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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가 전하는 참된 의미는

이순신 대중화의 길잡이

등록|2024.02.26 15:31 수정|2024.02.26 15:31
임진왜란 중 7년에 걸쳐 작성된 <난중일기(亂中日記)>(국보 76호)는 이순신의 활약상과 그 당시의 전황은 물론, 정사(正史)에도 없는 그 당시의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2013년 이것이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인데, 최고지휘관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한 것은 세계역사상 유일한 것이다.

이순신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된 때는 부득이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1593년 2월 웅포해전 때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을 이끌고 원균 및 이억기 부대와 연합하여 웅천에 주둔한 왜군을 7회 공격하여 물리쳤다. 이 전쟁을 치른 후 4월 한달 간은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5월부터 다시 썼다. 이때 이순신은 일기를 적지 못한 이유에 대해 별지로 된 첨지(籤紙)에 적어 <난중일기>에 붙였다.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
[意於筆硯, 而奔忙海陸, 亦不休息, 置之忘域久矣. 承此.]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이는 작전을 위해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분주한 상황에서는 일기를 적지 못했지만, 평상을 회복하면서 다시 일기를 적어나간다고 기록해둔 것이다. 이순신이 항상 붓과 벼루의 의미인 필연(筆硯)을 생각했다는 것은, 곧 전란 중에도 글 쓰는 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서 일기를 통해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고자 한 이순신의 남다른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으로 거의 매일같이 써나간 이순신은 초서(草書)의 흘림체로 작성하였다. 이순신이 사용한 서체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서체인데, 웅건하고 힘이 있다. 이는 전쟁 중 속기하는 데 이점이 있어 이순신이 선택했을 것이다. 얼핏 보면 임의대로 쓴 것 같지만, 풀처럼 흘려 썼으면서도 일정한 법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법첩을 추적하여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초서의 연원을 살펴보면, 본래 예서(隸書)에서 파생된 서체로서 초기에는 장초(章草, 예초)가 있었고, 한나라 말 장지(張芝)가 장초 가운데 남아 있는 예서 필획의 흔적을 없애고 금초(今草)를 만들었다. 동진(東晉) 때는 왕희지가 해·행·초서를 완성하고, 그후 당대(唐代)의 손과정(孫過庭)이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왕희지의 17첩과 손과정의 <서보(書譜)>는 오늘날 초서연구의 교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법첩에 근거하면 기본적인 해독이 가능한데, 간혹 자기만의 서체로 변형해서 쓴 글자는 법첩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후대의 <난중일기> 판본에 남은 문제점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게다가 동음가를 적용한 음차 표기와 동형(同形)의 다른 글자들이 있어 해독이 더욱 어려웠다.

정조 때 1795년에 <난중일기> 해독 작업 시 일부 교감(校勘, 교정)도 진행되어 동음가를 적용하여 어려운 글자를 쉬운 글자로 고친 경우도 있었다. 이는 교감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오류라고 단정할 수 없고, 서지학과 판본학에서는 이를 이본(異本)의 글자라고 정의한다.

전서본 난중일기가 간행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득공, 윤행임, 홍기문, 이은상 등의 학자들이 선구적인 연구를 하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미해결된 글자들은 난해한 문제로 남았는데, 이는 초고본에 적힌 초서 글씨를 일일이 분석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난중일기> 전편을 분석한 결과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바로 초서 글자들의 용례를 찾아 비교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일본인의 대표적인 오독 사례>

애산(厓山) - 병신년 1월 7일
세산월(歲山月) - 병신년, 9월 11일
여진입(女眞卄) - 여진삽(女眞卅) 병신년 9월 14일
일맥금전(一脈金錢) - 정유년 5월 21일
우오미지(又五未持) - 정유년 6월 1일
노순일(盧錞鎰) - 정유년 6월 2일

그 결과 선대의 여러 학자들이 해결 못한 문제를 상당수 해결할 수 있었다. 초서 해독은 해독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독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용례로 푼다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10여 년 동안 이 방법을 병행하여 교감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고전전문학자들이 동원되고, 문리력 중심의 해독방법인 문팔초이(文八草二)의 원리로 분석하였다.

그 성과물로 몇 년 전 교감과 함께 완역을 진행한 결과 정본화된 교주본을 간행하였다. 이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지만, 난중일기 정본을 만든다는 소신을 갖고 뜻을 관철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의 오독을 불식하여 정확한 내용으로 이순신의 정신을 후대에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대해 간혹 악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통 교감이론에 기반하여 완성된 난중일기 정본이 전하는 참된 의미는 후대에 이순신의 정신을 되살려 이순신 대중화에 바른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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