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운동권 특권 청산"... 한동훈이 노리는 것
[주장] 전형적인 '한동훈식' 프레임 전환 시도, 결과는 총선에서 판가름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월 5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김경율 비대위원(오른쪽)의 발언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 남소연
1988년, 필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되어 검찰 수사를 받은 적이 있다. 기소를 앞둔 어느 날 담당 검사에게 불려갔다. 그는 다짜고짜 "내가 너 대학 졸업시켜 줄 수 있는데"라고 운을 뗐다. 반성문을 쓰면 기소유예로 풀어주겠다는 뜻이었다.
필자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학을 졸업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대학총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일개 검사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순간 그 검사는 벌떡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나가!"라고 외치더니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필자에게 나가라고 해놓고 담당검사가 먼저 나가버렸으니 적잖이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일이 떠오른 건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이 시대정신'이라고 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발언 때문이다. 이는 그가 지난해 12월 27일 비대위원장 취임식에서부터 외치기 시작한 구호였는데, 최근에는 여러 토론회에서 주장을 강조하고 나섰다.
일반적으로 '시대정신'이라 함은 "한 시대의 사회에 널리 퍼져 그 시대를 지배하거나 특징짓는 정신"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한동훈 위원장은 운동권 출신 86세대 정치인에 대해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국민과 민생은 도외시하고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운동권 특권 세력이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장악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까지 동원하여 운동권의 영향력을 과장한다.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 없이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발전시키고 있는 셈이다.
한동훈 주장의 허(虛)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운동권 청산이 시대정신"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한동훈 위원장 본인조차 이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반론을 펼치는 이들에게 운동권 청산이 시대정신이라는 걸 입증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운동권 세력이 특권화 되어 수십 년째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는 원흉이라면 이를 청산하는 일은 당연히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진단일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한국 사회의 핵심 영역인 경제계를 운동권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김능구 <폴리뉴스> 대표는 민주당 내 운동권 출신에 대해서도 "민주당을 86세대가 장악하고 있다? 천만의 말씀"이라고 단언한다. "자기 공천도 전부 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86운동권 출신의 현재라면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 "바보 같은 이념정치"를 하고 있다고 혹평한다.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앞서 지낸 김종인도 "어떻게 운동권 청산이 시대정신이 될 수 있나? 잘못 짚은 선거전략"이라고 비판하는 실정이다.
한동훈 위원장과 국민의힘의 공천 행보도 운동권 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항마로 운동권 출신인 원희룡 전 법무부장관을 대항마로 내세우는가 하면, 운동권 특권세력의 상징적인 인물로 지목한 정청래 의원의 대항마로 역시 운동권 출신인 김경율 비대위원을 내세웠었다. 이들 말고도 국민의힘 안에는 하태경, 최형두, 오경훈, 윤희숙 같은 운동권 출신들이 여전히 활보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특권화되어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주범일 정도로 운동권의 폐해가 심각하다면 우선 국민의힘에서부터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청산하는 단호한 선행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조치도 없이 민주당 내 '운동권 특권세력'을 비판하는 게 무슨 설득력을 갖겠는가.
국민의힘이 내세우는 운동권 출신은 '운동권 특권세력'이 아니라 과거를 반성하고 전향한 사람들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민주당 내에 있는 운동권 출신만이 청산해야 할 '운동권 특권세력'이라는 주장은 더욱더 설득력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결국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이 시대정신"이라는 한동훈 위원장의 주장은 그 객관적 설득력조차 전혀 갖추지 못한 허구적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한동훈 주장의 실(實)
▲ 윤석열 대통령 신년대담 시청하는 시민들지난 7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KBS를 통해 녹화 방송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의 특별 대담을 시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다면 왜 한동훈 위원장은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을 '시대정신'이라는 '현란한 지위'까지 부여해 설파하고 나선 것일까?
이번 총선을 앞두고 무능할 뿐만 아니라 독재 행태를 보이고 있는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야당의 목소리가 적지 않은 대중적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한동훈식 프레임 전환 시도라고 본다. 이미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상황에서 더 이상 민생파탄으로 도탄에 빠진 서민의 삶을 문재인 정권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 대응은 통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권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새로운 표적으로 '운동권 특권세력'이 소환된 것은 아닐까. 지난 2020년의 한동훈 검사와 채널A 사이에서 발생한 검언유착 의혹에 대해 이를 보도한 MBC와 문재인 정권 사이의 권언유착 의혹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들고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론을 통해 '윤석열 정권 심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진보세력에 대한 우려와 불만을 국민의힘 주위로 결집시키는 한편, 야당의 분열도 촉발하는 결과다.
동시에 자신의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론'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들의 헌신과 용기에 늘 변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거나 '우리 사회 민주화의 주역은 운동권 특권세력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운동권 특권세력'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구분하는 한동훈 위원장의 세심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민의힘은 우리 사회 민주화에 헌신하던 중 죽거나 실종, 부상당한 분들을 국가가 예우하자는 취지의 민주유공자법 제정 요구에 대해 '운동권 셀프 특혜법'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때문에 그 진정성은 이미 충분히 의심받고 있다.
사실 한국 민주주의와 민생 위기가 '운동권 특권세력' 때문이라는 한동훈 위원장의 주장보다는 '무능한 검찰 특권세력'이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도 검사 출신, 집권여당의 대표도 검찰 출신, 방통위원장도 검사 출신, 금융감독원장도 검사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마저 용이한 예산 확보 논리를 내세워 검사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한국 사회 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최근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고발사주 사건의 손준성 검사도 만약 공수처가 없었다면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둘 중 어떤 세력이 '청산해야 할 특권세력'인지는 이번 총선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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