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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고민을 끝내는 방법

하루를 희생하면 열흘이 편안합니다

등록|2024.02.23 13:41 수정|2024.02.23 13:58
'오늘 뭐 먹지?'라는 질문에 '간단하게 있는 거 먹자'라는 대답을 주부들이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살림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간단하게'가 정말 간단하게 되지 않음을 누구나 안다. 적어도 이 말은 우리집에선 금기어다.

신혼 시절, 경찰이 범인 잡으러 쫓아오듯 끼니가 나를 죽어라 쫓아와서 기함했다. 밀키트도, 냉동식품도 없던 시절이고 손도 느려서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요리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이 됐다. 싫다고 안 하면 아예 해결이 안 되어서 진퇴양난이었다. 뭐든 방법이 필요했다.

양파, 대파를 사면 무조건 다 썰어놨다. 요새 유명한 요리 유튜버들 보니 용도에 맞게 다른 모양으로 썰어놓던데 그런 거 없다. 모두 검지손가락 정도 길이로 잘라 냉동실에 넣었다. 재료 손질 시간이 줄어드니 좀 살 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리 구원자 백종원님이 나타났다. 한동안 그의 레시피를 신나게 따라했다. 그러다 한국음식은 매콤 양념과 간장 양념 두 가지로 나눠진다는 너무 당연한 걸 깨달았다.

진간장, 설탕, 다진마늘, 고추장, 고춧가루를 모두 같은 비율로 섞어버렸다. 쭈꾸미, 제육, 닭볶음, 부대찌개 등등은 그냥 이걸로 퉁쳤다. 이래놓고 나중에 굴소스나 참치액젓, 생강청, 후추 등을 추가하면 얼추 비슷해졌다.

진간장, 설탕, 다진마늘 세 가지도 섞어놨다. 이걸로 어묵볶음, 찜닭 등을 했다. 이 역시 나중에 추가 양념만 더하면 또 얼추 비슷해졌다.

대파와 양파, 양념장 두 가지만 미리 준비해 놔도 음식 만드는 시간이 확 줄었다. 그랬어도 '뭐 먹지?'는 여전한 고민이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그야말로 돌밥(돌아서면 밥) 시대가 열렸다. 양념장과 재료 손질 정도로는 수습될 규모가 아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돼지고기 3kg, 소고기 1kg, 바지락살 500g, 어묵, 버섯, 무 등등 큰 묶음을 샀다. 고기는 다진마늘과 된장에 짭짤하게 볶았다. 여기에 물과 야채만 넣으면 고기 된장찌개다. 나머지는 데쳐서 양념장에 섞었다. 제육볶음이 된다.

바지락 살도 버섯, 된장, 다진 마늘에 조물조물 무쳤다. 맞다. 여기에 물 붓고 야채 넣으면 바지락 된장국이다. 데친 어묵과 버섯, 무는 어묵탕이, 소고기와 썰은 무 봉지는 소고기 무국이 된다. 이

모든 재료들은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였다. 돌밥 스트레스로 널뛰던 내 마음도 차곡차곡 정리됐다. 코로나가 끝났다. 암흑기였지만 내겐 장점도 남겼다. '오늘 뭐 먹지?' 고민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냉동실 문에 붙은 포스트잇'오늘 뭐 먹지?'에 대한 답은 여기서만 고를 수 있다 ⓒ 최은영


'오늘 뭐 먹지?'는 주관식이라 너무 광범위하다. 냉동실 앞의 이 포스트잇은 선택 폭을 확 줄인다. 고민 없이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먹으면 된다. 아니, 먹어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했던 고민이 이 쪽지 하나로 말끔하게 해결됐다.

사람의 뇌는 하루에 생각할 수 있는 용량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고 한다. 뭐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뇌 용량을 그만큼 쓴다. 냉동실 쪽지는 고민 없이 기계적으로 임무 완수를 할 수 있으니 그만큼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옷 고민하기 싫어서 똑같은 검은색 목폴라를 몇 벌씩 갖추었다는 것처럼 내겐 저 냉동실 쪽지가 검은색 목폴라다. 냉동실 앞에 작은 화이트 보드판을 붙여놓고 지우개로 지워가며 재료를 써놓는 게 더 예뻐보였다. 그런데 우리집엔 사은품으로 받아온 포스트잇이 넘쳐난다. 보드판 결제를 취소했다.

보기만 해도 내 고민을 해결해 줄 거 같은 냉장고 수납 용기들도 많다. 보다보면 홀린듯 결체창까지 들어간다. 그러다 눈 질끈 감고 폰을 닫아버린다. 지금까지 돈 안 쓰고 불편없이 살았는데 이제와서 사는 건 돈이 아깝다.

너무할 정도로 튼튼하게 나오는 포장비닐을 한 번 쓰고 버리는 건 더 아깝다. 호박, 대파, 양파 등을 소분했던 비닐은 헹궈서 열 번을 써도 멀쩡하다.
 

애호박 포장지 재사용애호박 포장지에 된장찌개 4번 끓일 야채들이 소분되어 들어있다 ⓒ 최은영


"저 쪽지에 붙은 것만 하고 밑반찬은 안 먹어?"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김치, 멸치볶음, 장아찌 종류 말고는 왠만해서 밑반찬은 안 한다. 밑반찬까지 매번 하라고 하면 나는 아마 진작에 파업했을 것이다. 대신 열흘에 한 번, 저런 재료 손질들을 할 때 냉동이 어려운 각종 나물 무침과 멸치 볶음 정도는 한다. 열흘에 한 번은 할 만하다.

음식을 할 때마다 재료 손질부터 하면 냉동실에서 나온 재료보다 영양도, 신선도도 좋을 것이다. 재료 특성에 맞춰 양념들을 가감하면 더 어울리는 맛이 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를 다 챙기면서 살림하라고 하면 나는 120% 확률로 다 포기하고 배달 앱을 켤 것이다.

나는 미슐랭 가이드에 나가려고 요리하지 않는다. 그저 내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만이다. 하루 준비해서 열흘을 먹는 이런 시스템은 나와 내 식구들 모두 별 불만 없으니 그걸로 족하다.

주말이 코앞이다. 주말은 보통 끼니 준비에 더 바쁘다. 이 냉동실 쪽지로 힌트를 받아서 '오늘 뭐 먹지?'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개인 SNS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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