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최초의 그리스도인', 그 파란만장한 삶과 기록
[서해의 보석, 신안천사섬 18] 흑산도 ④ 손암 정약전의 길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흑산성당은 공소가 6개나 된다. 2005년 기준 흑산도 주민의 36.4%가 천주교인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천주교 주민 비율이 높다. 섬 주민의 존경을 받던 손암의 삶과 정신은 흑산도에서 천주교의 홀씨를 퍼뜨리는 데 큰 힘이 됐을 것이다. 구제품(救濟品) 신자도 있었다. 가톨릭 구제회는 전후(戰後) 빈궁에 찌든 흑산도 주민들에게 의약품 밀가루 같은 구제품을 보급했다.
▲ 예리항과 주변 섬들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흑산성당 ⓒ 신안군
1902년 목포 본당의 신부였던 알베르 빅토 드예(Albert-Victor Deshayes) 신부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에게 보낸 사목 서신에는 손암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저는 정약전이 흑산에 있는 천주교인이 된 박인수(Pak in syou) 집에 귀양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약전은 한국 성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받자마자 주교님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최초의 교인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차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실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드예 신부의 사목 보고서는 '흑산도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을 달아 은색 금속판에 새겨져 흑산성당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흑산성당 유창훈 요셉 신부는 "정약전이 살기 위해서 배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박인수라는 이름이 들어간 족보를 찾아내지 못했다. 손암이 지었다는 성가집도 발견되지 않았다.
▲ 흑산 성당 입구를 장식한 드예 신부의 사목보고서. ⓒ 흑산상당
사목보고서가 나온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신유박해(1801년) 당시의 분위기와 약전 약용 형제의 유배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함대를 보내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베이징 주교에게 보낸 백서(帛書) 사건(1801년)의 주모자 황사영은 약전 약용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사위였다.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인 순교자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다. 셋째 형 약종은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장남과 함께 처형당해 온 식구가 절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애달픈 삶을 살았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 제주 관아의 관비(官婢)가 되어 유배를 갔다. 제주도로 가던 길에 두 살 난 아들(황경한)을 추자도에 내려놓았다. 황경한은 그곳 어부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 황경한의 일부 후손들이 지금도 추자도에 살고 있다. 천주교는 그 인연을 기려 추자도에 공소를 설립했다.
다산과 손암은 배교(背敎)를 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유배를 갔다. 배교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산은 의금부 조사 과정에서 천주교도들의 실체 파악과 검거에 협조했다. 조선시대 의금부에 넘어온 중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추국(推鞫)기록문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 150권으로 번역됐다. 이 추안급국안에 다산의 행적이 상세히 나와 있다.
▲ 흑산성당 내부 모습. ⓒ 신안군
다산은 천주교에 입교해 약망(若望)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의금부 조사관들이 다산의 집에서 압수한 편지를 들이대며 "정약망이 누구냐"고 캐묻자 다산은 "저희 일가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부인했다. 스스로 천주교인이었음을 잡아뗀 것이다.
지금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사악한 천주학을 하는 사람은 제게 원수입니다. 지금 만약 제게 10일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를 데리고 나가게 해주신다면 이른바 사악한 천주학의 소굴들을 마땅히 체포하여 바치겠습니다. - 2월 11일 정약용 심문기록
조카사위 황사영과 선 그어 목숨 건진 다산
다산은 이날 심문을 받으며 곤장 30대를 맞았다. 옥관(獄官)들은 "약전 약용 형제는 황사영의 흉서(凶書)에 참여하거나 간섭한 일이 없으므로 죽이지 말기를 청한다"는 의견을 냈다. 2월 13일 심문기록에서 다산은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것이며 비록 조카사위지만 바로 원수입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다산이 입을 다물었더라도 황사영은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심문관이 약용 집에서 압수된 편지에 나오는 "이백다(李伯多)와 권사물(權沙物)이 누구냐"고 묻자 다산은 백다(베드로)는 이승훈이고 사물(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권일신이라고 알려주면서 '서양식 호(세례명)'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손암은 동생이 붙잡혀 들어온 지 나흘 뒤인 2월 14일 의금부에 수감됐으나 심문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손암도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교를 했으나 천주교인들과의 교유가 폭넓지 않아 천주교인 검거에 도움이 안 됐던 모양이다.
손암은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몇 권의 저서와 시문을 남겼고, 동생 다산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전해진다. 그러한 문서에서 천주교에 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 흑산성당의 마리아상. ⓒ 신안군
손암은 해배(解配)된 동생 약용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나가 동생을 기다리다 죽었다. 손암이 "동생이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게 할 수는 없다"며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나가려고 했을 때 흑산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떠나지 못하게 했다. 손암은 야밤에 첩과 두 아들을 배에 태우고 몰래 빠져나갔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히자 흑산도 사람들이 쫓아와 배를 붙잡아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우이도에 나가 동생 기다리다 죽은 약전
연안의 앞바다는 곶(串)과 섬들이 방파제 노릇을 해주기 때문에 바다가 잔잔한 편이다. 그러나 우이도에서부터 흑산도로 가기 위해 난바다(먼바다)로 들어서면 풍랑이 거칠어진다. 우이도를 지나 동중국해의 물결이 바로 밀려 닥치는 먼바다에 이르면 배는 바닷속으로 잠길 듯이 가라앉았다가 하늘로 다시 치솟기를 반복한다.
우이도~흑산도 항로는 당시 목선으로 이틀 정도 걸렸다. 물때랑 바람이 잘 맞아야 하는데, 가다가 바람이 안 불면 닻을 내리고 쉬었다. 손암은 험한 뱃길을 동생이 건너오게 할 수 없다며 우이도에 나가서 기다린 것이다. 우이도에는 손암이 집 바로 앞에 있는 굴봉에 자주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관련기사 : "살기 위해 배교했던 정약전, 유배지에선 천주님께 기도 드렸다") https://omn.kr/260b0
손암이 우이도에 나온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약용의 해배 공문이 내려오지 않아 1816년 손암은 아우를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약용의 해배 공문이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818년.
다산은 해배된 뒤 고향 마재에 돌아가 18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떴다. 손암은 유배 기간에 해배가 거론된 적도 없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손암은 다산처럼 명망이 높지 않았고 조정의 실력자들과 교유관계가 없어 흑산도 유배 15년 동안 잊혀진 인물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 봉건시대에 죄 지은 자를 가두던 옥섬. 흑산성당 예수상에서 이 옥섬이 내려다 보인다. ⓒ 신안군
흑산도에 많을 때는 95명이 넘는 유배인이 배소(配所)됐다. 섬사람들끼리 먹고 입기도 부족한데 제발 유배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한 문서가 대둔도의 의인(義人) 김이수의 문중에 전해 내려온다. 굶주린 섬사람들이 험한 산중을 다니며 칡을 캐 먹고살기도 했으니 유배인이 달가웠을 리 없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 손암의 대덕(大德)을 칭송했다. '수령이 상경했다가 다시 내려오면 백성들이 길을 막고 거절한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유배객이 다른 섬으로 이주하려 하자 섬사람들이 길을 막고 남아 달라고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손암은 사리마을 어부들과 어울리며 술친구를 했다. 대과(大科)에 합격하고 승정원과 규장각에서 일한 최고 수준의 양반 지식층임에도 교만을 부리지 않았다. 사리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손암이 자기 집에 와주기를 청했다.
▲ 흑산성당 입구의 예수석상. 멀리 내영산도, 외영산도 뒤로 다물도와 대둔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 김상현
흑산 성당 입구에 하얀색의 예수 석상이 서 있다. 진리 해안과 흑산도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예수상은 흑산 앞바다의 옥(獄)섬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고 죄지은 자를 사(赦)해주는 듯하다.
흑산성당 초대 주임신부였던 아일랜드 출신 숀 브라질(한국명 진요한)이 세계 7대 불사사의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도 산 정상의 예수 석상을 본떠 세운 것이다.
▲ 손암이 자산어보를 저술한 사리마을 전경. ⓒ 신안군
흑산성당~사리마을 '정약전의 길'
신안군과 천주교광주대교구는 흑산성당의 초장(草葬)골 성당박물관을 헐고 흑산성당역사관과 성모미술관을 새로 짓는다. 흑산도 천주교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다. 신안군은 흑산성당에서 사리마을을 잇는 '정약전 평화의 길'(11.5km)을 닦고 있다. 사리마을에는 사촌서당과 유배문화공원을 중심으로 자산어보 테마 마을을 조성한다.
예리항에서 <자산어보> 탄생지인 사리마을로 가는 길은 걸어서 두 시간가량 걸린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 세기 전 이곳에서 유배인으로 살았던 정약전의 삶을 사유하는 시간을 갖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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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식 역주,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 2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73, 흐름출판사, 2014
이태원, 《현산어보를 찾아서 4》, 청어람 미디어, 2018
정약용 저/박석무 역주, 《다산산문선》, 창비, 2014
최성환, "데예 신부 기록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 목포항과 섬의 사회상",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79(2021년 12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