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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때 떠나는 '글로리' 김영광의 아름다운 퇴장

6일 자신의 SNS 통해 공식적으로 은퇴 발표

등록|2024.01.07 11:09 수정|2024.01.07 11:09

500경기 출전 기록 세운 김영광 2020년 6월 7일 경기도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 1' 성남FC와 대구FC의 경기. 5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성남 김영광 골키퍼가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K리그 수문장의 전설 김영광이 정든 그라운드를 떠난다. 김영광은 지난 1월 6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이제 장갑을 벗기로 마음먹고 제2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라며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김영광은 "축구를 시작해서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거 같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돌아가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장갑을 벗더라도 후회가 절대 없다"고 고백했다.

김영광은 2000~201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2002년 전남드래곤즈에 입단, 프로에 데뷔하여 김영광은 울산 HD, 경남FC, 서울 이랜드, 성남FC를 거치며 오직 K리그에서만 선수생활을 보냈다.

골키퍼치고는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반사 신경과 위치 선정으로, 김영광은 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슈퍼 세이브를 선보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전성기의 김병지 이후 김영광만큼의 운동능력을 보여준 수문장은 드물었다.

성실한 자기관리로 자기 몫을 다했던 골키퍼

김영광은 2006년 전남의 FA컵 우승, 2012년 울산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우승멤버로 활약했다. 2011년 울산, 2018년 이랜드 유니폼을 입고 각각 K리그 1, 2에서 모두 베스트11에 선정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K리그 통산 기록은 605경기로 역시 골키퍼인 대선배 김병지(강원FC 대표이사, 706경기)에 이어 역대 최다 출전 2위 기록이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각급 연령대별 대표팀과 A대표팀을 모두 거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유소년 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단 이후, 2002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 2003년 U-20 월드컵 16강-2004년 아테네올림픽(U-23) 8강, 2006 도하 아시안게임 4위 등 출전한 모든 연령대별 국제대회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꼽혔던 독일의 수문장 올리버 칸에 빗대어 '리틀 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A대표팀에서는 운이 없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A매치 17경기 출장(15실점)에 그쳤다. 꿈의 무대인 월드컵(2006년 독일, 2010년 남아공)에도 두 번이나 승선했으나 본선에서는 한 번도 출장하지 못했다.

김영광의 선수시절 전반기에는 한국축구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불리우던 이운재라는 큰 산이 존재했다. 이운재가 은퇴할 무렵에는 2년 후배인 정성룡이 넘버원 자리를 꿰차며 만년 2인자에 머물러야 했다. 한 번 주전 자리가 굳어지면 쉽게 변동이 어려운 골키퍼 포지션의 특성상, 김영광은 최은성-김용대 등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능력에 비하여 대표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수문장으로 거론된다.

김영광이 주축으로 활약했던 세대 자체가 한국축구에서는 골짜기 세대로 불렸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세대,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 세대 사이에서 한국축구는 과도기를 겪던 시절이었고, 올림픽-월드컵-아시안게임 등 여러 국제무대에서 잇달아 어중간한 성적에 그치면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김영광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최종예선 전 경기 무실점과 8강 진출을 이끄는 등 일단 본인이 주전으로 나선 대회에서는 충분히 자기 몫을 다했던 골키퍼였다.

대표팀에서는 불운했지만 K리그에서는 성실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누구보다 장수했다. 2010년대 이후 기량이 하락세를 그리며 잦은 이적에 생애 처음 2부리그로 내려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프로 마지막 팀이 된 성남에서는 잔류부터 강등까지 파란만장한 역사를 공유하며 2020년 6월 프로통산 500경기 출전, 2023년 9월에는 600경기 출전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현역 마지막 시즌에도 김영광은 세월이 무색하게 무려 17경기나 출전하며 경쟁력을 증명했다.

또한 김영광이 팬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또다른 이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뛰어난 팬서비스 정신이었다. 강인하고 무뚝뚝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유망주 시절부터 팬들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친절한 반전매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호평이 자자했다. 경기가 끝나고 팬들에게 일일이 사진과 사인을 해주는 것은 물론, 축구 커뮤니티에서 닉네임을 공개하고 활동하며 팬들의 반응에 일일이 댓글을 달아준 일화도 유명하다.

물론 2007년 울산 시절 상대팀인 대전 관중들과의 충돌로 관중석에 물병을 투척했다가 퇴장 당한 대표적인 흑역사도 있었지만, 이후로는 경기장 안팎에서 어떤 구설수도 없었다. 선수생활동안 여러 팀을 옮겨다녔음에도 팬들의 평가에 있어서만큼은 항상 호평 일색이었다.

김영광의 가장 유명한 별명은 본인의 이름을 영어로 바꾼 '글로리'다. 김영광은 유니폼 뒤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을 한글식 표기 대신 영어 'GLORY'로 표기하면서 자신만의 또다른 별칭이자 아이덴티티로 삼았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처럼 김영광은 자신만의 '영광의 시대'를 개척하며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커리어를 남겼다.

사실 김영광은 원한다면 올시즌에도 선수생활을 좀 더 이어갈 수도 있었다. 김영광은 성남과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에도 몇몇 팀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음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김영광은 "찾아주는 곳이 있을 때 떠나는 게 나중에 안 좋은 모습으로 것보단 낫다고 생각이 들어서 수백 번, 수천 번 고민 끝에 장갑을 벗기로 했다"고 설명하며 은퇴를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김영광은 "그동안 응원과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팬분들과 가족들,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동료들과 지도자분들 그리고 몸담았었던 구단에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저의 제2의 인생도 많이 응원해 주시고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린다"고 작별인사를 전하며 인생의 또다른 출발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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