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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10년 걸렸다"는 초상 사진, 진짜 고라니가 있다

[서평] 문선희 사진작가의 책 <이름보다 오래된>

등록|2024.03.09 18:45 수정|2024.03.11 19:42
<이름보다 오래된>은 독특한 책이다. 일종의 초상 사진집인데, 우리가 흔히 보던 사진집이 아니다. 이 책은 고라니를 주제로 해서, 온통 고라니 초상으로 도배를 했다. 표지는 물론이고 속지까지 사진이 들어간 자리는 거의 모두 고라니 얼굴로 채웠다.

이 책은 심지어 사진에서 배경과 색깔마저 지웠다. 사진만 봤을 때는 고라니 얼굴 말고 더 이상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오로지 고라니 얼굴에만 집중하게 만들려고 의도했다면, 그 효과는 100%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고라니가 무슨 슈퍼스타도 아니고, 사진집을 꼭 이렇게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고라니가 요즘 온갖 악명을 떨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어딘가 초점을 잘못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여하간 흔히 접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을 이렇게 만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뜻 봐서는 저자가 고라니 얼굴로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책장을 넘기다 보면, 거기에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걸 느낀다.

알고 보면, <이름보다 오래된>은 의외로 강한 흡인력을 가진 책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고라니 얼굴에서 눈을 떼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고라니에 빠져들어가는 나를 보게 된다. 단순하게 보였던 책이 더 이상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 <이름보다 오래된> 책 표지. ⓒ 성낙선


'고라니를 안다'는 잘못된 생각

이 책은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기록한 고라니의 초상'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생에서 살아가던 고라니들이 인간이 만든 문명을 만나 하루하루 이어가는 위태로운 일상을 보여준다. 특히, 고라니 얼굴에 초점을 맞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표정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거기에 고라니가 어떤 동물인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의 글도 함께 실었다. 사진과 글을 통해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야생동물 중의 하나인 고라니와 관련해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준다.

고라니는 사실 그렇게 낯선 동물은 아니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동물이라, 실제로 그 모습을 보는 게 쉽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고라니는 다른 야생동물들보다는 더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요즘, 사람들과의 접점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치고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제는 다들 고라니를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고라니와 관련해 알고 있는 지식은 극히 단편적인 것들뿐이다.

실체와는 거리가 있는, 피상적인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그것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실 나 자신 고라니 얼굴 생김새조차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이 책이 만들어진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기 진짜 고라니가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이 책을 보기 전까지 나는 고라니가 이렇게까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동물인 줄 몰랐다.

고라니가 처한 현실 같은 건 더욱 더 알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거기에는 고라니라는 이름에 덧씌워진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그동안 고라니라는 야생동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이유도 없지 않다.
 

▲ <이름보다 오래된> 책 속지 일부. 한쪽 면이 비어 있는 건 '초상사진을 찍지 못한 고라니들을 위해 비워둔 것'이다. ⓒ 성낙선


고라니가 겪는 억울한 일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라니를 다시 보게 만든다. 고라니 얼굴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책에는 그동안 고라니에 관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들도 들어 있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온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중요한 사실들이다.

고라니는 우리나라에서 멧돼지, 까치, 집비둘기 등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있다. 그렇다 보니, 온갖 일로 멸시와 구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 먹이를 찾으러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왔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잘 모르면 오해하게 되고 오해가 쌓이면 미워하게 되는데, 인간과 고라니의 관계에서도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미운 짓을 했다고 해도, 그 목숨까지 빼앗는 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지구상에 인간들이 마구잡이로 잡아 죽여도 되는 그런 동물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고라니는 이미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이다. 사자, 하마, 치타, 코알라와 같은 급의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고라니가 우리나라에서만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는 오욕을 겪고 있다. 고라니로서는 이렇게 억울한 일도 없다.

사정은 이렇다. 전 세계 고라니 개체 수가 약 100만 마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정확한 수치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보다 훨씬 적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된다. 놀랍게도 그중 90%에 해당하는 고라니가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머지 10%는 북한과 중국의 극히 일부 지역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고라니 개체수가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름보다 오래된> 책 내용 일부. 저자인 문선희 사진작가가 고라니들과 교감을 나눈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 성낙선


고라니가 처한 참혹한 현실

우리나라에서는 고라니 천적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고라니가 우리나라 땅에서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와는 정반대로, 현재 우리나라 고라니들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다.

남한에서는 고라니가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있는 반면에,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개체수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면서 이런 일이 생겼다. 의도치 않게, 분단 현실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라니처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동물도 없다.

어느 쪽이든 고라니가 처한 현실이 위태로운 것만은 똑같다. 양쪽에서 모두 미래가 불투명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현재 우리나라에 서식 중인 고라니들이 처한 현실이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만 매년 10만에서 20만 마리 사이의 고라니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 고라니들이 먹을 것을 찾아 사람들이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갔다가 엽사들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수가 너무 많다. 거기에 무슨 대책이나 배려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환경부에 따르면, 고라니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은 매년 줄어 2022년 약 11억 7000만 원에 달했다. 그해 약 15만 3000마리의 고라니가 포획되었다고 하니까, 고라니 한 마리당 고작 약 7600원의 피해를 입혔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라니 사냥꾼들이 받는 대가로는 대부분의 지자체가 고라니 한 마리당 3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고라니 목숨값이 고작 7600원이다. 이쯤 되면 고라니 사냥을 계속해야 되는지 의문이다. 여기에다가 고라니 사냥은 지자체들이 농작물 피해액 이상의 금액을 고라니를 제거하는 데 쓰는 기이한 현상까지 낳고 있다. 그럴 바에 차라리 그 돈을 농부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 고라니들을 보호하는 데 쓰는 건 왜 안 될까? 고라니를 죽여 없애는 데도 한계는 있다.

"생태학자들은 사냥을 통한 밀도 조절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야생동물은 우리가 제거하는 만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특히 고라니의 경우 활동 영역이 좁고 포획률이 높아, 매년 지속해서 포획할 경우 지역적 멸종 위험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책 60쪽)
 

▲ 하남시 강변 둔치에서 풀을 뜯고 있는 고라니. ⓒ 성낙선


고라니에 꼭 총을 겨눠야 하나?

사람들은 고라니들에게 총을 겨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들 한다. 현재 개체수만으로도 사람들이 입는 피해가 극심해, 그 이상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그래도 고라니들을 꼭 이런 식으로 '제거'해야 하나?

인간의 탐욕이 문제인데 그걸 엉뚱하게 야생동물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런 식이면, 지구상에 끝까지 살아남을 동물이 얼마 없다. 우리나라에서 고라니를 제거하는 방식이 일본에서 참치 어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돌고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고라니들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나라에서 로드킬로 매해 목숨을 잃는 동물들의 80% 이상이 고라니다.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헤매다가, 혹은 들짐승에 쫓겨 달아나다가 도로 위에서 목숨을 잃는 고라니들이 또 수만 마리다. 그런 와중에도 고라니들을 향한 비난은 계속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고라니는 죄가 없다. 그런데도 농부들에게서는 한 해 농사를 망친 '원수 같은 동물' 취급을 받고, 차를 몰고 다니는 운전자들한테서는 '한밤의 무범자' 소리를 듣는다. 그게 사실은 다 인간들이 벌여 놓은 일들 때문에 생기는 사건들인데도 말이다.

고라니는 겁이 많은 동물이다. 체구도 작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사슴 중에서도 가장 작다. 몸무게가 15kg에서 20kg 사이다.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람들 눈에 띄는 일 없이 숨어 살기 바쁘다. 다만 먹을 게 부족해서, 농부가 쳐놓은 울타리를 넘을 뿐인데, 그게 사단이다.

그렇게 해서 고라니 몸에 유해야생동물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용어도 알고 보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다. 필요에 따라서 동물들의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하다. 그게 인간들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오만한 생각 때문에 멸종 위기를 맞은 동물이 한둘이 아니다.

지구상에 인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동물들 입장에서 놓고 보면, 고라니만큼이나 무해한 동물도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을 모두 한데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동물을 뽑으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 합강습지에서 뛰놀고 있는 고라니 ⓒ 김병기


고라니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

<이름보다 오래된>은 고라니에게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고라니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책이다. 고라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고라니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고라니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고라니들이 처한 현실을 깨닫게 하고, 유해야생동물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용어인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목소리를 좀 더 높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이 책은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목청을 높여 항의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소리 낮춰 말할 뿐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고라니가 절멸한다면 고라니 종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책 67쪽)

이 책은 그저 사람들로 하여금 고라니들의 초상을 통해서, 인간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은 어린 고라니에서 어른 고라니까지 계속해서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고라니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 얼굴들이 사람들을 향해 '내가 왜 당신들한테서 유해야생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고라니들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우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이름보다 오래된>은 상당히 공들여 만든 책이다. 저자인 문선희 사진작가는 고라니 사진을 찍기 시작해 "50여 점의 초상 사진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사진 한 장 허투루 찍지 않았다. 고라니 얼굴 표정을 읽는 데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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