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철거 현장에서 만난 네 번의 계절
재개발 현장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들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꽤 넓었던 주택 단지가 사라지는 데 걸린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구간은 바로 앞 맞은편 주택가까지여서 한동안은 흉하게 박힌 철제 판자들을 보며 집을 나서야 했다. 가끔은 옥상으로 올라가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구경했는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커다란 중장비를 3m 안팎의 거리에서 볼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누군가가 살았던 공간의 흔적을 말끔히 치우니 남은 것은 오직 흙뿐이었다. 앞으로 사람들은 이 자리에 어떤 모양의 집이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주택가 사이에 있는 넓은 골목길이 어떤 곳이었는지도.
자전거를 배우던 아이의 웃음소리와 산책을 하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 담벼락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가던 길을 멈추고 담소를 나누던 어르신들까지.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봐았던 모습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영원히 멈춰 있을 거라는 사실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날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기에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과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일상을 보내야했다. 작지 않은 소리가 오전 내내 들려오는 건 스트레스였지만 하필 코로나와 시기가 겹칠 때였어서 선뜻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한동안은 핸드폰 알람 대신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우리 집과 가까운 곳부터 철거를 시작해 남은 1년 6개월 동안은 흙먼지와 조금은 멀어졌다. 철제 판자를 치운 자리에는 낮은 펜스가 세워진 덕분에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곳에 자리 잡은 자연을 마음껏 구경하기도 했다.
네 번의 계절이 남긴 것
어느새 여름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울타리 너머에는 장마가 만든 물웅덩이 주변으로 갈대숲이 생겨 늦은 오후에는 주홍빛의 노을과 바람에 살랑이는 갈대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시끄러운 소음이 사라진 공사장은 의외로 평온함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 가을 ⓒ 한재아
점점 추워지는 날씨 때문인지 이르게 내린 첫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시간이 지나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에 눈이 녹은 지 한참이 지나도 공사장의 눈은 녹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까지 그곳은 여전히 하얀 세상이었다.
▲ 겨울 ⓒ 한재아
높아지는 온도와 따스한 햇살에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새로 만들어진 수영장을 찾은 청계천의 오리 가족들이 물장구를 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주변에 작동을 멈춘 중장비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풍경이었다.
▲ 이른 봄 ⓒ 한재아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지고 내리쬐는 햇살을 마음껏 머금은 땅에는 잡초를 시작으로 온갖 풀이 자라났다. 척박해 보였던 땅이 점점 녹음으로 가득해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간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찾아온 네 번의 계절과 탁 트인 하늘은 '이곳에 공원이 생기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남겼다.
▲ 여름 ⓒ 한재아
건물의 잔재와 푹 파인 땅으로 엉망이 되었던 곳이 평야가 된 뒤로는 낮은 울타리 대신 높고 견고한 벽이 세워졌다. 안전을 위한 것임을 알지만 집을 나설 때마다 보이는 거대한 벽이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구수는 꾸준히 감소하는데 그렇게 큰 아파트 단지가 필요한가' 같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도 했다.
앞으로 만들어질 높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지든 어렸을 때의 기억과 이 자리에서 만난 네 번의 계절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다. 벌써부터 집을 나서며 봤던 탁 트인 하늘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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