가 왜, 가난을 베개로 베고 비참함을 이불로 덮어야 할까. 가난은 이유 없는 벌이다."
(책, 69쪽)
내가, 우리가 만나는 어린 사람들 가운데 글쓴이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했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문제'로 보는 데는 소홀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라는 말로 자기 최면을 걸며 모른 척 하기도 했다. 어두운 그림자와 맞닥뜨렸던 "어제를 참고", 오늘을 살아내려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집이 지긋지긋해서 나왔다는 담이에게, 잠들어 있던 내 머리맡에 아빠가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는 지나간 이야기를 했다. OO주공(아파트) 전수 조사를 하면 미수에 그친 살인이 평범할 거라고도 했다. 실실 웃던 담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나아졌다며 털고 일어섰다. … 우린 이렇게 흉터를 자랑하며 생존 신고를 했고 연대의식을 다졌다. … 이런 일화는 나와 담이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제를 참고 오늘을 살려 걸음을 재촉하는 중학생은 많았고, 많을 것이다."
(책, 89쪽)
청소년 빈곤 연구자 강지나는 한국이 다른 OECD 국가보다 공공영역 지출이 매우 적다는 점을 지적했다(<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2023, 돌베개, 94쪽). '사회복지'를 민간부문에 맡겨 보편적이고 제도적 시스템이 아닌 '시혜적 시선'을 담은 도움 정도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난'은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 아닌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94~95쪽).
"아르바이트 하나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한 달에 많아야 30만 원을 벌 텐데, 이 돈에서 10%씩은 계절학기 기숙사비로 떼어놓고, 휴대전화 통신비 3만 3,000원(이마저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통신비가 감면되어 감당할 수 있었다), 학교-아르바이트 매장을 오가는 교통비, … 먹고 싶은 것을 어쩌다 한 번 먹을 비용까지 따지면 30만 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최소 두 개, 최대 네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며 (장학금 성적 기준을) 맞추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위의 책, 38쪽)
"돈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국고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나오는 것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나는 시험 기간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밤을 세워 공부했다." (책, 40쪽)
국가적 복지 체계 부족은 가난을 '남의 일'로 여기는 문화를 만든다. 이런 문화는 필요한 사람들의 입장과 거리가 먼 제도를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위 인용 글 사례처럼, 생계 때문에 출석도 쉽지 않은 학생들에게 우수한 성적을 요구하는 어이없는 장학 제도가 생기고 유지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의 복지는 철저히 신청주의다." (책, 147쪽)
▲ 5만원권 화폐(자료사진). ⓒ 픽사베이
안온은 책 마지막 부분을 '복지 신청 바로가기'라는 부록으로 채웠다(책, 147~159쪽).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면제도', '문화누리카드', 'EBS 교재 무상 지원', '인문100년장학금', '청년전세임대' 등에 관한 자세한 최신 정보를 담았다.
저자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바로잡기엔 미약하겠지만, 자신이 가진 권리를 알고 필요한 사람에게 알려주는 데 이 부록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라고 정보 소개 이유를 달았다(책, 147쪽).
시인 백석과 이소호를 좋아한다는 작가는 자신의 가난을 '쟁쟁한 목소리'로 외침으로써 '우리의 가난'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가 토해낸 '사자후'는 '전지적 부자 시점'과 '삼인칭 가난'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나의 가난과 우리의 가난'을 끄집어냈다고 본다.
이 책을 비롯해, 최근 '가난'을 깊이 있게 다룬 책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인칭 가난'이 모이고 쌓여, 두터운 '우리의 가난'이 '일인칭 부자'들을 밀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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