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버리고 가자"... 잘 나가던 부부가 산속으로 간 까닭
[박병춘의 산골 통신] 깊은 숲속에서 목공 교육에 빠져 사는 황득준-김정윤 부부 이야기
목공 기술로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꼭 배워 보리라는 의지를 불태웠다. 의지가 모이면 현실이 되는 법, 평창군 농업기술센터가 펼쳐놓은 프로그램을 검색하다가 목공의 기초 과정을 만났다. 벽에 거는 선반, 휴대폰 받침대, 컵꽂이, 식탁 사물함 등 실생활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며 기초적인 공부를 하고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에는 기초보다 상위에 있는 새집, 책꽂이, 의자, 벽시계를 만들어 공구를 제법 다룰 줄 알게 됐고 목공의 매력에 빠졌다.
그렇게 세 차례 목공 프로그램을 소화하면서 만난 사람이 있다. 목재의 종류부터 작품의 계획과 실행까지 목공의 세계를 친절하게 가르쳐준 부부다.
황득준(56)-김정윤(52) 부부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산기슭에 둥지를 틀고 널찍한 목공방을 마련했다. 평소 꿈꾸던 터에는 부부만의 공간을 따로 마련해 살림집을 지었다. 공방 안 커다란 칠판에는 주간 강의 계획이 꽉 차 있다. 수강생의 70%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귀농귀촌인들로 참여 만족도가 최고조다.
피는 못 속여
황득준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황해도에서 내려와 서울 종로에서 온갖 생활고를 견디며 7남매를 키웠다. 성실, 근면은 아버지의 대명사로 통했다. 당시 인사동에서 '황씨 아저씨'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인사동 고미술계에서 일을 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가를 만났고, 밤이 되면 목공예에 빠져 작품을 만들었다. 아버지만의 섬세한 작품은 늘 인기가 많았고, 특히 일본인들의 호응이 좋아 주고객층이 되어 작품을 사가곤 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목공예를 배웠어야 했는데, 철이 들어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어릴 때 눈으로 보았던 것만 조금 기억에 있을 뿐 아버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못 받은 걸 평생 참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목공예 기술을 잇지 못하고 목공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결국은 아버지의 피가 아닐까 하여 위안을 삼는다는 황씨의 말에 아내 김정윤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나의 스승
유년, 청소년 시절을 지냈던 서울 삼청동엔 황씨만의 놀이터가 있었다. 경비를 피해 창덕궁 담을 넘어 개방되지 않은 곳까지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궁궐 속의 숲과 나무랑 친했고 온갖 식물과 곤충을 만나며 교감했다.
목공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지만 황씨는 차근차근 면 맞추기 기초과정부터 시작하여 고급 나무를 사용해서 유럽식 짜맞춤을 배웠다. 전통 방식 짜맞춤을 배우고 싶어 유능한 스승을 힘들게 찾아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10년 가량 목공방을 찾아다니며 나무의 깊이를 이해하고 기술을 터득했다. 월급을 안 받을 때도 많았지만 책을 사서 독학하는 재미에도 빠졌다.
아내의 전공은 갤러리 큐레이터로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전시하여 작가와 관객이 만나 교류하고 소통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하던 일을 접고 목공예에 빠져 들었다. 이 대목에서 아내 김씨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제 인생의 스승이자 목공예의 스승이에요.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랍니다. 나무와 함께 목공에 빠지다 보면 나무가 말을 해요.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요.(함께 웃음)"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작품형 목공이냐 생계형 목공이냐, 부부는 예술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내는 현실과 타협하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왜 퇴보의 길을 가냐며 수용하지 않았다. 남편은 점점 더 나무의 매력에 빠졌고, 상업적 목공을 외면했으나 차분하게 설득의 시간을 가진 끝에 생계를 위한 목공으로 전환했다.
경기도 분당에 작은 공방을 마련했다. 반려견 시대와 맞물려 부부의 예술적 혼이 담긴 원목 강아지집은 실로 대박이 났다. TV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고 세계 최초로 나무로 디자인을 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외에서도 주문을 했고, 해외 바이어들에게 연락이 올 정도로 관심을 받았지만 남편은 대량 생산을 절대 하지 않고,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수요는 폭발했고 경제적 효과도 수직 상승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 날이 거듭될수록 남편에게 미소보다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남편이 원하는 삶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편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고 산속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2년만 더 수익을 내고 가자며 말렸지만 남편은 단호했다. "2년이 지나도 똑같은 말을 할 거다. 당신은 오든 말든 나는 산속으로 가겠다."
부부가 원하는 집터를 찾아
주문이 밀려드는 공방문을 닫고 전국을 돌며 부부가 원하는 땅을 찾아다녔다. 좋다고 하는 곳은 파괴된 자연이 대부분이었다. 남편이 원하는 땅의 조건은 부동산 업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공방은 포기해도 좋다.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그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게 남편의 요지였다. 남편이 원하는 땅은 없었다. 부동산도 지쳐서 더 이상 땅 소개를 하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전국을 돌며 유일하게 안 가본 강원도 평창을 찾았다. 조건을 걸어 평창 지역 부동산과 소통했다. 업자는 그런 곳은 찾기 힘들다며 그래도 원한다면 한번 와보라고 했다. 길도 전기도 없었다. 인적도 없었다. 나무가 울창했다. 부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아무도 들어갔던 흔적이 없어 보이는 울창한 숲에 들어갔다. 아늑한 엄마 품 같은 땅이 나타났다. 숨어있던 숲속엔 S라인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햇살이 비추며 반짝거렸다. 부부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천연의 숲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2015년 9월, 집과 공방을 2층으로 지으면 수월했으나 가급적 자연 지형을 살려 집과 공방을 따로따로 짓기로 했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했다. 1급수에 사는 가재가 놀라지 않도록 하수관을 따로 설계하여 집부터 공방까지 설치했다. 제초제는 금물, 가급적 예초기를 사용하여 풀의 높이만 줄인다. 집에서 공방까지 물리적 거리는 약 200미터지만 부부의 걸음걸이로는 1시간이 걸린다.
목공 교육의 시작
부부가 설계하여 지은 공방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 '산속 갤러리'는 큐레이터 경력을 지닌 아내의 공간이었고, 목공 작업실은 남편의 공간이었다. 남편의 작품을 보기 좋게 배치하여 오가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었으나 주변에서 공방 설비와 목공 실력을 인정하여 교육 장소로 탈바꿈했다.
용평면 평생 학습원에서 목공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를 받아들여 강의를 하고 나자 소문이 퍼졌다. 현지인은 물론 귀농귀촌인들에게 목공의 기초 과정과 심화 과정 등을 교육하며 부부는 재능 기부라는 보람을 느꼈다. 부부는 집과 공방을 짓고 3년이 지난 2017년부터 수많은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 있는 목공반을 지도하며 단위학교 공방을 정비하고 수준을 끌어올렸다. 특히 봉평고등학교 목공반은 부부의 관심과 열정이 반영돼 목공실이 활성화되고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체험 교육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지인 한 분이 무슨 목공예 대회가 있다고 나가 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황씨에게 주어진 것은 통나무 한 토막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주저없이 작품 제작에 몰두했으나 황씨는 점심 시간까지도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무엇을 만들 것인가 고뇌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 나무 껍질을 살려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모든 배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는 등대를 깎아 올렸다. 그 위에는 양초를 얹어 작품을 완성했고 수상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출전이었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대회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예술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게 황씨 부부의 포부다.
인터뷰 후반에 부부에게 물었다. 두 분께 목공이란 무엇인가요?
남편 "저에게 목공은 '인생의 행복'입니다. 이런 자연 속에 살 수 있고, 만지고 싶은 걸 만지면서, 좋은 분들과 만나고, 학생들의 순수한 기운을 받으며 살 수 있다니 그저 행복이지요. 물욕 없이 나무를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니까요."
아내 "아직은 모르겠어요. 제 마음을 고스란히 녹여낸 작품이 아직은 없어서 그런가 봐요. 어떤 경지에 올라야 작품을 만들지 모르지만 남편과 함께 동행하며 아내로서 조력자 역할을 잘해는 일이 목공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저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이 목공이겠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아내가 추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제 마음속의 고해성사입니다. 산속으로 가고 싶다는 남편을 도시에서 왜 붙잡았는지 후회가 돼요. 남편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 행복을 누리게 할 걸 자연 속에서 흰머리가 된 소년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새해에는 더 많은 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야겠죠.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동행하렵니다."
▲ 지난 12월 22일, 봉평콧등작은미술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곳에는 부부의 지도를 받은 수강생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 박병춘
그렇게 세 차례 목공 프로그램을 소화하면서 만난 사람이 있다. 목재의 종류부터 작품의 계획과 실행까지 목공의 세계를 친절하게 가르쳐준 부부다.
황득준(56)-김정윤(52) 부부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산기슭에 둥지를 틀고 널찍한 목공방을 마련했다. 평소 꿈꾸던 터에는 부부만의 공간을 따로 마련해 살림집을 지었다. 공방 안 커다란 칠판에는 주간 강의 계획이 꽉 차 있다. 수강생의 70%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귀농귀촌인들로 참여 만족도가 최고조다.
황득준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황해도에서 내려와 서울 종로에서 온갖 생활고를 견디며 7남매를 키웠다. 성실, 근면은 아버지의 대명사로 통했다. 당시 인사동에서 '황씨 아저씨'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인사동 고미술계에서 일을 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가를 만났고, 밤이 되면 목공예에 빠져 작품을 만들었다. 아버지만의 섬세한 작품은 늘 인기가 많았고, 특히 일본인들의 호응이 좋아 주고객층이 되어 작품을 사가곤 했다.
▲ 부부가 애지중지하는 선친의 작품 ⓒ 박병춘
"그때 아버지를 따라 목공예를 배웠어야 했는데, 철이 들어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어릴 때 눈으로 보았던 것만 조금 기억에 있을 뿐 아버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못 받은 걸 평생 참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목공예 기술을 잇지 못하고 목공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결국은 아버지의 피가 아닐까 하여 위안을 삼는다는 황씨의 말에 아내 김정윤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나의 스승
유년, 청소년 시절을 지냈던 서울 삼청동엔 황씨만의 놀이터가 있었다. 경비를 피해 창덕궁 담을 넘어 개방되지 않은 곳까지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궁궐 속의 숲과 나무랑 친했고 온갖 식물과 곤충을 만나며 교감했다.
목공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지만 황씨는 차근차근 면 맞추기 기초과정부터 시작하여 고급 나무를 사용해서 유럽식 짜맞춤을 배웠다. 전통 방식 짜맞춤을 배우고 싶어 유능한 스승을 힘들게 찾아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10년 가량 목공방을 찾아다니며 나무의 깊이를 이해하고 기술을 터득했다. 월급을 안 받을 때도 많았지만 책을 사서 독학하는 재미에도 빠졌다.
아내의 전공은 갤러리 큐레이터로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전시하여 작가와 관객이 만나 교류하고 소통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하던 일을 접고 목공예에 빠져 들었다. 이 대목에서 아내 김씨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제 인생의 스승이자 목공예의 스승이에요.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랍니다. 나무와 함께 목공에 빠지다 보면 나무가 말을 해요.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요.(함께 웃음)"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작품형 목공이냐 생계형 목공이냐, 부부는 예술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내는 현실과 타협하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왜 퇴보의 길을 가냐며 수용하지 않았다. 남편은 점점 더 나무의 매력에 빠졌고, 상업적 목공을 외면했으나 차분하게 설득의 시간을 가진 끝에 생계를 위한 목공으로 전환했다.
▲ 서사가 있는 원목 강아지집 ⓒ 박병춘
경기도 분당에 작은 공방을 마련했다. 반려견 시대와 맞물려 부부의 예술적 혼이 담긴 원목 강아지집은 실로 대박이 났다. TV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고 세계 최초로 나무로 디자인을 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외에서도 주문을 했고, 해외 바이어들에게 연락이 올 정도로 관심을 받았지만 남편은 대량 생산을 절대 하지 않고,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수요는 폭발했고 경제적 효과도 수직 상승했다.
▲ 서사가 있는 원목 강아지집 ⓒ 박병춘
▲ 서사가 있는 원목 강아지집 ⓒ 박병춘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 날이 거듭될수록 남편에게 미소보다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남편이 원하는 삶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편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고 산속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2년만 더 수익을 내고 가자며 말렸지만 남편은 단호했다. "2년이 지나도 똑같은 말을 할 거다. 당신은 오든 말든 나는 산속으로 가겠다."
부부가 원하는 집터를 찾아
주문이 밀려드는 공방문을 닫고 전국을 돌며 부부가 원하는 땅을 찾아다녔다. 좋다고 하는 곳은 파괴된 자연이 대부분이었다. 남편이 원하는 땅의 조건은 부동산 업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공방은 포기해도 좋다.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그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게 남편의 요지였다. 남편이 원하는 땅은 없었다. 부동산도 지쳐서 더 이상 땅 소개를 하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전국을 돌며 유일하게 안 가본 강원도 평창을 찾았다. 조건을 걸어 평창 지역 부동산과 소통했다. 업자는 그런 곳은 찾기 힘들다며 그래도 원한다면 한번 와보라고 했다. 길도 전기도 없었다. 인적도 없었다. 나무가 울창했다. 부부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아무도 들어갔던 흔적이 없어 보이는 울창한 숲에 들어갔다. 아늑한 엄마 품 같은 땅이 나타났다. 숨어있던 숲속엔 S라인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햇살이 비추며 반짝거렸다. 부부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천연의 숲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부부와 교육생의 작품 ⓒ 박병춘
2015년 9월, 집과 공방을 2층으로 지으면 수월했으나 가급적 자연 지형을 살려 집과 공방을 따로따로 짓기로 했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했다. 1급수에 사는 가재가 놀라지 않도록 하수관을 따로 설계하여 집부터 공방까지 설치했다. 제초제는 금물, 가급적 예초기를 사용하여 풀의 높이만 줄인다. 집에서 공방까지 물리적 거리는 약 200미터지만 부부의 걸음걸이로는 1시간이 걸린다.
목공 교육의 시작
부부가 설계하여 지은 공방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 '산속 갤러리'는 큐레이터 경력을 지닌 아내의 공간이었고, 목공 작업실은 남편의 공간이었다. 남편의 작품을 보기 좋게 배치하여 오가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었으나 주변에서 공방 설비와 목공 실력을 인정하여 교육 장소로 탈바꿈했다.
▲ 귀농귀촌인을 대상으로 교육 중 ⓒ 박병춘
용평면 평생 학습원에서 목공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를 받아들여 강의를 하고 나자 소문이 퍼졌다. 현지인은 물론 귀농귀촌인들에게 목공의 기초 과정과 심화 과정 등을 교육하며 부부는 재능 기부라는 보람을 느꼈다. 부부는 집과 공방을 짓고 3년이 지난 2017년부터 수많은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 있는 목공반을 지도하며 단위학교 공방을 정비하고 수준을 끌어올렸다. 특히 봉평고등학교 목공반은 부부의 관심과 열정이 반영돼 목공실이 활성화되고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체험 교육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 봉평고등학교 목공반 학생들을 지도하며 ⓒ 박병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지인 한 분이 무슨 목공예 대회가 있다고 나가 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황씨에게 주어진 것은 통나무 한 토막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주저없이 작품 제작에 몰두했으나 황씨는 점심 시간까지도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무엇을 만들 것인가 고뇌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 나무 껍질을 살려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모든 배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는 등대를 깎아 올렸다. 그 위에는 양초를 얹어 작품을 완성했고 수상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출전이었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대회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예술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게 황씨 부부의 포부다.
인터뷰 후반에 부부에게 물었다. 두 분께 목공이란 무엇인가요?
남편 "저에게 목공은 '인생의 행복'입니다. 이런 자연 속에 살 수 있고, 만지고 싶은 걸 만지면서, 좋은 분들과 만나고, 학생들의 순수한 기운을 받으며 살 수 있다니 그저 행복이지요. 물욕 없이 나무를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니까요."
아내 "아직은 모르겠어요. 제 마음을 고스란히 녹여낸 작품이 아직은 없어서 그런가 봐요. 어떤 경지에 올라야 작품을 만들지 모르지만 남편과 함께 동행하며 아내로서 조력자 역할을 잘해는 일이 목공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저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이 목공이겠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아내가 추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 남편은 저의 위대한 스승이랍니다. ⓒ 박병춘
"제 마음속의 고해성사입니다. 산속으로 가고 싶다는 남편을 도시에서 왜 붙잡았는지 후회가 돼요. 남편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 행복을 누리게 할 걸 자연 속에서 흰머리가 된 소년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새해에는 더 많은 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야겠죠.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동행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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