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양심을 지킨 판사 유병진
[겨레의 인물 100선 77] "야만의 시대에 양식의 위치는 협소하고 위태롭다"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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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 1958년 재판정에 선 진보당 당수 조봉암. ⓒ 자료사진
우리나라에서 법조인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검사 출신 윤석열 집권 이후 더 심해진 것 같다. 검찰국가란 말이 공감을 얻고 있다. 예전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유행했는데 요즘은 '유검무죄 무검유죄'로 돈이 검찰로 바뀌었다. 친일법조인에 대한 미청산, 이승만 이래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 이명박근혜 정권기의 사법농단 등이 켜켜이 쌓이고 이어져 오늘 검찰국가 시대에 이른 것이다.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58년 4월 서울대신문 필화사건(유근일)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등 드물게 법관의 양식을 지키는 판결을 하여 법조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야만의 시대에 양식의 위치는 협소하고 위태롭다.
1958년 진보당 사건이 발발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자는 죽음(죽임)이 따랐다. 제헌의원 선거 당시 동대문 선거구에서 이승만과 대결하려 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6ㆍ25 때 처형되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던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되었다. 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병사하고, 현직 부통령 장면은 이승만 수하들이 총을 쐈지만 죽지 않았다. 다음은 조봉암의 차례였다.
조봉암은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도전하고 제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정권에 위협적인 인물로 등장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정부 조각 때에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던 사람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법정에 세웠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는 이유를 댔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적제거였다.
용공의 너울을 씌워 투옥하고 더러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승만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독립운동가이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사람을 용공으로 몰아갔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지법 형사3부의 유병진 부장판사 등은 처음부터 이 사건이 정적 제거를 위한 이 정권의 정치적 음모라고 보고, 3개월에 걸쳐 사건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공판을 진행해나갔다.
58년 6월14일 검찰은 조봉암 피고인에게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고, 윤길중 무기징역, 김달호ㆍ박기출 징역 10년 등을 구형했다. 7월 2일 유 부장판사는 선고공판에서 조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만을 적용,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당원 명부를 숨긴 전세룡 조직부 간사에게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을 뿐 나머지 진보당 간부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최병선, <법의 정신을 심다>, [발굴 한국현대사인물①])
유병진은 이 사건이 이승만의 정적제거용이라고 판단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같은 생각이었다. 올곧게 살아온 그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각고 끝에 작성한 판결문을 2시간에 걸쳐 읽어 내려갔다.
무죄 이유로서는, 진보당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순전한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 사회적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민주공화체나 주권재민을 부인하고 국가기관에 대한 강압수단을 수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추상적인 평화통일 주장이 국헌에 위배되는 경우는 북한 괴뢰집단이 대한민국을 변란하기 위하여 책정한 평화통일 방안에 야합하여 주장하는 경우이고, 구체적인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는 것이 국헌에 위배되는 여부는 그 방안의 실현이 헌법이나 법률의 절차를 취하여 실행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할 문제라고 볼 것인데, 진보당이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결정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 진보당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의 내용은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통일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파괴한 책임이 6.25의 죄책을 범한 북한 공산집단에게 있다고 단정하고 그들의 반성과 책임규명이 평화통일의 선행조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으로서 북한의 주장과는 다르게 보인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선거공판 3일 후부터 5천여 명의 시위대가 법원청사로 몰려와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피켓을 들고 난동을 벌였다. 자칭 반공청년대원이라는 동원된 정치 깡패들이었다. 검찰과 경찰은 지켜 볼 뿐이었다. 유병진은 극심한 시달림을 받았고, 연말의 법관연임에서 탈락하는 보복이 뒤따랐다. 판사직을 떠난 그는 변호사를 개업, 인권 변론에 나섰다. 4.19 후 가진 인터뷰 요지다.
△ 1심에서 조봉암 피고인에게 선고한 징역 5년은 너무 무거운 것은 아니었나?
=>그쯤하여 두면 상소심에서 적당한 판결이 내려질 줄로 믿었다.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조씨를 제거하려고 간첩으로 몰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고한 5년형이라는 것도 마음 아픈 판결이었음은 당시나 지금이나 장래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간첩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양명산이가 조씨에게 주었다는 돈이 아무리 증거를 살펴보더라도 이북 괴뢰에게서 보내온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일전에 서울형무소에서 진보당사건 담당 조인구 검사(4.19 직후 수감 중)를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그때 좋은 판결을 하여 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봐 조씨 역시 그 기소가 무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여, 보이지도 않는 교수대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법률 까닭에 죄 없이 죽은 조봉암씨의 원혼을 끝없이 위로하였다.(<법정신문>, 1900년 6월 14일자)
횡포한 독재권력에 의롭게 맞서 법과 양식을 지켰던 그는 1966년 5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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