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이거 없는 집을 못 봤다
집안 대소사 적어둔 농협 달력... 부모님에게 특별한 날을 선물해 주고 싶어요
얼마 전, 친정에 갔다. 엄마는 국희 아저씨네 농기구를 빌리러 간다고 했다. 국희 아저씨는 아빠의 동네 친구 분이다. 방에서 뒹굴 거리며 심심하던 차에 오랜만에 아줌마 아저씨도 보고 싶어 엄마를 따라나섰다. 아저씨네 도착하자 금세 나를 알아보고 반겨 주셨다.
"이게 누꼬? 영지 아이가, 신랑은? 애도 많이 크제."
"세월이 이마이 빠르다. 세상에..."
인기척에 아줌마까지 뛰어나와 마당이 시끌해졌다. 시골은 사람이 반갑다. 늘 만나던 사람 외엔 새로운 사람을 볼 기회가 별로 없는 탓일 것이다.
"자자, 이래 서 있지 말고 방에 들어가 가 차라도 한 잔 묵고 가라."
엄마는 괜히 수고스러울까 두어 번 뺐지만 쉽사리 놔주지 않을 걸 아는지 내 눈치를 살피고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달력을 다 보이는 곳에 걸어둔 이유
시골집은 재밌는 구석이 많다. '오늘의집' 앱에 비할 데가 아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같은 1980~1990년대 물건부터 최신형 제품까지 추상 전시를 방불케 하는 콘셉트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희 아저씨의 집도 그랬다. 우선 가구들의 위치가 상당히 창의적이다. 소파가 거실 중앙에 있다. 우리는 당연히 그 소파에 앉지 않고 출입구 문에 기대어 나란히 앉는다. 소파 앞엔 둔탁하게 반짝이는 나무 탁자가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탁자가 아닌 맨바닥에 과일과 차를 놓고 마신다.
소파엔 작업복이며, 앞치마며 하는 것들이 널브러져 있고, 나무 탁자엔 약 봉투가 가득 올려져 있다. 아저씨는 십여 년 전에 암 수술하셨다. 또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닌 지 걱정이 됐다.
열린 안 방 틈 사이로 황갈색의 전기장판이 보였다. 그 위에 이불이 그대로 깔려있고, 묵직한 커튼도 닫힌 그대로다. 농사 일로 집안을 살필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걸 부끄러워하지도, 특별히 흉으로 삼지도 않는 것이 시골의 남다른 미덕이다.
정겨움에 미소를 짓던 중 나는 달력 앞에서 눈길이 멈췄다. 시골의 스테디셀러, 바로 농협 벽 달력이다. 유난히 크고 흰 벽 달력. 맞다. 맨 아래 농협 심벌마크가 찍힌 바로 그 달력 말이다.
시골에서 이 달력 없는 집을 못 봤다. 그런데 걸려 있는 위치가 신기했다. 보통 달력은 안방 혹은 거실에 걸려있기 마련인데, 아저씨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벽 한 중간에 떡 하니 걸어두었던 것이다. 외부인도 마당에서 보면 훤히 보일 위치에 말이다.
보안과 안전에 예민한 도시인인 나는 '사생활이 너무 노출되는 거 아닐까?'라는 염려가 되었다. 달력엔 시력이 마이너스인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 큰 동그라미와 큰 글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28일, 29일, 30일에 동그라미. 그 밑엔 아들네 가는 날. 이렇게 말이다. 공공연하게 집 비우는 날짜를 적어놔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허허, 영지야, 우리 저 날 아들네 간다. 이제 며칠 안 남았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행사 있다 카면 그날만 눈 빠지게 기다리는기라."
옆에서 아줌마는 "말라꼬(뭐 하러) 3일씩이나 있으라고 하는지 원"이라고 투덜대지만 은근 자랑이 담긴 목소리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엔 설렘의 빛으로 가득했다.
왜 달력을 밖에서 다 보이는 곳에 걸어 놓았냐고 물어보니 아저씨가 머쓱하게 답하셨다.
"그래야 자주, 많이 보지. 껄껄껄."
자식들 오는 날이 더 중요한 사람들
한 번은 엄마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달력이 없다며 타박을 한 적이 있었다. 식구 모두 핸드폰 달력을 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하자 엄마는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이었다.
국희 아저씨네 달력을 보고 어르신들에게 흰 농협 달력이 필수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르신들에게 날짜는 날짜 그 이상의 의미다. 일상과 다른 날들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낙인 것이다. 젊을 때는 모든 날이 스케줄이고 바쁜 날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을 하다가 한 번, 먼 산을 보다가 또 한 번, 그렇게 그 날을 기다린다. 마치 어린 시절, 부모가 만들어 주었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젠 우리가 부모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줄 때다. 동그라미가 크게 표시된 날짜를 보면서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나는 일 년에 며칠이나 부모에게 특별한 날들을 만들어 주었을까?
아줌마 아저씨가 내어준 간식을 잔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 안방에 걸려있는 달력부터 확인했다. 역시 농협 달력이다. 거기에도 큰 동그라미 몇 개가 표시되어 있다. OO곗날, OO생일, 그리고 영지 오는 날이라고 낯익은 글씨체가 적혀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예수님 오신 날보다, 내가 오는 날이 더 중요한 사람들... 그들에게 난 어떤 특별한 날짜를 선물해 줄 수 있을까?
"이게 누꼬? 영지 아이가, 신랑은? 애도 많이 크제."
"세월이 이마이 빠르다. 세상에..."
"자자, 이래 서 있지 말고 방에 들어가 가 차라도 한 잔 묵고 가라."
엄마는 괜히 수고스러울까 두어 번 뺐지만 쉽사리 놔주지 않을 걸 아는지 내 눈치를 살피고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달력을 다 보이는 곳에 걸어둔 이유
▲ 어르신들에게 날짜는 날짜 그 이상의 의미다. 일상과 다른 날들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낙인 것이다. ⓒ 조영지
시골집은 재밌는 구석이 많다. '오늘의집' 앱에 비할 데가 아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같은 1980~1990년대 물건부터 최신형 제품까지 추상 전시를 방불케 하는 콘셉트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희 아저씨의 집도 그랬다. 우선 가구들의 위치가 상당히 창의적이다. 소파가 거실 중앙에 있다. 우리는 당연히 그 소파에 앉지 않고 출입구 문에 기대어 나란히 앉는다. 소파 앞엔 둔탁하게 반짝이는 나무 탁자가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탁자가 아닌 맨바닥에 과일과 차를 놓고 마신다.
소파엔 작업복이며, 앞치마며 하는 것들이 널브러져 있고, 나무 탁자엔 약 봉투가 가득 올려져 있다. 아저씨는 십여 년 전에 암 수술하셨다. 또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닌 지 걱정이 됐다.
열린 안 방 틈 사이로 황갈색의 전기장판이 보였다. 그 위에 이불이 그대로 깔려있고, 묵직한 커튼도 닫힌 그대로다. 농사 일로 집안을 살필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걸 부끄러워하지도, 특별히 흉으로 삼지도 않는 것이 시골의 남다른 미덕이다.
정겨움에 미소를 짓던 중 나는 달력 앞에서 눈길이 멈췄다. 시골의 스테디셀러, 바로 농협 벽 달력이다. 유난히 크고 흰 벽 달력. 맞다. 맨 아래 농협 심벌마크가 찍힌 바로 그 달력 말이다.
시골에서 이 달력 없는 집을 못 봤다. 그런데 걸려 있는 위치가 신기했다. 보통 달력은 안방 혹은 거실에 걸려있기 마련인데, 아저씨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벽 한 중간에 떡 하니 걸어두었던 것이다. 외부인도 마당에서 보면 훤히 보일 위치에 말이다.
보안과 안전에 예민한 도시인인 나는 '사생활이 너무 노출되는 거 아닐까?'라는 염려가 되었다. 달력엔 시력이 마이너스인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 큰 동그라미와 큰 글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28일, 29일, 30일에 동그라미. 그 밑엔 아들네 가는 날. 이렇게 말이다. 공공연하게 집 비우는 날짜를 적어놔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허허, 영지야, 우리 저 날 아들네 간다. 이제 며칠 안 남았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행사 있다 카면 그날만 눈 빠지게 기다리는기라."
옆에서 아줌마는 "말라꼬(뭐 하러) 3일씩이나 있으라고 하는지 원"이라고 투덜대지만 은근 자랑이 담긴 목소리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엔 설렘의 빛으로 가득했다.
왜 달력을 밖에서 다 보이는 곳에 걸어 놓았냐고 물어보니 아저씨가 머쓱하게 답하셨다.
"그래야 자주, 많이 보지. 껄껄껄."
자식들 오는 날이 더 중요한 사람들
▲ ⓒ elements.envato
한 번은 엄마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달력이 없다며 타박을 한 적이 있었다. 식구 모두 핸드폰 달력을 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하자 엄마는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이었다.
국희 아저씨네 달력을 보고 어르신들에게 흰 농협 달력이 필수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르신들에게 날짜는 날짜 그 이상의 의미다. 일상과 다른 날들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낙인 것이다. 젊을 때는 모든 날이 스케줄이고 바쁜 날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을 하다가 한 번, 먼 산을 보다가 또 한 번, 그렇게 그 날을 기다린다. 마치 어린 시절, 부모가 만들어 주었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젠 우리가 부모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줄 때다. 동그라미가 크게 표시된 날짜를 보면서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나는 일 년에 며칠이나 부모에게 특별한 날들을 만들어 주었을까?
아줌마 아저씨가 내어준 간식을 잔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 안방에 걸려있는 달력부터 확인했다. 역시 농협 달력이다. 거기에도 큰 동그라미 몇 개가 표시되어 있다. OO곗날, OO생일, 그리고 영지 오는 날이라고 낯익은 글씨체가 적혀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예수님 오신 날보다, 내가 오는 날이 더 중요한 사람들... 그들에게 난 어떤 특별한 날짜를 선물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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