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인 당신이 미처 못 본, 또 다른 노동의 표정
[리뷰]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사람들... 만화가 박세가의 〈어름치〉
▲ <어름치> 표지 <어름치> 표지 ⓒ 송송책방
조금 늦었지만 만화가 박세가의 〈어름치〉(2021, 송송책방)를 읽었다. 이 작품은 2020년 2월 10일 첫 화를 시작으로 11월 16일까지 후기를 포함해 총 41화로 연재되었다. 웹툰 이후, 송송책방에서 500쪽 분량의 두꺼운 책으로도 출간되었으니 작가는 흡족하겠다. 하지만 이런 과정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이 텍스트가 막노동 현장의 삶을 만화의 형식으로 재현했다는 데 있다.
막노동은 말 그대로 '일용직'이다. 하루 일하고 일당을 받는다. 그렇지 않은 곳도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규칙이고 세계관이다.
그러나 떠돌이처럼 돌아다녀야만 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삶 역시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런 노동의 풍경을 통해 사람의 살결과 타인의 관계를 깊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면 글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위한 노동, 그 속에 쌓이는 정
20대의 젊은 청년 이화성은 생활비가 떨어져 단기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타일 모자이크 아르바이트를 강원도에서 시작하게 된다. 말이 타일 모자이크 작업이지 그에게 막노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멘트를 물에 겐 후, 주문받은 대로 커다란 조형물에 타일을 바르고 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의 화자인 이화성은 해볼 만했었는지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서울에서 강원도로 떠난다.
중요한 것은 이화성이라는 인물이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과정이다. 말 그대로 이런 일은 힘세고 튼튼한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작품에서는 이화성처럼 여러 인물이 모여든다. 작업반장인 오대산의 요청에 따라 이화성의 친구들이 오기도 하고, 다른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조건이 괜찮아 이곳 일을 찾게 된다. 강동원, 최대준, 박형근, 김범수, 김태봉, 황금봉 등의 인물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곳에 밀려온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로 돈을 모으기 위해 몸을 움직인 것뿐이다. 그러니 빛을 보고 몰려든 오징어 떼처럼 노동자들은 작업이 끝나면 모두 흩어질 것이다.
독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과정을 탐닉하는 것은 의미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든 일꾼들이 만나고 정을 쌓고 헤어지는 과정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만화가 또한 이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책의 제목은 민물고기 '어름치'를 뜻한다. 여기서 연고도 인연도 없이 일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어름치를 모델로 만든 물고기 카페 건물 타일 작업이 끝나면 헤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 달가량 매일 함께 땀 흘리며 먹고 자고 일했던 동료를 떠나보내기가 어디 쉽겠는가. 쉬울 수도 있지만 쌓인 정을 생각한다면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6년)처럼 짧지만 강렬했던 흔적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타일 노동자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떠나게 될 때, 냉정하게 뒤돌아서지 못한다.
짠한 유머
▲ <어름치> 33화 <어름치> 33화 ⓒ 송송책방
지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는 40대 김태봉은 아들 병간호로 인해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른 현장에서 또 만날 수 있겠죠"(424쪽)라는 짠한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진다. 다른 일터에서 일하기 좋은 조건으로 황금봉에게 제안이 왔을 때, 일용직 노동 경험이 많아 요령을 피우던 그였지만, "일단 여기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보고요. 가더라도 끝내고 가면 좋으니까"(443)라는 말을 통해 남은 동료를 생각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형, 아쉽네요. 이제 정들었는데..."(431)라는 목소리처럼 이들은 정드는 것과는 무관하게 먹고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만화가 시작될 무렵 늘어나는 카카오톡 단톡방이, 시간이 지나자 점차 줄어드는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박세가 만화의 〈어름치〉를 통해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정을 쌓으면 쌓을수록 뒤돌아서야 하는 무게가 무거웠던 탓이다.
나아가 박세가 만화가의 〈어름치〉에서 특유의 유머도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 중에 하나다. 하지만 만나고 헤어지는 일용직 노동자의 섭섭하면서도 아쉬운 정서로 인해 그의 유머는 뭔가 짠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또 일용직 노동 현장을 소재로 이야기가 그려졌기 때문에 현장 일터에서만 쓰는 용어를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다. 가령, '이시바(공사현장에서 쓰는 발판)', '화이바(안전모)', '줄눈(타일 사이의 빈틈)', '야리까리(오늘 할 분량을 채우고 바로 퇴근하는 것)' 등과 같은 단어가 이에 해당된다.
이는 한 만화가의 시선을 통해 일용직 공사장의 현장을 간접 경험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만큼 이곳의 현장 일이 억세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근무일지>(2023, 창비)을 쓴 막노동 노동자 이용훈 시인은 「당신의 외국어」라는 작품에서 "말귀만 알아먹어도 끼니 걱정 안 한다고 해서 돌고 돌았더니, 공사장서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구르고 굴러야 하는 삶은, 돈을 벌기 위해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는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 <어름치> 40화 마지막 화 <어름치> 40화 마지막 화 ⓒ 송송책방
그런 삶이 애달팠는지 이용훈 시인의 시에는 유머가 없다. 하지만 〈어름치〉에서는 이런 삶이 유머의 형식으로 놓이게 된다. 그의 작품에 유머가 맴도는 이유는 그 또한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업으로 삼고 이 작업을 계속해서 반복했었다면 유머는 이용훈 시인처럼 희석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노가다 현장에 잠시 들렀렀다 한들, 이 감정도 귀중한 것이지 않을까. 박세가의 〈어름치〉는 현 시대의 여러 노동의 표정 중에 하나를 그려 놓았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스치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현재진행형인 노동의 표정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글이 공유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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