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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본 대형마트 광고... 마흔, 인생이 바뀌었다

[3.8에 들려주고 싶은 나, 여성, 노동자 이야기①-1] 마흔에 다시 시작한 내 인생, 그리고 노동조합

등록|2024.03.06 18:36 수정|2024.03.14 11:50
2023년 가을, 공공운수노조 여성노동자들이 5회에 걸쳐 여성노동역사와 글쓰기를 배웠다. ‘여성노동자’로서의 나의 삶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글을 쓰다 눈물이 났고, 다른 이의 글에 위로 받기도 했다.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세대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3.8 세계여성의날을 앞두고 그동안 기록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기자말]
어린 시절, 성북동에 살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청계천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 하루는 집에 와서 엄마를 도와 북어껍질 벗기는 일을 하루 종일 했다. 그 시절 서울에 살면 한 번쯤 가봤을 대지극장(미아리), 오스카극장(청량리), 피카디리극장(종로)은 꿈도 못 꿔봤다. 공장을 거쳐 분식집, 아웃도어의류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 시절 내 꿈은 '빨리 결혼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언니들이 말한 대로 결혼만 하면 평생 일을 안 하는 줄 알았다.

24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외롭게 자란 탓이었는지 아이들이 좋았다. 4명의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면서 자라는 걸 보는 게 행복했다. 아이들의 학년이 올라가자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적어도 아이들은 대학 졸업까지 시키고 싶었다. 배우지 못한 나의 설움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나보다 덜 힘들고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네 아이 학원비라도 벌겠다는 결심으로 마흔이 넘어 다시 일자리를 알아봤다. 결혼하기 전부터 계속 일했다면 회사에서 중책도 맡았을 나이였지만 결혼 후 집안일과 육아만 한 나는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었다. 청계천에서 처음 면접을 보던 16살 때보다 두려웠다. '경력도 없는 나를 뽑아줄까? 집에만 있던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길을 걷다 우연히 대형마트 구인광고를 보았다. 2013년 무렵 대형마트가 경쟁적으로 지점을 늘이고 있었다. 용기 있게 전화는 걸었지만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이력서를 써내려갔다. 떨어져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내고 나서는 온 집안을 뒤집어 엎었다. 혹시나 합격한다면 지금처럼 집안일을 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미리 대청소를 했다. 먼지를 털고 안 입는 옷도 버리면서 일주일을 기다렸다.

복권당첨보다 더 좋은 '정규직'
 

▲ 비정규직 부당해고 그린 영화 <카트>의 한 장면 ⓒ 명필름

   기다리던 합격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나도 이제 직장인이 되는 거구나' 기대감이 몰려왔다. 심지어 정규직이었다. 경력도 없고 가정주부로만 20년을 살아온 내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복권당첨 같았다. 근무에 앞서 서비스교육과 안전교육 등을 들었다. 개점을 앞두고 내부 시공이 한창인 마트에서 하루 200~300명의 사람들과 교육을 들었다.

나와 함께 입사해 교육을 듣는 사람들도 대부분 40대 기혼 여성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던 1990년대만 해도 여자들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결혼을 늦게 하면 노처녀 소리를 들었고 아이를 집에 두고 나와 일하면 독한년, 나쁜 엄마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40대 아줌마가 노동시장에서 환영받는 존재라고 했다.

생산직 공장은 45세 미만이면 기혼여성도 들어갈 수 있고 마트나 쇼핑몰 같은 서비스업은 경력도 자격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서 있어야하고 여러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라 나이가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했다. 임⋅출⋅육으로 인한 오랜 공백이 나를 움츠려들게 만들었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고급인력'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출근한 첫날 내 생의 첫 근로계약서도 적었다.

마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마트가 직접 채용한 정규직과 협력업체 파견노동자가 섞여 있다. 협력업체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파견노동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고 마트에서 시키는 일까지 부담해야 했다. 마트 할인기간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는 특별매대를 설치해 상품을 진열하고 정리하느라 철야작업을 해야 했다.

명절에는 대량으로 구매하는 고객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밥도 먹지 않고 일했다. 창고에는 선물세트가 천장까지 쌓였다. 일부 마트 직원들의 갑질이 파견노동자를 더욱 서럽게 만들기도 했다. 치열하게 일하는 파견노동자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정규직이라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는 애들 봐야 해서 노동조합 그런 거 못해요

입사한 지 2년이 되었을 무렵 우리 마트에도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노동조합을 하려면 조합원들을 이끌어줄 간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여자는 남자처럼 추진력도 없고 아줌마는 집안일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는 판에 노동조합 활동을 해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줌마 간부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였다. 나도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은 이전만큼 못하게 되었지만 노동자라는 자부심과 가족들의 인정은 커져갔다.

나는 조직국장으로 수도권에 새로 생기는 지점이 있으면 달려가 노동조합을 홍보했다. 조합원은 계속 늘었고 처음엔 어색해하던 조합원들도 어느새 당당히 노동조합 어깨띠를 둘러매고 근무했다. 우리가 일하는 일터를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우리를 '아줌마'라고 부르던 관리자들도 '여사님'이라고 호칭을 바꿔 불러줬다.

그렇게 일을 하다 다쳐서 쉬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산재를 받았을까' 싶었다. 그 무렵 회사가 투자회사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동조합은 회사에 입장을 요구했고 회사는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보장했다. 그러나 산재로 일을 할 수 없던 나는 고용승계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다친 김에 쉬고 싶었던 터라 퇴사를 받아들였다.

몇 개월 뒤 같이 일하던 관리자에게 자신이 일하는 지점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의 말을 믿고 이력서를 넣었지만 채용되지 못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말이 기가 찼다. "민정씨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 게 기록에 남아있어서 안 된다네 나도 몰랐어 미안해." 그 후에도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 영화 <카트>의 마지막 장면. ⓒ 명필름


신종 꿀 알바의 진실

2018년 겨울, 나는 '하루만 일해도 임금을 주는 물류센터'에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다. 신기하게도 이력서도 면접도 필요 없었다. 휴대폰에 어플을 깔고 몇 가지 서류에 전자서명을 하고 입사 지원을 눌렀더니 다음날 출근 하라는 문자가 왔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오늘 일하면 내일 통장에 돈이 꽂히는 신종 꿀알바'로 불린다고 했다.

그 곳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었다. 비정규직은 일용직과 계약직이 있었는데 계약기간이 3, 9, 12개월로 쪼개져 있었다. 개인물품 보관함은 계약직부터 지급되었다. 일용직들은 소지품을 휴게실 의자 위에 쌓아두었다. 물품보관함은 없었지만 대신 모든 사람이 휴대폰을 보관함에 넣어야 했다. 근무 중에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휴대폰을 소지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용직으로 출근한 지 이틀째 PS(중간관리자)가 와서 계약직을 제안했다. 마트에서 일하면서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과 설움을 봐온 터라 계약직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규직이라고 처우가 더 좋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면 어떠냐 월급만 따박 따박 나오면 되지' 싶은 마음으로 지인들과 계약직에 지원하였다.

내가 일한 곳은 대형창고에 물품을 보관하고 배송부터 반품처리까지 다 해주는 풀필먼트식 물류센터였다. 해외자본의 투자를 받은 대표는 국내 유통망 점유를 위해 빠른 배송, 회원제 무료배송 서비스를 내세웠다. 사람들은 오늘 주문한 상품이 내일 아침 문 앞에 놓여지는 대견한 서비스에 극찬했다. 나도 편하고 빠른 배송을 자주 이용했다. 이곳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2편 : '꿀알바'라더니... 여기, 사람이 일하는 곳 맞아?
덧붙이는 글 글쓴이 강민정은 전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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