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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선고받은 공무원, 한 장의 서류 들고 한 일

[리뷰] 영화 <리빙: 어떤 인생>

등록|2023.12.18 15:11 수정|2023.12.18 15:11
  

▲ 영화 <리빙: 어떤 인생> 스틸 ⓒ 티캐스트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 톨스토이는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인간성에 대해 탐색했다. 최근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 <이키루>와 <리빙: 어떤 인생>까지 차례로 볼 기회가 생겼다. 태어나기 때문에 산다는 말도 맞지만, 인간은 살고자 하는 본능보다 살아가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물이라 느꼈다.

하지만 벼랑 끝에 가서야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는 소중함을 잘 모르고 방황하거나 무료하게 흘려보낼 때가 많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과거를 돌아보고 가치를 매기는 우매한 존재이기도 하다. 살아있을 때 좀 더 치열했다면 어땠을까 후회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일까.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아가는 여정이 신났다. 남들 눈에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내게 의미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앞으로 10년, 20년 후 인생 막바지가 되어 되돌아볼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를 떠올릴 것 같다. 나 같이 하찮은 존재가 세상의 작은 보탬이 되었을지 고대하면서, 오늘도 쓸모를 찾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기계적인 일상을 살던 미스터 좀비
  

▲ 영화 <리빙: 어떤 인생> 스틸 ⓒ 티캐스트


매일 똑같은 시간 기차로 집과 회사를 오가는 루틴을 지키던 윌리엄스 (빌 나이)는 최근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하나뿐인 아들을 열심히 키웠을 뿐인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도통 모르겠다.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아왔던 성실한 시청 공무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지 않겠나. 충동적으로 윌리엄스는 다음 날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얼마가 될지 모를 살날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남들 눈을 일일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비로소 남은 인생을 쓰겠다고 선언했지만 제대로 즐겨 본 적 없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아는 거다.

어쩌다 바닷가에 도착한 그는 한 레스토랑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극작가 서덜랜드(톰 버크)를 만나 향락의 세계를 경험한다. 전 재산의 반을 도박, 술, 춤, 노래 등으로 흥청망청 탕진할 기세다.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찾지 못해 그만둔다. 대체 무엇을 하는 데 써야 할지 몰라 야속한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시청 직원이었던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과 난생처음 비싼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낸다. 내친김에 못 가본 놀이공원이나 매일 들렸던 극장을 찾아 그동안 못 누렸던 일상을 만끽하게 된다.

마거릿과 함께라면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젊음의 생동력이 펄떡였다. 매 순간 격렬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마거릿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기보다, 일탈을 경험하기 보다, 그저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데 의미를 찾자는 생각이 스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한 장의 서류를 찾아 곧장 실행에 옮긴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찰나, 작지만 위대한 유산
  

▲ 영화 <리빙: 어떤 인생> 스틸컷 ⓒ 티캐스트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1952년 만들어진 <이키루>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영감받아 만들어졌다. 러시아-일본- 영국을 거치며 시대와 배경에 맞게 재해석 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색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5살 때 이민 온 작가의 정체성의 끌림일지 모르겠다. 영국 버전의 <이키루>를 만들고 싶었고 그게 빌 나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빌 나이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공무원의 각성과 애착이 품격 있게 빛난다. 어릴 적 꿈이 '신사'였던 한 남자가 꿈을 이룬 후 무감각하게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상황이 펼쳐짓다. 빌 나이의 푸석한 표정과 냉소적인 연기는 맞춤정장처럼 잘 어울린다. 죽음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일 것 같은 특유의 이미지가 윌리엄스 자체였다.

각각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재건이 화두인 일본과 영국이 배경이지만 스타일은 조금 다르다. 흑백과 컬러의 차이도 있겠지만 영국 버전이 더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이키루>는 자식과 부모 자식 간의 유대감 차이를 부각했고, <리빙: 어떤 인생>은 곁에서 지켜보는 신입 사원 웨이클링(알렉스 샤프)을 넣어 감정을 따라갈 가이드로 삼았다. 등장인물의 순서나 편집, 삽입된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담담한 감동을 준다.

메시지는 동일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거다. 무미건조한 일생에서 찬란한 인생을 발견한 기쁨을 읊조린다. <이키루>가 제작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다. 고전이 좋은 것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사랑받는다는 데 있다. 12월을 장식할 영화로 손색없다. 올해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경험을 쌓아 성장했는지 정리해 보고 내년을 준비하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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