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자 친구, 교사까지 했던 '큰언니'가 그리워질 때
구전동요 '형네집에 갔더니'의 실상과 동심의 '귀여운 반란'
우리 옛 어른들은 '먹을 것 가지고 야박하게 굴면 못쓴다'고 했다. 음식에 대한 나눔의식을 읽게 하는 말이다. 과거 결혼, 회갑 등 잔치집이나 초상집에 거지가 오더라도 먹을 것을 챙겨주었고, 옛날이야기에 낯선 나그네에게 밥을 차려주는 모티프가 드물지 않은 것도 모두 우리 문화에 음식의 나눔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구전동요에는 우리 음식문화의 정서와 의식에 반하는 노래가 있어 흥미롭다. '형네집에 갔더니'가 그것인데 이 노래는 음식 나눔이 아니라 음식 소외를 모티프로 하고 있어 내용이 독특하다. 이런 모티프의 노래는 구전동요는 물론 민요 일반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달두달두 밝다
영창도 밝다
형네집에 갔더니
양지머리 삶아서
저혼자만 먹더라
우리집에 왔다봐라
수수팥떡 안주겠다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평안남도 용강
달이 밝아 방과 마루 사이의 미닫이 영창(映窓)도 환하던 어느 날 형네집에 마실 갔다. 마침 양지머리를 삶아서 먹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먹어보라고 하지는 않고 저 혼자 먹는단다. 문득 전에 집에서 먹었던 수수팥떡이 떠오른다. 언니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수수팥떡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서운함을 그리 달래보는 것이다. 여기서 형은 '출가한 언니'를 의미한다.
노래가 그리 되어 있으니 그런 줄은 알겠지만, 어쩐지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음식 나눔의 우리 문화의식으로 볼 때 남이라도 그리하기 어려운데 친정 동생에게 먹을 것으로 따돌리다니, 무언가 이상하다. 또 다른 읽기가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거 다산사회에서 터울 진 큰 언니는 어린 동생들을 관리하고 놀아주는 보모의 역할을 수행했다. 농번기에는 특히 언니의 아이들 돌봄 역할은 더욱 긴요했고, 아이들 역시 언니에게 크게 의지하며 생활했다. 당시 아이들에게 언니는 놀이 친구이며 보호자이며 교사였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니가 시집을 가고 난 뒤 아이는 언니의 빈자리를 체감하게 된다. 이제 언니가 없다. 출가 이후 쉽게 친정에 오지 못하는 언니가 점점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득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이에게 언니와의 단절은 언니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형네집에 갔더니'의 형상은 아이가 느끼는 언니로부터의 단절감, 쓸쓸함이 정서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수수팥떡은 예전에 아이가 10여살이 될 때까지 생일날 건강기원의 뜻으로 해주던 별식이다. 생일도 되고 별식도 먹고 보니 언니 생각이 새삼 절실해진다. 그 무심함에 서운함도 보다 강한 느낌으로 스며온다.
어느덧 자신에 대한 언니의 무심함이 원망스럽다. 언니가 자신을 홀대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언니가 오더라도 수수팥떡이라는 이 특별한 먹거리를 줄 수가 없다.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언니를 홀대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 수수팥떡 주지 않겠다는 발상과 함께 아이다운 또다른 상상이 이어진다.
수수팥떡을 계기로 언니를 소외시키려 마음먹자, 아이의 상상은 이제 언니도 같은 생각을 할 것으로 여기게 한다. 언니가 자신을 홀대한 이상 언니집에 가더라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적 비약과 상황 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언니의 동생에 대한 음식소외라는 뜬금없는 상황이 준 문화적 당혹감은 아이의 시각에서 그 정서적 배경을 이처럼 파악할 때 해소된다. 환언하면 맥락이 비로소 맞아 떨어진다. '형네집에 갔더니'의 문면은 언니를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동심을 반감으로 표출한, 일종의 '귀여운 반란'이었던 것이다.
이 노래의 내력은 제법 상당하여 초기자료는 1898년 고종 35년에 미국 민속학자 E. B. Landis가 당시 자국 민속학회 학회지에 투고한 글에 보인다. 이후 1933년에 김소운이 펴낸 <조선구전민요집>에도 위의 예시 외에도 여러 편 실려 있다.
그런데 전승과정에서 노래 대상이 언니가 아니라 고모로 바뀐다. 무엇보다 시대 사정이 달라진 탓이다. 아이를 둘만 낳아 기르는 시대에 진입하면서 보모역을 할 만큼 터울 많은 언니들이 귀해진 반면, 대가족사회의 여파로 그 시대까지도 출가 전에 오빠의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던 고모들은 주변에 여전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출가한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의 본래적 향유 정서가 현실감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형네집에 갔더니'가 '고모네집에 갔더니'로 변화를 겪게 된 배경이다. 지금 이 노래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십중팔구 후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에게 대가족사회나 다출산사회는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린다. 출가 전의 언니나 고모들과 쌓은 추억이 없으니 지금은 이들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도 자리하기 어렵다. 이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캐릭터들이 사로잡고 있다.
저출산시대의 미래 아이들, 보모같은 터울 진 언니가 아니더라도 친구같은 형제들이 여럿 있어 어린 시절 추억을 많이 쌓으며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저 한낱 꿈일 수밖에 없을까?
그런데 구전동요에는 우리 음식문화의 정서와 의식에 반하는 노래가 있어 흥미롭다. '형네집에 갔더니'가 그것인데 이 노래는 음식 나눔이 아니라 음식 소외를 모티프로 하고 있어 내용이 독특하다. 이런 모티프의 노래는 구전동요는 물론 민요 일반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영창도 밝다
형네집에 갔더니
양지머리 삶아서
저혼자만 먹더라
우리집에 왔다봐라
수수팥떡 안주겠다
-김소운, <조선구전민요집>. 1933, 평안남도 용강
달이 밝아 방과 마루 사이의 미닫이 영창(映窓)도 환하던 어느 날 형네집에 마실 갔다. 마침 양지머리를 삶아서 먹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먹어보라고 하지는 않고 저 혼자 먹는단다. 문득 전에 집에서 먹었던 수수팥떡이 떠오른다. 언니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수수팥떡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서운함을 그리 달래보는 것이다. 여기서 형은 '출가한 언니'를 의미한다.
노래가 그리 되어 있으니 그런 줄은 알겠지만, 어쩐지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음식 나눔의 우리 문화의식으로 볼 때 남이라도 그리하기 어려운데 친정 동생에게 먹을 것으로 따돌리다니, 무언가 이상하다. 또 다른 읽기가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거 다산사회에서 터울 진 큰 언니는 어린 동생들을 관리하고 놀아주는 보모의 역할을 수행했다. 농번기에는 특히 언니의 아이들 돌봄 역할은 더욱 긴요했고, 아이들 역시 언니에게 크게 의지하며 생활했다. 당시 아이들에게 언니는 놀이 친구이며 보호자이며 교사였다.
▲ 박수근 그림, '아기 업은 소녀'공유마당 제공, 만료저작물. ⓒ 공유마당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니가 시집을 가고 난 뒤 아이는 언니의 빈자리를 체감하게 된다. 이제 언니가 없다. 출가 이후 쉽게 친정에 오지 못하는 언니가 점점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득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이에게 언니와의 단절은 언니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형네집에 갔더니'의 형상은 아이가 느끼는 언니로부터의 단절감, 쓸쓸함이 정서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수수팥떡은 예전에 아이가 10여살이 될 때까지 생일날 건강기원의 뜻으로 해주던 별식이다. 생일도 되고 별식도 먹고 보니 언니 생각이 새삼 절실해진다. 그 무심함에 서운함도 보다 강한 느낌으로 스며온다.
어느덧 자신에 대한 언니의 무심함이 원망스럽다. 언니가 자신을 홀대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언니가 오더라도 수수팥떡이라는 이 특별한 먹거리를 줄 수가 없다.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언니를 홀대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 수수팥떡 주지 않겠다는 발상과 함께 아이다운 또다른 상상이 이어진다.
▲ 아이 생일날 만드는 수수팥떡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수록 이미지 ⓒ 우리역사넷
수수팥떡을 계기로 언니를 소외시키려 마음먹자, 아이의 상상은 이제 언니도 같은 생각을 할 것으로 여기게 한다. 언니가 자신을 홀대한 이상 언니집에 가더라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적 비약과 상황 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언니의 동생에 대한 음식소외라는 뜬금없는 상황이 준 문화적 당혹감은 아이의 시각에서 그 정서적 배경을 이처럼 파악할 때 해소된다. 환언하면 맥락이 비로소 맞아 떨어진다. '형네집에 갔더니'의 문면은 언니를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동심을 반감으로 표출한, 일종의 '귀여운 반란'이었던 것이다.
이 노래의 내력은 제법 상당하여 초기자료는 1898년 고종 35년에 미국 민속학자 E. B. Landis가 당시 자국 민속학회 학회지에 투고한 글에 보인다. 이후 1933년에 김소운이 펴낸 <조선구전민요집>에도 위의 예시 외에도 여러 편 실려 있다.
그런데 전승과정에서 노래 대상이 언니가 아니라 고모로 바뀐다. 무엇보다 시대 사정이 달라진 탓이다. 아이를 둘만 낳아 기르는 시대에 진입하면서 보모역을 할 만큼 터울 많은 언니들이 귀해진 반면, 대가족사회의 여파로 그 시대까지도 출가 전에 오빠의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던 고모들은 주변에 여전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출가한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의 본래적 향유 정서가 현실감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형네집에 갔더니'가 '고모네집에 갔더니'로 변화를 겪게 된 배경이다. 지금 이 노래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십중팔구 후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에게 대가족사회나 다출산사회는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린다. 출가 전의 언니나 고모들과 쌓은 추억이 없으니 지금은 이들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도 자리하기 어렵다. 이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이러저러한 캐릭터들이 사로잡고 있다.
저출산시대의 미래 아이들, 보모같은 터울 진 언니가 아니더라도 친구같은 형제들이 여럿 있어 어린 시절 추억을 많이 쌓으며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저 한낱 꿈일 수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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