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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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이상적의 가계는 9대에 걸쳐 대대로 역관 집안이다.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하고 외가 역시 중국을 다녀온 역관 집안이다. 역관은 비록 중인 계급이지만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것이 직업이므로 능력이 있으면 여러 차례 사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일반 관료들이 평생 한 번 나가기 어려운 해외여행이었다.
제8차 연행 길인 1847년에는 연경의 유리창에서 국내 문인들과 청나라 문인들이 주고 받은 편지로 문집 <은송당집>을 간행할 정도로 교유의 범위가 넓었다. 당시 연경의 사절단은 외교는 물론, 문화와 정보의 공급처였다. 당시 청나라는 중흥기였으나 국세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1859년 제10차 연행에서 돌아와, '태평천국의 난'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는 넓은 교우관계를 통해 청나라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포착하고 조정에 보고 한 것이다.
경술년(1850) 선황(先皇)이 붕어하자 광동 서쪽 지역에서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바닷물이 평지에 솟구치며, 벌레와 모래가 먼지 속에 묻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록 황하 이북으로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지만 장강 남쪽에서는 아직도 횡행하여 고을의 성곽을 빼앗았다 잃었다 변화가 무쌍하여, 나라와 개인의 축적이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중략)
도적이 요사한 천주교의 터무니없는 말로 속여서, 나라가 망하기 충분합니다.(이상적, <견문사건>)
그의 역관활동이 누구에 못지않았지만, 후세에 길이 남을 일의 하나는 추사 김정희와 돈독한 사제 관계이다. 김정희는 55살이던 1840년(헌종 6) 엉뚱한 모함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를 흠모해 왔던 이상적은 중국을 다녀올 때마다 희귀한 서책을 구하여 유배지로 보냈다.
언제 풀릴지 기약없이 귀양살이 하는 추사는 제자가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한 두 차례가 아니었다. 제주에 유배온 지 4년차이던 1844년, 이상적은 청국인 하우경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평(皇朝經世文編))> 총 120권 76책을 보내왔다. 추사는 이듬해 <한도>를 제작했다. 제자에게 보내기 위해서다. 발문에 이렇게 썼다.
지난 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 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에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날이 차가워(歲寒)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은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귀중한 선물을 받은 제자는 답신을 썼다.
삼가 <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을 청할까 하옵니다.(유홍준, <김정희>)
이상적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을 들고 그해 10월 다시 동지사의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다. 저명한 중국 문인 16인의 제(題)와 찬(贊)을 받았다. 장악신의 찬이다.
평소에 절개를 굳게 가졌다가도 잠깐 새 변하는 수는 있으나, 절개를 평소에 굳게 가지지 못하고서도 잠깐 새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면 군자가 소나무를 배우는 뜻을 알 것이다.(…) 산속 바위 틈에서 늙어도 고독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대체로 장차 재목으로 길러 쓰이기를 기다리는 것이요. 목수에게 버림받아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장차 내 천진을 보전하여 옛 모습으로 마치자는 것이다.(앞의 책)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제자 김병학에게, 다시 평안도 감사를 지낸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가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츠카에게 넘어갔다.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자 손재형이 거액을 제시하면서 양도를 요청했으나 그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두 달 동안 통사정 끝에 양도를 받아 귀국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여서 그가 귀국한 지 석 달 쯤 지나 후지츠카의 서재가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하마터면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잿더미로 변할 뻔했다.
이상적·손재형과 함께 거액의 사례를 거절하면서 되돌려 준 일본인 후치즈카의 예술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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