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도 인정한 항일운동,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외전] 이제국은 왜 '독립유공자'에서 빠져있나
▲ 신상 카드에 나오는 이제국의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이들은 현재 1만 8018명이다. 이번 3·1절에 포상을 받은 103명이 포함된 숫자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는 대략 3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중 15만 명 이상은 순국선열로 보인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만으로도 15만 명이 넘는다면, 1만 8018명은 너무 적은 숫자다.
그 300만 명의 유족들에게 일일이 재정적 답례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는 밝혀줘야 마땅하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상카드에 이제국(李濟國)이 존재한다. 일제 강점 6년 뒤인 1916년 5월 1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중학동인 경기도 경성부 중학정(町)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경복궁 남동쪽과 광화문광장 동북쪽의 접점인 중학동에서 태어난 그는 신상카드가 작성될 당시에는 경복궁과 창경궁의 중간쯤인 계동에 살았다. 신상카드에는 25세 때인 1941년 3월 1일에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절도 전과자였던 그는 어떻게 항일운동가가 되었는가
▲ 신상 카드에 적힌 이제국의 인적 사항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제국의 창씨명은 국본창근(國本蒼根)과 국본낙국(國本洛國)이다. 항일운동으로 수감된 곳은 서대문형무소다. 신상카드에 따르면, 키가 154cm이고 지문 번호가 97777과 99969인 그의 죄명은 보안법 위반죄다. 육군형법 위반죄도 함께 적혀 있다.
그에게는 항일운동의 결과물인 보안법 및 육군형법 위반죄 외에도 전과가 더 있었다. 신상카드 중간의 '기타 전과'란에 '3범'으로 표기돼 있다.
1941년 5월 16일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그에게는 절도죄 전과 2범과 공무집행방해죄 1범이 있었다. 절도 전과자가 항일운동가로 변신했으니,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뉴스의 초점이 됐을 만한 인물이다.
이제국은 보통학교 5학년이자 15세 때인 1931년 3월 생계 곤란을 이유로 학교를 중퇴했다. 학비 부족도 아니고 생계 곤란이 사유가 됐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3년 8월 22일, 17세 나이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절도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7년 2월 23일에는 같은 법원에서 주거침입철도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 형량을 치른 직후인 1939년 3월 16일에는 같은 법원에서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절도죄 등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세 차례나 유죄를 받은 청년이 마지막에는 항일운동가가 되어 경성지방법원 피고석에 앉았다. '이제국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보다 '이제국이 왜?' 하며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절도 전과 2범이 된 그가 공무집행방해죄까지 추가해 전과 3범이 된 1939년의 일이다. 스물네 살의 이제국을 감동시키는 일이 감옥에서 일어난다. 훗날 마포형무소로 불리게 될 경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그는 우연히 항일투사 오동진(吳東振)을 만나게 된다.
이제국이 만난 오동진이 1920년에 광복군총영을 결성해 항일전투를 수행한 송암 오동진(1889~1944)이라고 확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송암 오동진이 1927년에 붙들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44년에 순국한 점, 경성감옥에도 수감된 일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국을 감동시킨 항일투사가 27세 연상의 송암 오동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오동진은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제국에게 충고했다. "조선 청년으로 하여 절도죄와 같은 파렴치한 죄로 처형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독립운동과 같은 범죄를 하여 처형됨을 숙원으로 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이제국은 오동진이 주문한 것보다 훨씬 큰 꿈을 품었다. "조선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과 동시에 스스로는 뛰어난 사상가로서 세인의 신망을 넓힌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이 대목에서 일제 판사는 그의 꿈을 "야망"으로 표현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뛰어난 사상가로서 세인의 신망을 넓힌다"는 꿈을 꾼 것이 일제 판사에게는 '희망'이 아닌 '야망'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이제국을 외면한 대한민국 정부... 공정하지 않다
▲ 이제국의 판결문. ⓒ 국가기록원
위대한 사상가가 되어 민족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출소한 이제국은 같은 동네에 사는 중학생들에게 접근했다. 한성상업학교 3학년 조남권을 비롯해 일곱 살 정도 어린 학생들에게 다가가 오동진과의 인연을 설명해주면서 그들을 '탄복'시켰다.
이제국과 접촉한 학생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기초로 '탄복'이란 표현이 나왔다. 이제국이 실제로 학생들을 감동시킨 것은 사실이니,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실현시킬 만한 구체적 역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남권의 하숙집에서 중학생들을 모은 이제국은 형무소에서 배운 운동권 노래부터 가르쳤다. "인왕산과 금화산에 둘러싸인 사이에 독사와 같이 에워싸고 경성 장안을 바라보고 있는 서대문형무소다"라며 "2천 동포를 지역 내에 생포로로 강제노동시키고 일본의 부귀와 영화를 풍족하게 하고 있다"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였다.
노래를 가르친 다음에는, 일제의 민족 차별과 일본의 패망 가능성에 대한 연설을 했다. 일본이 중국 국민당 군대에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며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라고 웅변했다. 그러면서 학생 대중을 우리 운동에 동참시켜야 한다며 조직 확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제국은 조직을 구축하는 이 단계에서 검거됐다. 그 이상의 행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재판부는 '불온한 언동으로 치안질서를 방해했다'는 과도한 판단을 근거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를 도운 조남권에게는 징역 8월이 선고됐다.
일본 유학 중에 이제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한 윤동주도 징역 2년을 받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형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 징역 3년이고 나머지는 징역 1년 6월에서 2년 6월인 점을 감안하면 이제국과 윤동주가 받은 형량은 무거운 편이다. 전시 상황이 감안된 형량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국가보훈부는 2022년에 조남권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면서 이제국은 지정하지 않았다. 항일 그룹을 조직하고 지도한 이제국을 빼놓은 것이다.
이제국의 인적 사항이 불투명하거나 항일운동의 수준이 무겁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신상카드에 나타나듯이 그의 인적사항은 너무도 명확하다. 항일운동의 수준 또한 가볍지 않다. 그를 도운 조남권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일제 재판부는 조남권보다 무거운 형량을 이제국에게 선고했다. 이제국을 빼고는 이 그룹의 활동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도 인정한 이제국의 항일운동이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지정이 공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때의 비행 청소년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한국 독립운동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그만큼 널리 확산돼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의 품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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