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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제목을 못 뽑겠다'

[제목의 이해] 믿을 것은 오로지 글과 독자

등록|2024.01.25 16:44 수정|2024.01.25 16:44
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 글쓰기란 혼자 또 함께 걷는 길이다. ⓒ 픽사베이


시민기자가 쓴 '글쓰기란 혼자 또 함께 걷는 길이다'라는 제목을 '나는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로 고치면서 내 안의 고정관념이 바사삭 깨지는 걸 느꼈다. 이명도 아닌데 귀 한쪽 어딘가에서 삐~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내가 이런 증상을 느낀 데는 그만한 속사정이 있다.

2년 전 여름부터 그 해를 넘기기까지 '혼자 쓰는 법'이란 주제로 스무 편 정도의 글을 혼자 썼다. 혼자 글 쓰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글이었는데, 그 글을 쓰는 동안 '혼자'라는 프레임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혼자 쓰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지? 혼자 글을 쓰면 어떤 어려움에 처하지? 혼자 쓰기 어려울 때 내가 시도했던 방법은 뭐였지?

아이디어를 모으는데 '혼자'가 빠지면 뭔가 어색했다. '혼자'만 생각하다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기분이었다. 계속 쓰기가 힘들었다.

제목이 기대는 곳

그런데 나처럼 혼자 글을 쓰면서도 이분은 '나는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어째서지? 그의 말인즉 이렇다. 글을 쓰는 건 분명 혼자의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홀로인 적은 없었다고.
 
"홀로 쓰는 당신에게, 내 글에 의심이 들고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글 쓰는 타인을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쓰기는 혼자 하는 일이 맞지만 글로 향하는 길은 같이 걸을수록 풍성해지는 법. 누군가의 문장이 나를 쓰도록 움직였으니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

혼자 쓰는 방에서 나와 글쓰기 모임을 통해 더 풍성해진 삶에 대해 쓴 글이었다. 충분히 수긍이 간다 싶으면서도 '나는 어떤가?' 자문하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홀로만 썼을까. 내가 쓴 수많은 글을 정말 나 혼자 썼다고 할 수 있을까. 나 혹은 내 글을 둘러싼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나는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는 문장 앞에서 나를 비춰보니 나 역시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 내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 경험한 일을 풀어낸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을 가만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결코 나만 있지 않았다.

한 회사에서 동료들과 오래 편집 일을 해서 쓸 수 있었고(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누군가의 문장을 읽고 썼고(쓰라고 보는 책), 제목에 대해 알려달라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 또 이런 글을 쓰고 있다(제목의 이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라 쓰고, 나를 잘 돌보기 위해 썼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기 위해. 누구도 해주지 않는 말을 나에게 해주고 싶어서 쓰고, 독자의 반응에 힘입어 쓰기도 했다.

소진된 마음을 음악과 책으로, 사람과의 만남으로 채우면서 썼다. 비워졌나 싶으면 채워졌고, 채워졌나 싶으면 다시 비워지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씀으로써 글은 묵묵히 쌓여갔다. 방황하는 시간에도 글은 남아서 나를 지켜줬다.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돌아보니 이 모두가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일들. 그러니 굳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오래된 수식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도 홀로 쓴 적이 없는 셈이다.

제목도 보면 그렇다. 얼핏 보면 제목 혼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맥락들이 본문에 있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나도 글쓴이의 문장에 기대어 제목을 뽑고 있었다.

제목을 뽑은 일은 고민의 구역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 구역을 자의적으로 넘어서면 탈이 나기도 하니 어떻게든 그 범위 안에서 지지고 볶아야 했다. 훌륭한 배우는 현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비슷한 차원에서 글 안에서 어떻게든 좋은 제목을,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나도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믿을 것은 글뿐.

뾰족한 한 문장을 짓기 위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단어와 단어 사이를 찾아 헤매고 글쓴이의 문장에 기대어 제목을 뽑는다. 제목 뽑는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한들 그나마 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기댈 수 있는 문장이 어딘가에는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수히 많은 사람 속에서도 '소중한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것처럼, 제목으로 쓸 만한 것이 본문에 반드시 있다는 믿음.

가끔은 그 믿음이 독자를 향할 때도 있다. 의도한 제목 한 문장을 독자가 잘 받아들여 주시겠지라는 믿음으로, 독자를 상상하며 발화하는 제목도 있다. 결국 글 쓰는 일뿐만 아니라 제목을 뽑은 나의 일도 글과 독자에 기대어 있는 셈이었다.

뒷배가 생긴 기분
 

▲ 드라마 <연인>의 한 장면.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작품이다. ⓒ MBC


배우 남궁민이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드라마 <연인> 명장면을 설명하면서 "정말 밉군"이라는 대사를 집에서 아무리 연습을 해도 어떻게 느낌을 살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고. 그런데 실제 촬영 날, 당시 길채를 연기한 안은진 배우의 눈빛을 보는 순간 연기가 자연스럽게 풀렸다면서 공을 상대에게 돌렸다.

남궁민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본인의 노력이 아니라(물론 노력도 있었겠지만) 상대 배우의 감정에 기대어 나올 수 있었던 장면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안은진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대배우든, 이제 시작인 배우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감정에 기대어 가는 순간이 있다는 게 나에게도 좋은 영감이 되었다. 이렇게 글로 옮겨 적어둘 만큼.

'나는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는 문장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혼자 쓴다'고 생각할 때랑 뭔가 다른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다. 글을 쓰는 나도, 제목을 짓는 나도 어딘가에, 누군가에 기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든든한 뒷배라도 생긴 듯한 기분이다. 앞으로는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아지더라도 쓰는 일이 그렇게 막막하지만은 않을 것 같고.

끝으로 고백건대 내가 꼽은 드라마 <연인>의 명장면은 바로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이라고 묻는 안은진의 말에 남궁민이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까"라며 안아주는 신이다.

현실에서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적도 없는 나지만 뭔가 지치고 고단한 일상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대사였달까. 길채뿐만 아니라 나까지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재미 삼아 이런 대사들도 막 상상되고.

"눈이 와서 약속 시간에 지각한 나는?"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까."

"밥하기 싫었지만 배달 음식은 더 싫어서 그냥 집밥 먹은 나는?"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까."

"매일 글쓰기 작심삼일을 못 넘기는 나는?"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까."

"늘 반듯한 이야기만 해서 어쩌면 지루했을 독자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나는?"
"안아줘야지, 힘들었을 테니까."


글을 보내는 분들이 가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제목을 못 뽑겠다. 제목을 부탁한다'는 메모를 남겨둘 때가 있다. 그것 역시 혼자 고민하기는 힘드니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그럴 때는 나도 어깨를 빌려드리는 심정으로 원고를 꼼꼼히 읽는다.

물론 가끔은 그런 말이 부담되기도 하고, 제목을 잘 뽑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도 글쓴이가 이렇게라도 당부하는 것은, 내가 편집기자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게 내 일이니 정성껏 제목을 지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을 수밖에. 그 제목 별로라고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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