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와 요코하마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지하철로 30여 분이면 요코하마 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에는 그린벨트가 없어, 도심지가 끝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의 경계를 넘어왔지만, 이곳이 다른 도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이나 도쿄와 요코하마의 사회적 거리도 가깝다는 것이겠죠.
요코하마는 도쿄의 외항(外港)입니다. 도쿄와 요코하마의 관계는 서울과 인천의 관계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요코하마의 규모는 인천을 월등히 뛰어넘습니다. 요코하마시의 인구는 370만 명. 요코하마시가 속한 가나가와현의 인구는 920만 명을 넘습니다.
이미 요코하마시의 인구는 오사카시보다 커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제2의 도시는 오사카가 아니라 요코하마인 셈이죠. 물론 일반적으로는 요코하마를 일본 수도권에 포함해 계산하지만요.
하지만 이런 거대한 도시 규모에 비해, 요코하마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습니다. 요코하마는 오랜 기간 작은 어촌에 불과했죠.
당시 도쿄의 외항 역할은 인근의 가나가와가 하고 있었죠. 지금은 요코하마가 가나가와현에 속해 있지만, 그때는 다른 도시였거든요. 게다가 애초에 도쿄는 바다에 접한 도시라 외항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에도에는 에도항, 지금의 도쿄항이 있었으니까요.
요코하마의 역사가 바뀐 것은 1858년이었습니다.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는 이미 개항한 하코다테와 함께 니가타, 고베, 나가사키, 그리고 가나가와를 개항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막부는 도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나가와 대신, 요코하마에 새로 항구를 지어 개항장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렇게 요코하마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양으로부터 다양한 문물이 수입되는 최전선이 되었죠. 일본에서 가스등이 처음 들어온 곳이 요코하마였고, 최초의 철도도 도쿄와 요코하마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요코하마는 에도와 가장 가까운 개항장이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외국인이 오갈 수밖에 없었죠. 무역과 외교를 위해 일본이 정착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습니다. 일본 최초의 신문도, 요코하마에서 외국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었죠.
당시 일본은 항구를 개항하면서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외국인이 항구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외국인이 에도 등 인근 대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 외국인과 일본인 사이 불필요한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은 항구 주변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무역이나, 서양과의 통역, 중개 등을 목적으로 넘어온 홍콩이나 광동 출신의 중국인들이 요코하마에는 많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요코하마에는 거대한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최대의 차이나타운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러고보면 거대한 차이나타운까지도 인천의 모습과 닮아 있네요.
물론 이 거대한 항구에 중국인들만 거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항구 주변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거주했죠.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벌어지고, 서양과의 조약이 개정되면서 외국인의 이동 제한은 해제되었습니다. 외국인도 이제는 일본 내륙의 도시에 마음대로 출입하며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인도 역시 이동 제한에서는 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대한 중국인 커뮤니티가 요코하마에 남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그만큼이나 오가는 사람도 물자도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관동대지진의 영향도 컸습니다. 지진으로 시가지가 파괴되자 대부분의 서양인은 떠났지만, 중국인은 요코하마에 남아 재건에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차츰 외국인 거리는 중국인 거리로 변해 갔죠.
요코하마와 홍콩, 상하이 사이에 정기 항로가 개설된 것도 차이나타운의 부흥에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청나라가 멸망하자 군벌의 쟁투에 빠진 중국 대륙에서 혼란을 피해 온 이들도 많았죠. 쑨원도 한동안 요코하마에서 망명했을 정도입니다.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차이나타운은 한동안 경색되었지만, 전쟁 이후 다시 부흥합니다. 중국 대륙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차이나타운은 홍콩이나 중화민국과 교류하며 성장해 나갔죠.
사실 지금이야 차이나타운의 의미가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요코하마 밖에도 수많은 중국계 이민자들이 나름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고 있을 테니까요.
배를 타는 시대가 아니니 항구의 의미도 작고, 이동이 쉬운 시대이니 굳이 가까운 곳에 자리할 필요도 없죠. 중국계뿐 아니라 수많은 곳에서 이민자가 들어오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는 이민자보다는 오히려 관광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이 도쿄 근교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여행을 다니며 조금 더 마음을 쓰게 된 것이 있다면,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가 남겨둔 흔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꼭 제가 지난 한 해를 외국인으로 살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민자를 포함해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온 나라들의 역사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요코하마처럼 근대가 만들어낸 항구 도시에는 언제나 이민자의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형태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언제나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요코하마에는 중국인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보다 먼저 개항한 하코다테에는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같은 일본 안에서도 차이는 이렇게나 크니, 다른 나라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여러 나라가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어떤 사회는 그 이민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민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가장 기저에서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민자의 존재를, 어떻게든 지워내려 합니다. 그 차이가 때로는 한 사회의 존망을 결정할 수도 있겠죠.
코로나19 범유행의 시대가 지나고, 세계는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온 세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그 사이에도 이민과 이주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죠.
지난해 연말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페루 앞에는 환한 등이 켜졌습니다. 화교 학교 옆의 관우 사당에는 향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코하마의 이민자들이 만든 짙은 흔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민자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어떤 흔적을 한국이라는 사회에 남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못하고, 끝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도쿄에는 그린벨트가 없어, 도심지가 끝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의 경계를 넘어왔지만, 이곳이 다른 도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이나 도쿄와 요코하마의 사회적 거리도 가깝다는 것이겠죠.
이미 요코하마시의 인구는 오사카시보다 커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제2의 도시는 오사카가 아니라 요코하마인 셈이죠. 물론 일반적으로는 요코하마를 일본 수도권에 포함해 계산하지만요.
▲ 요코하마 도심 ⓒ Widerstand
하지만 이런 거대한 도시 규모에 비해, 요코하마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습니다. 요코하마는 오랜 기간 작은 어촌에 불과했죠.
당시 도쿄의 외항 역할은 인근의 가나가와가 하고 있었죠. 지금은 요코하마가 가나가와현에 속해 있지만, 그때는 다른 도시였거든요. 게다가 애초에 도쿄는 바다에 접한 도시라 외항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에도에는 에도항, 지금의 도쿄항이 있었으니까요.
요코하마의 역사가 바뀐 것은 1858년이었습니다.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는 이미 개항한 하코다테와 함께 니가타, 고베, 나가사키, 그리고 가나가와를 개항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막부는 도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나가와 대신, 요코하마에 새로 항구를 지어 개항장으로 발전시킵니다.
▲ 요코하마의 바다 ⓒ Widerstand
그렇게 요코하마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양으로부터 다양한 문물이 수입되는 최전선이 되었죠. 일본에서 가스등이 처음 들어온 곳이 요코하마였고, 최초의 철도도 도쿄와 요코하마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요코하마는 에도와 가장 가까운 개항장이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외국인이 오갈 수밖에 없었죠. 무역과 외교를 위해 일본이 정착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습니다. 일본 최초의 신문도, 요코하마에서 외국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었죠.
당시 일본은 항구를 개항하면서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외국인이 항구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외국인이 에도 등 인근 대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 외국인과 일본인 사이 불필요한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은 항구 주변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무역이나, 서양과의 통역, 중개 등을 목적으로 넘어온 홍콩이나 광동 출신의 중국인들이 요코하마에는 많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요코하마에는 거대한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최대의 차이나타운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러고보면 거대한 차이나타운까지도 인천의 모습과 닮아 있네요.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 Widerstand
물론 이 거대한 항구에 중국인들만 거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항구 주변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거주했죠.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벌어지고, 서양과의 조약이 개정되면서 외국인의 이동 제한은 해제되었습니다. 외국인도 이제는 일본 내륙의 도시에 마음대로 출입하며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인도 역시 이동 제한에서는 해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대한 중국인 커뮤니티가 요코하마에 남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그만큼이나 오가는 사람도 물자도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관동대지진의 영향도 컸습니다. 지진으로 시가지가 파괴되자 대부분의 서양인은 떠났지만, 중국인은 요코하마에 남아 재건에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차츰 외국인 거리는 중국인 거리로 변해 갔죠.
요코하마와 홍콩, 상하이 사이에 정기 항로가 개설된 것도 차이나타운의 부흥에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청나라가 멸망하자 군벌의 쟁투에 빠진 중국 대륙에서 혼란을 피해 온 이들도 많았죠. 쑨원도 한동안 요코하마에서 망명했을 정도입니다.
▲ 관우 사당 ⓒ Widerstand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차이나타운은 한동안 경색되었지만, 전쟁 이후 다시 부흥합니다. 중국 대륙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차이나타운은 홍콩이나 중화민국과 교류하며 성장해 나갔죠.
사실 지금이야 차이나타운의 의미가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요코하마 밖에도 수많은 중국계 이민자들이 나름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고 있을 테니까요.
배를 타는 시대가 아니니 항구의 의미도 작고, 이동이 쉬운 시대이니 굳이 가까운 곳에 자리할 필요도 없죠. 중국계뿐 아니라 수많은 곳에서 이민자가 들어오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는 이민자보다는 오히려 관광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이 도쿄 근교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여행을 다니며 조금 더 마음을 쓰게 된 것이 있다면,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가 남겨둔 흔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꼭 제가 지난 한 해를 외국인으로 살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민자를 포함해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온 나라들의 역사에서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 요코하마 랜드마크 타워 ⓒ Widerstand
요코하마처럼 근대가 만들어낸 항구 도시에는 언제나 이민자의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형태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언제나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요코하마에는 중국인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보다 먼저 개항한 하코다테에는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같은 일본 안에서도 차이는 이렇게나 크니, 다른 나라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여러 나라가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어떤 사회는 그 이민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민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가장 기저에서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민자의 존재를, 어떻게든 지워내려 합니다. 그 차이가 때로는 한 사회의 존망을 결정할 수도 있겠죠.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 Widerstand
코로나19 범유행의 시대가 지나고, 세계는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온 세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그 사이에도 이민과 이주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죠.
지난해 연말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페루 앞에는 환한 등이 켜졌습니다. 화교 학교 옆의 관우 사당에는 향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코하마의 이민자들이 만든 짙은 흔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민자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어떤 흔적을 한국이라는 사회에 남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못하고, 끝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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