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흐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곳, 네덜란드 준데르트
[인문학자와 함께하는 말랑말랑 유럽여행 5] 반고흐 하우스와 뮤지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37년 짧은 생애 동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벨기에 4개국의 21개 도시와 시골을 넘나들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마침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의 흔적을 찾아 지난 1월 3주간 유럽의 여러 도시와 시골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여행기를 연재하여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기자말]
"오, 준데르트, 준데르트여!
이번 여름에는 우리가 함께 다시 걸을 수 있을까."
- 1877년 2월,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중에서
마침내 네덜란드 준데르트.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다다른 작은 마을에는 고흐의 어린 시절 나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소년들 서너 명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이웃 마을 기숙학교로 보내지기 전까지 고흐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어머니에게 그림과 음악을 배우며 자연 속에 묻혀 살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을 마감하던 죽음의 날들 전까지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라반트 준데르트의 자연과 풍광을 그리곤 했다. 집과 교회와 학교, 동네 거리와 들판, 그곳의 어머니와 가족들, 그 모습 하나하나를 모두 다 그리워한다고 고백하곤 했다.
▲ 네덜란드 준데르트, 고흐 부친이 사역했던 교회 ⓒ 김윤주
빈센트는 반 고흐 집안의 맏이였다. 형제는 다섯이었다. 안나(Anna Cornelia, 1855-1930), 테오(Theodorus, 1857-1891), 리스(Elisabeth Huberta, 1859-1936), 빌(Willemina Jacoba, 1862-1941), 코르(Cornelis Vincent, 1867-1900). 부모는 고흐가 태어나기 바로 1년 전 같은 날 사산한 큰아이의 이름을 그대로 따 '빈센트'라 이름 지었다.
마을 광장 곁에는 작은 예배당이 서 있다. 고흐 부친이 목회 활동을 했던 곳이다. 매주 일요일 아버지가 설교하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갈 때면 마당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형의 묘를 지나야 했다. 고흐는 일곱 살 무렵 그 묘비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과 그 곁에 피어 있던 해바라기를 기억한다고 언젠가 편지에 고백한 바 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직 삶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이 묘비 위에 새겨져 있는 모습을 영문도 모르고 매일 봐야 했던 그 마음은. 차가운 비석, 서늘한 운명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과 그 곁의 노란색 해바라기라니!
▲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동상 ⓒ 김윤주
예배당 앞, 마을의 중앙 광장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가 서로 애틋하게 부둥켜안고 앞으로 한 발씩 걸음을 내딛고 있는 모습의 청동 조각상이 서 있다. 러시아 출신 프랑스 작가 오시 자킨(Ossip Zadkine, 1890-1967)의 작품 <빈센트와 테오 반 고흐>(1964)이다.
조각가 오시 자킨 역시 고향을 떠나 이국에 정착한 사연을 지닌 작가여서였을까. 고흐의 마음이 더욱 절절히 다가왔던 모양이다. 고흐 사후 30여 년이 흐른 1920년대 무렵 이곳 준데르트를 찾은 자킨은 고흐의 편지와 남겨진 흔적들을 추적해 그가 머물렀던 곳마다 기념물을 제작해 세운다. 벨기에 보리나주, 남프랑스의 생레미드 프로방스, 프랑스의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동상 아래에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쓴 편지, 부치지 못한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이 프랑스어로 쓰여져 있다. 고흐는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시절에 실제로 프랑스어로 편지를 썼다.
"너는 나를 통해서 그림을 창조하는 일에 함께했지, 격정적이면서도 평온함을 간직한 그림들을 말이야."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에 품고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빈센트, 그리고 그를 평생 동안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돌보며 영혼이 담긴 작품들을 남길 수 있도록 도운 동생 테오. 둘의 동행을 이렇게 아름답게 남긴 후대의 조각가. 그리고 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삶은 결국 이렇게 서로 이어지고 유유히 흐르는 것인지도.
▲ 네덜란드 준데르트, 빈센트 반 고흐 생가와 뮤지엄 ⓒ 김윤주
광장에서 왼쪽 길로 조금 걸어가면 고흐의 집이 나온다. 파란색 대문과 유리문이 아담한 붉은 석조 건물이다. 건물 입구 왼쪽 벽면에는 네덜란드어로 '빈센트 반 고흐 부모의 집'이라고 적혀 있는 석조 부조가 있다. 그 아래에는 이 건물에 대한 설명에 대한 설명이 간략히 적혀 있다.
"이곳에서 1853년 3월 30일 빈센트 반 고흐가 태어났다. 16세기부터 내려오던 원래의 집은 1903년에 허물어졌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1970년까지 목사관으로 쓰였다. 이 석조 부조는 1953년 고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설치되었다. 닐 스테인베르헌(Neil Steenbergen)의 작품이다."
어린 고흐가 뛰어놀았을 법한 자그마한 뒷마당을 잠시 거니는데 마음속에 그리움이 싹튼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아직 세상으로의 항해가 시작되지 않았던, 그렇지만 꿈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 누구에게라도 있었을 법한 그런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지금 이 건물은 뮤지엄으로 단장을 하고 현지 젊은 미술가들의 그림전 등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씨앗이 되고 영감이 되고 이렇게 기회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고흐는 얼마나 기뻐할까.
기념품 숍에는 고흐 그림들로 장식된 예쁜 소품들이 가득하다. 그가 생의 마지막 무렵에 그린 그림들로 채워진 기념품들이다. 고흐가 테오의 아들 탄생 선물로 그려 선물했던 그림,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작은 지갑과 필통을 나도 하나씩 샀다.
▲ 네덜란드 준데르트, 반고흐 하우스 뮤지엄 샵 ⓒ 김윤주
저녁 무렵, 마을을 둘러보고 버스정류장에서 베르다 행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자꾸만 마음속에 그의 편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낮에 둘러봤던 고흐 생가의 현판 위에 쓰여져 있던 그 문구.
"나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아."
목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어했던 고흐, 화가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의지하며 그림을 그리고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싶어했던 고흐.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뜻을 이해시키려 했지만, 끝내 실패해 버린 고흐. 하지만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가 남긴 글과 그림에서 위로를 얻고 사랑을 느끼는지!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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