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고된 작업으로 탄생한 사찰 정원
수행자와 정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할배친구 정원사에게서 러브콜을 받았다. 자기 일도 좀 도와 달라는 거다. 할배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할배는 일거리가 많지 않다. 체력이 약한데다 일 욕심도 별로 없어서 그저 단골고객이나 관리하는 정도다. 그런 연유로 아는 사람들에게 내 부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짐작일 뿐 할배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경험도 괜찮다. 여러 종류의 정원사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일 솜씨를 접할 기회다. 이러다가 전지가위 하나 들고 일본 정원을 유랑하는 떠돌이 정원사라도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정원손질 시즌이라서 그런 거다. 요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온 동네 정원사들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할배친구 정원사는 옆 동네 요시이(吉井)에 산다. 그는 할배와 같이 일하러 다니는 동업자이기도 하다. 평소 할배집에 자주 놀러오는 편이어서 종종 본다. 물론 얘기도 나눠봤다. 문제는 이 양반이 사투리가 심한데다 말이 엄청 빠르다는 것.
말이 빠르다는 건 성격이 급하다는 증거다. 그는 내가 이웃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특수 사정을 전혀 살피지 못한다. 기총소사하듯 사투리로 자기 말을 쏟아내면 끝이다. 해석은 온전히 이쪽 책임. 어쩌라고? 의사소통 요주의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발음까지 두루뭉실하다. 앞뒤 정황으로 상대방 의사를 감지해야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끔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 자동적으로 청취 경계경보가 발령된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귀를 쫑긋하고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한다.
잘 듣지 않으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대화중에 난데슷데?(뭐라고요?)가 자주 등장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면 서로 불편해진다. 그 입으로 다시 설명한다고 뭐가 나아지나? 그 나물에 그 밥인 걸? 그런 적 여러 번 있다. 그래도 소용없다. 고쳐지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에다 몸에 배인 사투리를 어쩌겠나.
그래도 큐슈지역은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일부 나이든 사람에게서 추임새처럼 등장하는 밧덴(~지만)같은 몇 가지 말만 대충 때려잡으면 알아 먹을 만하다. 같은 일본인도 통역을 해야 알 수 있다는 아오모리 지역의 츠가루벤같은 역대급 사투리도 있다니 요시이 할배 정도면 그나마 다행인 게다.
급한 성격이 드러나는건 말 뿐 아니다. 행동으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밖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다짜고짜 자기 경트럭 차문을 열고 얼른 타란다. 엉거주춤 따라가 보면 음식을 조리해서 파는 동네 맛집이다. 이것 저것 주섬주섬 한 봉지를 담는다. 물론 내 의사같은 건 안중에 없다. 맛있는 거라며 저녁에 먹으라고 내민다. 대개 이런 식이다.
요시이 할배는 사연이 많은 양반이다. 누구든 그 나이쯤 되면 긴 인생에 서리서리 얽힌 사연같은 게 없겠냐고? 이건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풀어 놓으면 소설책 몇 권 분량이 나옴직한 초대형 블록버스터급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다.
그는 젊어서 정원수 사업을 크게 했다. 거래규모가 수억 원을 훌쩍 넘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40년 전 수억 원의 거래규모면 어지간한 중견기업 수준이다. 많이 벌면 많이 쓰기 마련인가. 일 끝나면 호기롭게 택시를 불렀다. 1시간 반도 넘게 걸리는 후쿠오카까지 술 마시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전국이 정원 붐에 들떠있던 시절이었다. 이 동네가 잘 나가던 반세기 전 이야기다. 이쪽 지역은 일본내 묘목생산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정원산업이 불경기여서 확보해놓은 묘목밭들이 묵어서 밀림을 이루고 있다. 묘목은 시기에 맞춰 출하하지 못하면 제멋대로 자라 쓸모가 없다.
부자가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던가. 아무리 불경기라해도 기존 정원의 유지보수는 필요하다. 집집마다 정원이 있으니 정원 관리만 해도 일거리 규모가 크다. 항상 기본적인 정원 일거리 수요는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동네 정원사들이 먹고 산다.
동네 부자 요시이 할배는 점점 씀씀이가 헤퍼졌다. 경마와 경륜에도 손을 댔다. 처음에는 친구 따라 심심풀이로 시작했을 것이다. 급기야 비축해 놓은 노후 자금까지 손을 댔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내리막이다. 날린 돈 회복해 보겠다고 판돈을 키우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든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정원수 경기가 곤두박질 칠 즈음 그의 삶도 바닥을 쳤다. 가산을 탕진하면 돈만 없어지는 게 아니다. 주변에 남아 있을 사람도 없다. 이혼을 당하고 가족들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삶은 정원수의 흥망과 더불어 극심한 롤러코스터를 탔다.
지난해 여름에는 그동안 혼자살던 요시이 집까지 수해를 당했다. 큰물이 들어 안방까지 뻘흙이 지천이다. 엄두가 나지않아 복구를 포기했다. 그는 옆 동네에 월셋방을 얻어놓고 정원사 일을 하며 산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면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일이다. 일이 끝나면 DVD대여점에 들른다. 그는 지나간 드라마를 틀어놓고 혼자서 편의점 도시락을 까 먹으며 산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의 삶이 삐딱선을 타고 있을 때 누군가 적극적으로 말렸더라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가족이나 지인들이 몰락하는 그의 삶을 보면서 방관만 했겠는가.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막대한 수입이 생기면서 이미 정해진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일생을 바람직하게만 살 수 있나. 나는 잘잘못을 떠나 요시이 할배에게서 풍기는 거친 날것의 냄새를 좋아한다. 천장과 바닥을 가볍게 찍었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듣고 있노라면 삶의 진한 여운이 묵직하게 올라온다. 쿠마사부처럼 단조롭게 바른 길만 걸어온 범생이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요즘 요시이 할배는 동생과 팀이 되어 일한다. 동생인들 그를 곱게만 보겠는가. 저간의 사정을 알면 물어보지 않아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이니 내치치 못하고 어쩔수 없이 봐주는 정도라는 걸. 일터에서는 오가는 말이 거의 없다. 각자 묵묵히 자기 일만 한다. 요시이 할배가 연장자니 팀의 매니저다. 함께 정원도 손질하면서 일감도 구해오고 정원주와 계산을 하는 등 전체를 총괄한다.
동생은 정원사 13년차다. 말하자면 이 팀의 메인 정원사다. 그의 나무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건물 3층 높이와 맞먹는 마키나무에도 맨 몸으로 훌쩍 오른다. 벨트 하나에 의지한 채 가지를 만들어 올라가는 그를 보면 거의 달인 정원사의 경지다.
내가 맡은 일은 뒷정리다. 나는 정원사들이 잘라놓은 가지를 할배 경트럭에 옮겨놓고 청소를 한다. 청소는 정원사의 일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정원 손질의 기본은 청소라는 게 쿠마사부의 정원작업 지론이었다. 언젠가 일본 정원협회장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문장 안에서 내내 강조한 것도 청소의 중요함이었다.
아무리 청소가 중요한 일이라 해도 그렇지. 이 몸은 지역 톱 클라스인 쿠마사부의 속성 정원사 과정을 마친 1번 제자아니던가. 바리캉만 쥐어줬다 하면 정원을 날아다니는 가리코미 기능공에게 정원 뒷정리 막일만 시키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그건 아니다. 원래 청소부터 차곡차곡 시작했어야 정원사의 삶이 순조로운 법이었다. 첫날부터 작업현장에서 바리캉을 맡기는 파격적 초고속 승진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강제졸업을 당하는 초대형 삑사리가 난거다. 소년등과(젊어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 패가망신이라 하지 않던가. 옛말치고 그른 말 없다.
오늘 작업하는 곳은 료덕사라고 하는 사찰 정원이다. 일본의 사찰 정원은 가레산스이로 유명한 절이 많다보니 삭막한 모래 정원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말쑥하게 잘 다듬어 놓은 보통 정원이 기본이다. 처음 정원을 배울 때 쿠마사부가 모델로 삼으라던 곳이 사찰 정원이었다.
사찰 정원이 왜 일본 정원의 모델인가. 전통적으로 사찰에서는 고된 정원 손질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사찰 정원은 자연의 법문을 전하는 또 하나의 사찰로 중시돼 온 거다. 그러니 수행자와 정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거다. 그리하여 사찰 정원은 수행자의 고된 수행으로 탄생시킨 명작 정원이 된 거다.
정원에서 복수의 돌을 조합하는 것을 이시구미(石組)라 하는데 3개의 돌을 세워 불교의 삼존석을 표현한기도 한다. 가운데 큰 돌로 주불(부처)을 표현하고 양쪽 작은 돌은 보살을 의미한다. 정원이 사찰이 되는 과정에 얽힌 또 하나의 스토리다.
우리가 손질중인 료덕사 정원은 사찰 앞쪽의 외정원과 뒷편의 내정원으로 분리돼 있다. 오늘 정리하는 곳은 내정원이다. 외정원은 신도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어쩔 수없이 자주 손질을 해야 하지만 내정원은 수행자들의 공간이다. 노출되지 않으니 소홀해지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손질한 지 오래되어 나무들이 대부분 함부로 웃자라 있다. 적어도 3~4년은 방치한 흔적이 역력하다. 코로나 여파일 것이다. 모든 정원의 모습은 정원주의 호주머니 사정을 반영한다. 정원 손질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 정원이든 사찰 정원이든 마찬가지다.
손질을 하지 않아 거칠게 자란 나무는 손질해도 거칠다. 정원수는 제때 손질해 주지 않으면 수형이 흐트러진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걸 말끔한 정원으로 바꿔 주려면 시간이 걸린다. 섬세한 손질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이 제 모습을 갖추는 첫 걸음을 오늘 다시 시작했다.
정원이란 정제된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만큼이나 인위적으로 만든 자연에 대한 동경심도 가지고 있다. 그게 정원의 시작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원 손질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해야 하는 불교의 수행과 많이 닮았다. 승려였던 무소 소세키가 일본정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는 사실이 자연스런 이유다.
이런 경험도 괜찮다. 여러 종류의 정원사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일 솜씨를 접할 기회다. 이러다가 전지가위 하나 들고 일본 정원을 유랑하는 떠돌이 정원사라도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정원손질 시즌이라서 그런 거다. 요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온 동네 정원사들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 손질을 하지 않아 거칠게 자란 나무는 손질해도 거칠다. 정원수는 제때 손질해 주지 않으면 수형이 흐트러진다. ⓒ 유신준
말이 빠르다는 건 성격이 급하다는 증거다. 그는 내가 이웃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특수 사정을 전혀 살피지 못한다. 기총소사하듯 사투리로 자기 말을 쏟아내면 끝이다. 해석은 온전히 이쪽 책임. 어쩌라고? 의사소통 요주의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발음까지 두루뭉실하다. 앞뒤 정황으로 상대방 의사를 감지해야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끔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 자동적으로 청취 경계경보가 발령된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귀를 쫑긋하고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한다.
잘 듣지 않으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대화중에 난데슷데?(뭐라고요?)가 자주 등장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면 서로 불편해진다. 그 입으로 다시 설명한다고 뭐가 나아지나? 그 나물에 그 밥인 걸? 그런 적 여러 번 있다. 그래도 소용없다. 고쳐지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에다 몸에 배인 사투리를 어쩌겠나.
그래도 큐슈지역은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일부 나이든 사람에게서 추임새처럼 등장하는 밧덴(~지만)같은 몇 가지 말만 대충 때려잡으면 알아 먹을 만하다. 같은 일본인도 통역을 해야 알 수 있다는 아오모리 지역의 츠가루벤같은 역대급 사투리도 있다니 요시이 할배 정도면 그나마 다행인 게다.
급한 성격이 드러나는건 말 뿐 아니다. 행동으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밖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다짜고짜 자기 경트럭 차문을 열고 얼른 타란다. 엉거주춤 따라가 보면 음식을 조리해서 파는 동네 맛집이다. 이것 저것 주섬주섬 한 봉지를 담는다. 물론 내 의사같은 건 안중에 없다. 맛있는 거라며 저녁에 먹으라고 내민다. 대개 이런 식이다.
요시이 할배는 사연이 많은 양반이다. 누구든 그 나이쯤 되면 긴 인생에 서리서리 얽힌 사연같은 게 없겠냐고? 이건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풀어 놓으면 소설책 몇 권 분량이 나옴직한 초대형 블록버스터급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다.
▲ 건물 3층 높이와 맞먹는 마키나무에도 맨 몸으로 훌쩍 오른다. ⓒ 유신준
그는 젊어서 정원수 사업을 크게 했다. 거래규모가 수억 원을 훌쩍 넘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40년 전 수억 원의 거래규모면 어지간한 중견기업 수준이다. 많이 벌면 많이 쓰기 마련인가. 일 끝나면 호기롭게 택시를 불렀다. 1시간 반도 넘게 걸리는 후쿠오카까지 술 마시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전국이 정원 붐에 들떠있던 시절이었다. 이 동네가 잘 나가던 반세기 전 이야기다. 이쪽 지역은 일본내 묘목생산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정원산업이 불경기여서 확보해놓은 묘목밭들이 묵어서 밀림을 이루고 있다. 묘목은 시기에 맞춰 출하하지 못하면 제멋대로 자라 쓸모가 없다.
부자가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던가. 아무리 불경기라해도 기존 정원의 유지보수는 필요하다. 집집마다 정원이 있으니 정원 관리만 해도 일거리 규모가 크다. 항상 기본적인 정원 일거리 수요는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동네 정원사들이 먹고 산다.
동네 부자 요시이 할배는 점점 씀씀이가 헤퍼졌다. 경마와 경륜에도 손을 댔다. 처음에는 친구 따라 심심풀이로 시작했을 것이다. 급기야 비축해 놓은 노후 자금까지 손을 댔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내리막이다. 날린 돈 회복해 보겠다고 판돈을 키우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든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정원수 경기가 곤두박질 칠 즈음 그의 삶도 바닥을 쳤다. 가산을 탕진하면 돈만 없어지는 게 아니다. 주변에 남아 있을 사람도 없다. 이혼을 당하고 가족들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삶은 정원수의 흥망과 더불어 극심한 롤러코스터를 탔다.
지난해 여름에는 그동안 혼자살던 요시이 집까지 수해를 당했다. 큰물이 들어 안방까지 뻘흙이 지천이다. 엄두가 나지않아 복구를 포기했다. 그는 옆 동네에 월셋방을 얻어놓고 정원사 일을 하며 산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면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일이다. 일이 끝나면 DVD대여점에 들른다. 그는 지나간 드라마를 틀어놓고 혼자서 편의점 도시락을 까 먹으며 산다.
▲ 료덕사 정원은 사찰 앞쪽의 외정원과 뒷편의 내정원으로 분리돼 있다. ⓒ 구글 캡쳐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의 삶이 삐딱선을 타고 있을 때 누군가 적극적으로 말렸더라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가족이나 지인들이 몰락하는 그의 삶을 보면서 방관만 했겠는가.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막대한 수입이 생기면서 이미 정해진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일생을 바람직하게만 살 수 있나. 나는 잘잘못을 떠나 요시이 할배에게서 풍기는 거친 날것의 냄새를 좋아한다. 천장과 바닥을 가볍게 찍었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듣고 있노라면 삶의 진한 여운이 묵직하게 올라온다. 쿠마사부처럼 단조롭게 바른 길만 걸어온 범생이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요즘 요시이 할배는 동생과 팀이 되어 일한다. 동생인들 그를 곱게만 보겠는가. 저간의 사정을 알면 물어보지 않아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이니 내치치 못하고 어쩔수 없이 봐주는 정도라는 걸. 일터에서는 오가는 말이 거의 없다. 각자 묵묵히 자기 일만 한다. 요시이 할배가 연장자니 팀의 매니저다. 함께 정원도 손질하면서 일감도 구해오고 정원주와 계산을 하는 등 전체를 총괄한다.
동생은 정원사 13년차다. 말하자면 이 팀의 메인 정원사다. 그의 나무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건물 3층 높이와 맞먹는 마키나무에도 맨 몸으로 훌쩍 오른다. 벨트 하나에 의지한 채 가지를 만들어 올라가는 그를 보면 거의 달인 정원사의 경지다.
내가 맡은 일은 뒷정리다. 나는 정원사들이 잘라놓은 가지를 할배 경트럭에 옮겨놓고 청소를 한다. 청소는 정원사의 일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정원 손질의 기본은 청소라는 게 쿠마사부의 정원작업 지론이었다. 언젠가 일본 정원협회장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문장 안에서 내내 강조한 것도 청소의 중요함이었다.
아무리 청소가 중요한 일이라 해도 그렇지. 이 몸은 지역 톱 클라스인 쿠마사부의 속성 정원사 과정을 마친 1번 제자아니던가. 바리캉만 쥐어줬다 하면 정원을 날아다니는 가리코미 기능공에게 정원 뒷정리 막일만 시키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그건 아니다. 원래 청소부터 차곡차곡 시작했어야 정원사의 삶이 순조로운 법이었다. 첫날부터 작업현장에서 바리캉을 맡기는 파격적 초고속 승진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강제졸업을 당하는 초대형 삑사리가 난거다. 소년등과(젊어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 패가망신이라 하지 않던가. 옛말치고 그른 말 없다.
▲ 청소는 정원사의 일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 유신준
오늘 작업하는 곳은 료덕사라고 하는 사찰 정원이다. 일본의 사찰 정원은 가레산스이로 유명한 절이 많다보니 삭막한 모래 정원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말쑥하게 잘 다듬어 놓은 보통 정원이 기본이다. 처음 정원을 배울 때 쿠마사부가 모델로 삼으라던 곳이 사찰 정원이었다.
사찰 정원이 왜 일본 정원의 모델인가. 전통적으로 사찰에서는 고된 정원 손질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사찰 정원은 자연의 법문을 전하는 또 하나의 사찰로 중시돼 온 거다. 그러니 수행자와 정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거다. 그리하여 사찰 정원은 수행자의 고된 수행으로 탄생시킨 명작 정원이 된 거다.
정원에서 복수의 돌을 조합하는 것을 이시구미(石組)라 하는데 3개의 돌을 세워 불교의 삼존석을 표현한기도 한다. 가운데 큰 돌로 주불(부처)을 표현하고 양쪽 작은 돌은 보살을 의미한다. 정원이 사찰이 되는 과정에 얽힌 또 하나의 스토리다.
우리가 손질중인 료덕사 정원은 사찰 앞쪽의 외정원과 뒷편의 내정원으로 분리돼 있다. 오늘 정리하는 곳은 내정원이다. 외정원은 신도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어쩔 수없이 자주 손질을 해야 하지만 내정원은 수행자들의 공간이다. 노출되지 않으니 소홀해지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손질한 지 오래되어 나무들이 대부분 함부로 웃자라 있다. 적어도 3~4년은 방치한 흔적이 역력하다. 코로나 여파일 것이다. 모든 정원의 모습은 정원주의 호주머니 사정을 반영한다. 정원 손질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 정원이든 사찰 정원이든 마찬가지다.
손질을 하지 않아 거칠게 자란 나무는 손질해도 거칠다. 정원수는 제때 손질해 주지 않으면 수형이 흐트러진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걸 말끔한 정원으로 바꿔 주려면 시간이 걸린다. 섬세한 손질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이 제 모습을 갖추는 첫 걸음을 오늘 다시 시작했다.
정원이란 정제된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만큼이나 인위적으로 만든 자연에 대한 동경심도 가지고 있다. 그게 정원의 시작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원 손질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해야 하는 불교의 수행과 많이 닮았다. 승려였던 무소 소세키가 일본정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는 사실이 자연스런 이유다.
덧붙이는 글
내 블로그 일본정원 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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