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폭력적인 군대 덕이었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8) 백건우 소설가
"계급·신분 차별하는 사회, 너무 힘들었어요. 어릴 적 주변부로 밀려난 삶, 가난에 학교 문턱조차 넘지 못했는데 문학으로 전복을 시도했죠. 첫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으니까요. 공사판에서 벗어날 즈음엔 풀뿌리 민주주의에 꽂혔습니다. 주민·교육 자치 현장으로 다가서면서요. 못다 한 공부에 작품활동을 하며 '2막'을 설계 중입니다. 평등 세상을 꿈꾸면서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여덟 번째 주인공 백건우 소설가(62)의 말이다. 지난 5일 정배리 집에서 만난 그는 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1988)했던 까닭을 가난과 소외를 극복하려는 의지라 했다. 중학교도 갈 수 없었던 빈곤한 서울살이, 그럴수록 책에 집착했던 삶이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
"초등(당시 국민)학교 이후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재가해 이복·동복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자랐죠. 어찌 그리 가난했는지. 마포에서 초교를 졸업하던 해 물난리에 무허가 집에서 쫓겨나 금천(시흥) 변두리로 밀려났죠. 중학교 입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어요."
"병영 억압폭력 힘들어 소설 습작, 군대가 학교였다"
돈을 벌어야 했다. 친구들 중고교 다닐 때 공장과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동네 한 형이 노점에서 책을 팔았는데, 책을 읽고 싶어 친하게 지냈다. 그 형이 독서회에 한 번 가보지 않겠냐고 해 따라간 게 열여덟 그의 삶을 바꿔놨다.
"매주 한 번 종로도서관에서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써 발표했어요. 당시에 그런 모임이 많았거든요. 공돌이뿐 아니라 대학생·직장인 등도 참여했어요. 한 여자 선배가 검정고시 공부를 한다며 내게도 권하더라고요. 이튿날 등록했죠(후에 대학 졸업 뒤 교사가 됨). 월급이 반절 깎이는데도요. 6개월만에 중학과정을 합격했어요."
고교 검정고시 공부 중 군에 입대했다.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심사 때 검정고시 이야기를 하는 통에 현역 판정을 받고 말았다. 다행인지, 행정병으로 배정받아 맘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휴가 때는 군용가방(더플백) 가득 책을 사들여 읽었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건 군 복무 때 습작 덕이죠. 병영 억압·폭력이 너무 힘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다 죽여버리고 말 거야'(폭력 상관에) 소재 소설은 카타르시스였던 거죠. 군대가 제겐 작가 학교였던 셈이죠."
그는 1988년 1회 전태일문학상(전태일재단)을 받았다. 한 건설노동자가 용접봉을 사러 세운상가에 갔다가 노동자들의 가두시위 현장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주제의 중편 소설 '하루', 작가로 등단한 것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주간 화보잡지 '파리마치'(2년 전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소개)에 1955년 실린 한 표지사진을 콕 집어 '신화'라고 했다. 프랑스 군복의 한 흑인이 삼색기(프랑스 국기)에 거수경례하는 장면을 가리켜 프랑스 제국주의의 알제리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계략이라 비판한 것. 노동자의 정체성을 찾는 백 작가의 소설 '하루'. 그 '신화' 헤집기가 빛을 발한 것이다.
그 뒤 소설창작과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출판사 편집 일(편집장 포함)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생계를 꾸렸다. 시도 썼다. 노동현장 등 삶의 애환을 담은 것들인데 시집 한편 나올 정도라 했다. 장편소설 '사이버세상'은 97년 문학사상(월간) 입상작이 됐다.
1997년 안철수연구소(2000년 이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에 입사했다. 89년부터 작가 및 편집일을 하며 컴퓨터 공부를 했고,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에 기고하곤 했는데, 잡지 편집장이 연구소에 특채돼 그의 권고로 함께 간 것이었다. 프로젝트매니저로 8년여 일했다.
"안철수연구소 퇴사할 때쯤이에요. 한 친구가 양평에 땅을 사라고 권하더군요. 처음엔 돈이 없어 거절했죠. 부천에서 강남(아내)과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게 만만찮아, 서종에서 출퇴근하면 어떨까 싶어 생각을 바꿨죠. 이장이 땅(현재 사는)을 소개해 달려와 바로 계약했죠."
그의 정배리 삶이 시작됐다. 갑작스런 양평살이로 정신없었지만 마음 한구석 풀뿌리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2006년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자치위원(서종면) 공모 참여. 면단위 정책을 논의하는 기구였다. 위원이 되고 격월 소식지 '서종사랑'(A4용지 16쪽)도 발행했다. 재정 등 이유로 반대가 컸지만 위원장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서종사랑' 창간호를 들고 군수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죠. 연 1천만을 지원하겠다고 하더군요. 서종을 포함 모든 면 소식지 발간비용을 얻어낸 거죠. 1천여부를 역사, 공공기관, 식당 등에 배포했어요. 버스시간표 등 생활정보도 싣고요. 다른 면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더군요."
이어 군행정에 참여할 길이 여의찮아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지역연구소 이사를 맡았다. 도시공원 만들기, 무분별한 도시개발 반대(사람과 동식물·자연을 차별하지 않는), 쾌적한 녹색도시 만들기(쉼터·벤치·소공원 만들기 및 가로수 보전), 어린이 통학로 확보 및 자전거도로 설치 등의 활동을 지금까지 해왔다.
교육자치에도 참여했다. 학교운영위원을 맡아 학생 수 20여명으로 폐교위기를 겪던 정배초교 살리기에 나섰다. 학생수가 80명을 넘겨 120명까지 늘었고, 본교로 승격되기도 했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힘을 합친 열매였다. 교육내용도 현장·체험 학습 중심으로 바뀌며, 학생과 학부모 반응도 좋았다.
"정배초교가 유명해졌죠. 세월초교, 조현초교가 뒤를 이었고요. 학운위가 은행축제를 열고 교정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팔아 기금을 마련했어요. 그 돈으로 도서를 사들이고 남는 돈은 장학금으로 사용했죠. 가을이면 교정을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나무잎 생각나네요."
위기 때 꽃 피운다는 나무... 작가 '불안의 꽃' 어떻게 피어날까
그의 마지막 도전은 마을 이장. 그에게 집터를 소개했던 전임 이장이 권해 2009년부터 2년 임기를 맡게 됐다. 정배리 홈페이지(인터넷)를 만들고 면 행정공문을 전부 올렸다. 인구·가축·수해 조사, 농산물 수매 및 농기구·퇴비(구매) 조사 등의 정보를 공개했다. 알아주는 이는 없었지만 풀뿌리민주주의 초석이라 여겨 그리 한 것.
"외지인 이장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죠. 열린자치 디딤돌을 놓는다고 생각해 열심을 냈습니다. 선거철 표심에 이장 역할이 크다는 것도 그때 알았죠. 귀촌하는 도시운동가에게 꼭 이장하라고 권하죠. 이장협의회는 군수가 눈독을 들이는 기구죠. 표심 때문이겠죠."
노동소설로 시작해 주민자치까지 문예·지역 운동에 공들여 온 작가에게 남은 과제 중 하나는 개인의 노후 설계. 올해 퇴직하는 아내와 그간 생산한 콘텐츠 비즈니스를 고민 중이란다.
"창작활동은 몇 년 전부터 겨울(10월~3월)에 장편소설 하나씩을 쓰고 있어요. '노인병역'(청년은 공부하고 일해야 하니), 흡혈귀 가족(자신의 이복·동복 형제자매 이야기 활용) 등을 소재로 하니 재밌어요. 특정 장르에 소재를 가두지는 않을 겁니다. 스티븐 킹(미저리·쇼생크탈출 작가)처럼요."
그는 1996년 결혼했다. 인터넷통신 하이텔의 한 동아리에서 문자를 주고받다 인연이 맺어졌다. 한국표준협회(법인)에서 37년째 일하는 아내와 아들 하나를 뒀다. 그는 중고 검정고시를 거쳐 1993년 입학한 방송대(국어국문)를 30년만인 지난해 졸업했다.
소나무가 생명의 위기 때 찬란한 꽃을 피운다고 했던가. 종족보존본능이라고들 하는데, 마르틴 발저는 맨 처음 '불안의 꽃'(독일어 앙스트블뤼테)이라 불렀다. 중세 르네상스도 흑사병 창궐과 교황·황제 권력의 붕괴 및 정치사회적 혼란의 불안 속에서 피어난 찬란한 문화였다. 노년의 작가가 피워낼 '불안의 꽃'은 과연 어떨까.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여덟 번째 주인공 백건우 소설가(62)의 말이다. 지난 5일 정배리 집에서 만난 그는 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1988)했던 까닭을 가난과 소외를 극복하려는 의지라 했다. 중학교도 갈 수 없었던 빈곤한 서울살이, 그럴수록 책에 집착했던 삶이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
"병영 억압폭력 힘들어 소설 습작, 군대가 학교였다"
▲ 백건우 작가. ⓒ 최방식
돈을 벌어야 했다. 친구들 중고교 다닐 때 공장과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동네 한 형이 노점에서 책을 팔았는데, 책을 읽고 싶어 친하게 지냈다. 그 형이 독서회에 한 번 가보지 않겠냐고 해 따라간 게 열여덟 그의 삶을 바꿔놨다.
"매주 한 번 종로도서관에서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써 발표했어요. 당시에 그런 모임이 많았거든요. 공돌이뿐 아니라 대학생·직장인 등도 참여했어요. 한 여자 선배가 검정고시 공부를 한다며 내게도 권하더라고요. 이튿날 등록했죠(후에 대학 졸업 뒤 교사가 됨). 월급이 반절 깎이는데도요. 6개월만에 중학과정을 합격했어요."
고교 검정고시 공부 중 군에 입대했다.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심사 때 검정고시 이야기를 하는 통에 현역 판정을 받고 말았다. 다행인지, 행정병으로 배정받아 맘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휴가 때는 군용가방(더플백) 가득 책을 사들여 읽었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건 군 복무 때 습작 덕이죠. 병영 억압·폭력이 너무 힘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다 죽여버리고 말 거야'(폭력 상관에) 소재 소설은 카타르시스였던 거죠. 군대가 제겐 작가 학교였던 셈이죠."
그는 1988년 1회 전태일문학상(전태일재단)을 받았다. 한 건설노동자가 용접봉을 사러 세운상가에 갔다가 노동자들의 가두시위 현장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주제의 중편 소설 '하루', 작가로 등단한 것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주간 화보잡지 '파리마치'(2년 전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소개)에 1955년 실린 한 표지사진을 콕 집어 '신화'라고 했다. 프랑스 군복의 한 흑인이 삼색기(프랑스 국기)에 거수경례하는 장면을 가리켜 프랑스 제국주의의 알제리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계략이라 비판한 것. 노동자의 정체성을 찾는 백 작가의 소설 '하루'. 그 '신화' 헤집기가 빛을 발한 것이다.
그 뒤 소설창작과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출판사 편집 일(편집장 포함)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생계를 꾸렸다. 시도 썼다. 노동현장 등 삶의 애환을 담은 것들인데 시집 한편 나올 정도라 했다. 장편소설 '사이버세상'은 97년 문학사상(월간) 입상작이 됐다.
1997년 안철수연구소(2000년 이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에 입사했다. 89년부터 작가 및 편집일을 하며 컴퓨터 공부를 했고,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에 기고하곤 했는데, 잡지 편집장이 연구소에 특채돼 그의 권고로 함께 간 것이었다. 프로젝트매니저로 8년여 일했다.
▲ 1988년 1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그의 중편소설 ‘하루’가 실린 수상 작품집. ⓒ 최방식
"안철수연구소 퇴사할 때쯤이에요. 한 친구가 양평에 땅을 사라고 권하더군요. 처음엔 돈이 없어 거절했죠. 부천에서 강남(아내)과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게 만만찮아, 서종에서 출퇴근하면 어떨까 싶어 생각을 바꿨죠. 이장이 땅(현재 사는)을 소개해 달려와 바로 계약했죠."
그의 정배리 삶이 시작됐다. 갑작스런 양평살이로 정신없었지만 마음 한구석 풀뿌리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2006년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자치위원(서종면) 공모 참여. 면단위 정책을 논의하는 기구였다. 위원이 되고 격월 소식지 '서종사랑'(A4용지 16쪽)도 발행했다. 재정 등 이유로 반대가 컸지만 위원장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서종사랑' 창간호를 들고 군수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죠. 연 1천만을 지원하겠다고 하더군요. 서종을 포함 모든 면 소식지 발간비용을 얻어낸 거죠. 1천여부를 역사, 공공기관, 식당 등에 배포했어요. 버스시간표 등 생활정보도 싣고요. 다른 면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더군요."
이어 군행정에 참여할 길이 여의찮아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지역연구소 이사를 맡았다. 도시공원 만들기, 무분별한 도시개발 반대(사람과 동식물·자연을 차별하지 않는), 쾌적한 녹색도시 만들기(쉼터·벤치·소공원 만들기 및 가로수 보전), 어린이 통학로 확보 및 자전거도로 설치 등의 활동을 지금까지 해왔다.
교육자치에도 참여했다. 학교운영위원을 맡아 학생 수 20여명으로 폐교위기를 겪던 정배초교 살리기에 나섰다. 학생수가 80명을 넘겨 120명까지 늘었고, 본교로 승격되기도 했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힘을 합친 열매였다. 교육내용도 현장·체험 학습 중심으로 바뀌며, 학생과 학부모 반응도 좋았다.
"정배초교가 유명해졌죠. 세월초교, 조현초교가 뒤를 이었고요. 학운위가 은행축제를 열고 교정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팔아 기금을 마련했어요. 그 돈으로 도서를 사들이고 남는 돈은 장학금으로 사용했죠. 가을이면 교정을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나무잎 생각나네요."
위기 때 꽃 피운다는 나무... 작가 '불안의 꽃' 어떻게 피어날까
그의 마지막 도전은 마을 이장. 그에게 집터를 소개했던 전임 이장이 권해 2009년부터 2년 임기를 맡게 됐다. 정배리 홈페이지(인터넷)를 만들고 면 행정공문을 전부 올렸다. 인구·가축·수해 조사, 농산물 수매 및 농기구·퇴비(구매) 조사 등의 정보를 공개했다. 알아주는 이는 없었지만 풀뿌리민주주의 초석이라 여겨 그리 한 것.
"외지인 이장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죠. 열린자치 디딤돌을 놓는다고 생각해 열심을 냈습니다. 선거철 표심에 이장 역할이 크다는 것도 그때 알았죠. 귀촌하는 도시운동가에게 꼭 이장하라고 권하죠. 이장협의회는 군수가 눈독을 들이는 기구죠. 표심 때문이겠죠."
▲ 양평군 서종면 주민자치위원을 할 때 만든 마을 문화지도. ⓒ 최방식
노동소설로 시작해 주민자치까지 문예·지역 운동에 공들여 온 작가에게 남은 과제 중 하나는 개인의 노후 설계. 올해 퇴직하는 아내와 그간 생산한 콘텐츠 비즈니스를 고민 중이란다.
"창작활동은 몇 년 전부터 겨울(10월~3월)에 장편소설 하나씩을 쓰고 있어요. '노인병역'(청년은 공부하고 일해야 하니), 흡혈귀 가족(자신의 이복·동복 형제자매 이야기 활용) 등을 소재로 하니 재밌어요. 특정 장르에 소재를 가두지는 않을 겁니다. 스티븐 킹(미저리·쇼생크탈출 작가)처럼요."
그는 1996년 결혼했다. 인터넷통신 하이텔의 한 동아리에서 문자를 주고받다 인연이 맺어졌다. 한국표준협회(법인)에서 37년째 일하는 아내와 아들 하나를 뒀다. 그는 중고 검정고시를 거쳐 1993년 입학한 방송대(국어국문)를 30년만인 지난해 졸업했다.
소나무가 생명의 위기 때 찬란한 꽃을 피운다고 했던가. 종족보존본능이라고들 하는데, 마르틴 발저는 맨 처음 '불안의 꽃'(독일어 앙스트블뤼테)이라 불렀다. 중세 르네상스도 흑사병 창궐과 교황·황제 권력의 붕괴 및 정치사회적 혼란의 불안 속에서 피어난 찬란한 문화였다. 노년의 작가가 피워낼 '불안의 꽃'은 과연 어떨까.
덧붙이는 글
인터넷저널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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