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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시어머니와의 마지막 설날

설 이후 요양원에 가시는 어머니... 자식의 도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집니다

등록|2024.02.13 20:37 수정|2024.02.14 11:33
2024년 설은 나의 시어머니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나는 시어머니의 요양원 입소가 '사별'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느낀다. 공허감, 상실감, 죄책감, 안타까움 등등이 뒤범벅된 마음이 그렇다. 그렇다해도 점점 지쳐가는 시아버지와 병세가 심해지는 시어머니를 보며 내린 결정이니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돌보며 시아버지는 우울증을 얻으셨다. 위중한 병들이 다 그렇겠지만 치매만큼 돌보는 이를 무력화 시키는 병은 없는 것 같다. 말도 통하지 않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를 부축하며 아침저녁으로 대소변을 치우는 일이 반복되면 보호자는 지칠 수밖에 없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것이 시아버지 우울증의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시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요양원 입소를 결정해야 했다.

시어머니가 달리 보이게 된 이유 
 

어머니의 나이든 손어머니의 쭈글해진 손을 보며, 젊음을 먹고 내 남편이 자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레오나르도 AI 이미지


대기하고 있던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닥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한 달에 한 번씩 찾는 시댁에, 안방에 시어머니는 더 이상 누워 계시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집에 시어머니가 있는 그림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시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필름처럼 스쳐간다.

신혼 초 시어머니와 자주 다투었다. 둘 다 직설적인 성격이라 단박에 튀어나오는 말을 거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고부 사이의 갈등을 시아버지께서 중재해 주셨는데 덕분에 나는 시아버지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아버지보다 시어머니가 더 좋아졌다. 무엇이 그리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이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1. 시어머니는 '엄마'가 아니다.
'시' 어머니를 '엄마'라는 잣대를 세우고 본다면 가까워질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라도 내 엄마는 될 수 없다. 나는 이 기준을 버렸다. 어쩜 내게 친정엄마라는 존재가 안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2. 시어머니 말고 '어머니'를 본다.
'시' 어머니에 '시'자를 살짝 떼어 버린다. '어머니'만 남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된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또 이 말은 동시에 이런 공식을 성립시킨다. '어머니 : 어머니= 여자 : 여자' 이 여사와 나는 어머니인 동시에 한 여자다.

3. 어머니 : 나 = 여자 : 여자
시어머니를 여자로 바라보니 동지애가 싹튼다. '여자의 삶'과 '어머니의 삶' 이 둘을 동시에 살아 내고 있는 우리 둘만의 공통분모가 생긴 것이다. 여자로 바라본 시어머니의 삶은 같은 여자로서 짠한 구석이 있다. 젊은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 속에서 시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다.  


'아! 이미 그녀는 나를 한 여자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시어머니는  정말 나를 사랑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결혼식을 불과 10개월 남짓 앞두고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친정엄마 없이 결혼했던 자신의 처지와 같아서 자꾸만 마음이 쓰이셨나 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째를 임신했을 때의 일이다. 시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춘천 시내를 나섰다. 임산부에게는 편한 속옷이 필요하다며 한 벌에 15만 원이 넘는 속옷을 두 세트 사주셨다. 결혼하고 실속파가 된 나는 임산부용 속옷에 거금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고급 속옷을 선물받고도 고마움은커녕 불만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이때 시어머니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 것이 죄송할 따름이다. 신혼 시절 '시어머니 때문에 못 살아!'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무엇이 그리 괴로웠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 보면 작고 사소한 다툼이었을까? 이마저도 지나고 보니 그리운 추억이다.

결혼 14년 차, 이제 시댁이 있는 춘천의 거리 곳곳이 내겐 낯익다. 남편과 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어머니와 누비던 골목길의 추억을 더듬는다. "어머님과 예전에는 여기까지 와서 장도 봤는데, 여기서 막국수 자주 먹었잖아. 그때도 어머니는 힘들어서 못 걷는다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날아다니셨던 거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젊고 건강했던 때였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가장 잘 한 것이 시부모님 모시고 여행을 자주 다녔던 것이다. 허리가 아파 늘 부축해서 걸으셔야 했던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함께 걷고 쉬면서 좋은 경치를 눈에 담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 즐기고 경험했던 것들이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할 수 없어'라는 말 대신 '어머니 우리 이거 해봐요', '우리 여기 가볼까요?' 명랑하게 건넸던 그 말들이 고부 사이를 이어 주는 교량 구실을 해주었다.

시어머니를 보내야 하는 마음에 상실감이 가득한 명절이었다. 가족들과 단체로 티셔츠를 맞춰 입고 거실 쇼파에 앉았다. 미루고 미뤘던 가족 사진을 찍기 위해 말이다. 좀 더 괜찮아졌을 때, 다음에 모이면 찍지 뭐 하고 미뤘던 사진을 시어머니가 함께 하는 마지막 명절에 찍기로 했다.

형님은 부스스한 시어머니 얼굴에 분칠을 해드렸다. 붉은 립스틱도 바르고 눈에는 펄이 도는 쉐도우도 발라드린다. 시어머니 손에 케이크도 들려드린다. 이 케이크의 의미를 시어머니는 아실까?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이다. 이제 대학생이 되는 우리 조카도 홀로 되실 우리 아버지도 집이 아닌 요양원에서 생활하실 시어머니도 전학을 앞둔 우리 아이들도 크고 작은 변화를 앞두고 있다.

지난날의 경험을 배움 삼아 달라진 환경에서 함께할 수 있는 '무엇'을 궁리해 보아야겠다. 홀로 남겨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요양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식들의 역할과 도리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다.

중심을 잘 잡고 싶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지금을 잘 살아내는 것, 이게 지금 우리 가족이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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